[누가복음 1:26-28] 은혜를 받은 자여 기뻐하라 - 강림절, 이기영 목사

은혜를 받은 자여 기뻐하라 - 강림절

[누가복음 1:26-38]

이기영 목사


[슬라이드]


신학적 렌즈와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본 성육신의 신비

강림절의 이중적 의미: 단순한 회상이 아닌 '기다림'

신약성서의 깊어지는 신비: 예수는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는가?

그리스도론의 진화: 신성 부여의 역방향 연대표

빛을 향한 역주행: 부활절 체험에서 영원한 말씀으로

기원후 1세기, 빛이 비추인 짙은 어둠

수태고지: 평온을 뒤흔드는 '은혜'

마리아의 신앙 활성화 곡선: 두려움에서 찬양으로

카이레(Kaire)의 역설: 참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앙의 정점: 인류 구원을 완성한 한 문장,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오늘 우리의 강림절: 어둠 속에서 빛을 잉태하는 삶


[설교 전문]

신약성서의 첫 번째 저자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체험(Christ experience)을 한 후에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를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했다”(designated)고(롬 1:4)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선언을 “권능으로”(in power), 또한 “거룩한 영에 따라”(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선언했다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된 것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한 근거가 십자가 처형 이후의 부활절 체험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지 10년 내지 15년이 지나, 마가복음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죽은 후 약 40년이 지난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 첫머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함으로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설명을 바울의 입장 즉, “하나님이 예수를 그의 부활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마가는 하늘로부터 들려 온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고 선언했다고 묘사했습니다. 마가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즉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내려왔다고 말합니다(1:10). 바울은 예수의 부활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헌데 마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의 공적인 생애 초기부터 작용한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가 죽은 후 50년 내지 55년에 복음서를 기록했는데, 예수의 신적인 기원(divine origins)에 관한 선포 이야기가 또 다시 이동합니다. 즉 마태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출생 이야기에서부터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도 하나님은 여전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한 분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요셉의 꿈속에 나타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천사들이 선언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이런 신적인 본성(divine nature)이 미리 예정된 것으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의 성취(마 1:22-23; 사 7:14)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마태에게도 예수의 이런 신적인 지위는 “거룩한 영”으로 말미암고, 천사는 요셉에게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1:20)고 선언했습니다. 마태복음이 완성되었을 때, 서기 90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예수를 거룩한 영에 의해 처녀출생 이야기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한 때(마태)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마태 이후 5년 내지 10년이 지나 누가는 마태의 세부적인 사실들을 약간씩 바꾸고 그 이미지들을 좀 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천사는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1:26). 천사는 마리아의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1:35)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약해 설명을 하면, 원래의 바울의 선언은 세월이 지날수록 “거룩한 영”이 구체화 되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된 시간은 더욱 앞당겨져 부활한 때로부터 세례 받은 때로, 나중에는 임신된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인생에서 임신된 순간 보다 더 앞선 시점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서기 90년대에는 완전하게 되어, 그가 잉태되거나 출생하기 이전부터 그런 정체성을 가졌다고 선언했습니다. 선재(pre-existence,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이미 존재했다는 주장)라는 개념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후대에 쓴 편지들, 예를 들어 빌립보서(2:5-11)와 골로새서(2:9) 등에서 선재를 암시했다고 주장합니다. 선재 개념을 중요한 성서적 초점이 되도록 한 성서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이고, 1세기가 끝나고 2세기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신적인 생명이 태초부터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였던 로고스(Logos)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 질서 속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는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두 번째의 출생을 체험했습니다. 즉 그는 육체적으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또한 위로부터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으로도 태어났습니다(1:1-14). 이상은 존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감독의 저서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 김준우 역)의 ‘신약성서의 예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의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는 미국교회의 가장 논쟁적인 문제들뿐 아니라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확신으로 철저하게 정직한 신앙을 추구하며 평생의 고뇌를 통해 쓴 21세기 종교개혁 선언문이라고 하는 저서로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12월초부터 주의 강림절 (Advent)을 4주일간 지키며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강림의 의미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 세상에 강림하는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맞으며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다시 생각하며, 잘못된 것은 참회하고, 고치고, 변하여 아주 새롭게 되자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며 또 다시 오시기를 기원하는 까닭은 이 세상이 그만큼 더 어렵고 험하기에, 그리스도의 화육정신이 우리 각자의 마음에 되살아나고 하늘의 평화와 은총이 이 땅에 임할 수 있기를 간구하는 뜻에서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마음속에 세상을 사랑하여 오신 예수의 그 화육정신이 역사할 때에 이 슬픔의 세상은 능히 기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어둠과 비극으로 찬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의 강림의 의미를 되새기며 어디에서 그 은총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를 좀 더 상고해 보겠습니다.

