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도구인가?
1982년 7월 18일 / 로마서 6장 11-14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세례도 받았다. 옛 사람을 무덤에 묻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몸을 악에게 맡겨 악을 섬기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가 예수와 하나될 수 있다면 그 때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때요 부활 가운데 있는 때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두 주일 동안 ‘예수와 하나되는 신앙’이라는 주제의 증언을 드렸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산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11절은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다는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옛 나’, ‘옛 자아’, ‘옛 우리’는 죽었다. 이 죽었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불의를 위해 살던 우리가 이제는 불의에 대하여 상관없게 된 것이다. 비방하고 헐뜯던 우리가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을 중심하여 생각하고 이웃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죄가 우리를 향하여 화살을 쏘아댄다. 죽음이 우리를 향하여 화살을 쏘고 공격을 한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신앙인이라면 이제는 그 화살에 맞지 않아야 한다. 아직도 그 화살에 맞아 비틀거리고 아직도 죄가 시키는 대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녀서는 안 되겠다고 했다. 죄가 우리에게 분열의 마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미움과 시기의 마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거기에 조종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제, 바울은 분위기를 바꾸어서 강력하고 적극적인 권면을 주고 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과 상대하여 사는 자이며 하나님의 가슴 가운데 있게 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둠을 향하여 있지 않다. 해바라기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 그리고 더욱 단호하게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어 주어 불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거나 죄에 내맡기는 것 둘 중의 어느 하나의 상태에 있게 된다. 죄에 내맡긴다는 표현은 대단히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자포자기와 같은 상태요 저항과 항거의 의지가 없는 상태다. 전혀 억제해 보려 하거나 죄의 조종을 벗어나 보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죄에게 나를 맡긴다. 미움이 고개를 들면 그 미움에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기심이 고개를 들면 그 이기심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갑자기 “불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온 몸이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제까지 개인적 차원의 분위기에 사회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개인의 도덕이 사회와 어떤 관련성 가운데 있는 것인가를 말하려 한다. 이제까지는 개인의 윤리, 개인의 신앙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불의의 도구”, “의의 도구”라 한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하나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라 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것은 전혀 윤리의 문제요 도덕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의라는 것, 정의라는 것, 불의라는 것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관계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도구”란 무엇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고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제 도덕과 윤리의 사회적 성격을 생각해 보자. 하나는 불의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악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는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한다. 악을 이루어 나가는 도구가 되지 말자. 내 삶이 불의의 세계를 지탱시켜 주거나 불의의 세계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불의의 세계란 불평등의 세계다. 불의의 세계란 부자유의 세계다. 불의의 세계란 부정의요 비진실의 세계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안 한다거나 근무를 태만히 한다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산업사회에 불평등을 만드는 도구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양^을 짓밟고 원천적으로 부자유하게 하는 악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데 보탬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부정의, 비진실이 점점 더 승해 가는 데 있어서 도구 노릇을 하지 말라는것이다.
나는 첫 주일 증언에서 살인 병균을 배양하는 공장 이야기와 거기서 경비를 맡은 자의 문제를 제기했다. 거기서 열심으로 진지하게 경비를 하는 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가장 올바른 처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의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낳을 것인가, 나의 공헌이 무엇을 이루어 가고 있는가를 밝혀 보는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는 것을 판단하지 않은 채 주어진 일에 충실한다고 할 때 오히려 불의의 도구 노릇을 할 수도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같은 의미일지 모르겠으나 “도구”라는 말이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회성은 불의한 사회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불의”, “악”을 하나의 인격으로 간주하고 있다. “불의”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악 자체를 위한 도구로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붙들려 가서 심문을 받노라면 심문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뭐하고 싶어서 하는가? 하라고 하니 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자신을 불의의 하수인으로 내어 놓는 것이다. 공화당 말기에 나는 ‘당신들이 공무원으로 충실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저항을 하는 것이 참 공무원’이라 말한 적이 있다. 불의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자아는 죽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가 해방 직후 크게 잘못한 것 중의 하나는 가장 반일을 하는 척하면서 정작 친일파는 그대로 놓아 두었거나 오히려 중용한 사실이다. 일제에 충성하던 그들은 자유당 독재에 충성했고 또 공화당 유신 정부에 충성하여 왔다. 자신을 불의의 하수인으로 내놓은 것이다.
우리 개인의 성결은 중요하다. 개인이 윤리적으로 바로 선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음행치 않고 방탕하지 않고 원수맺지 않고 싸우지 않는 것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시기하거나 분열하거나 당파심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 질투와 술주정에서 벗어나오는 것도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금욕주의나 수도사와 같은 생활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개인의 성결을 말하고 개인의 원리를 말하는 것은 그것들이 이루어가는 사회의 가치나 사회의 형성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권면에 이어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라고 했다. 불의의 도구, 악의 도구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의의 사회, 의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음행하지 않고 방탕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술주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같은 개인적 변화를 통하여 산업사회에 정의가 있게 하여야 한다. 경제세계에도 의가 있게 해야 한다. 분열, 당파심, 이기심, 원수맺기