사실 2천 년 전 예수가 탄생할 때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은 살기 좋거나 평온한 땅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타락한 정치와 군인들의 난폭함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그 훌륭한 공화정의 법치국가로서의 전통을 상실하고 이제는 황제의 권위와 명령이 헌법을 능가하고 있었던, 즉 정치가 법 위에 있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그 본래의 사랑과 희생, 봉사의 정신은 간데 없고, 교권주의와 사리사욕과 종교의식의 허위와 위선에 사로잡혀 제사장과 종교인들의 횡포만 난무할 뿐이었습니다. 가난과 핍박에 찌든 백성들은 예수의 표현대로라면 ‘목자 없는 양떼’같아, 이리저리 방황하며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 같은 의롭고 경건하던 사람은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며 세상에 강림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아셀 지파의 바누엘의 딸 안나 같은 선지자는 결혼 7년을 남편과 살다가 과부가 된 후에 84세가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메시아를 기다린 것을 보면, 저들의 희망은 오직 주그리스도, 메시아의 강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눅 2:22-38).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 보냄을 받고, 다윗 가문의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1:28). 마리아는 이 말의 영문을 모르고 몹시 놀라고 있을 때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1:30-31). 정말 너무나 놀랍고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남자를 알지못하고 동침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어린 소녀에게 ‘임신했다’는 전갈이기에 놀랍고 기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 당시로선 결혼 전의 임신은 큰 수치였습니다. 약혼 남자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또 얼마나 끔찍할까? 마리아로서는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깊이 음미하며 명상하던 마리아는 걱정과 불안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은혜가 자기를 통해 역사함을 깨달았기에 마음을 정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떠한 수모와 희생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이에 마리아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6-48).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쁨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한 체험에서 얻어집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이 사용되고 헌신하게 된 생은 참으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자청하였을 때에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드리는 희생이기에 그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크셨을까? 마리아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기에 예수 탄생은 가능했고, 예수는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대학자요 희랍 문명을 최고로 습득한 바울이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랐기에 초대 그리스도교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는, 특별히 한반도는 여전히 어둡고 불안과 전쟁연습으로, 오만으로, 거짓평화로 위장되어 있습니다. 민생의 복지를 들고 떠들썩하지만 개인적인 생이 순조롭지 못하고 방황하는 뭇 심령들의 모습을 보는 현실이기에 우리는 또다시 오시는 구주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마리아가 처음 두려워하며 고민했으나, 자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됨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었던 변화의 새로운 은혜와 감사의 역사가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역개정판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로 번역되었고 표준새번역은 “은혜를 입은 사람아 기뻐하여라”로 번역하였습니다. 누구나 온갖 역경이나 슬픔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험난한 세태에 또다시 대림절을 맞는 우리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희랍 원전의 ‘카이레’(kaire)는 영어로 hail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환호하며 맞이하다’는 뜻이있으며 ‘기뻐하라’는 뜻이 더 강하며, 이 단어는 빌립보서 4장 4절의 ‘기뻐하라’는 용어와 같은 말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강림절에,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가 갖는 시련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그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운 처지에 살지라도, 당하는 시련을 바르고 깊게 깨닫고 하늘의 평화, 샬롬을 체험하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전하고 나누며 그 어떤 슬픔의 사람들과도 함께 다 같이 기뻐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강림절의 성탄은 기쁨의 날입니다. 예수의 수태를 전하던 천사가 ‘기뻐하라’ 한 것도 성탄 자체가 이토록 기뻐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가 세상에 온 이유도 사실은 이런 하늘의 기쁨을 저들에게 주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옛날 이스라엘인들이 예배하며 기쁨의 환성을 함께 외친 것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이런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헬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 3).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 134:1, 3). 우리도 이 크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감사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모두 형제자매들이 함께 찬송하며 기뻐합시다.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고백한 말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처녀잉태로 어떤 수모나 시련이 따를지 모르나 그녀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하며 절대순종으로 그 뜻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최대 미덕은 순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서의 요청이든 가정과 교회, 사회적 참여에도 하나님이 내리셨다는 각오가 설 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최대의 미덕이요 유익입니다. 마리아의 절대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게 하였는데,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고, 성탄에서 부활승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는 다 이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였습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순종이 인류 구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게 한 것입니다.

(2012.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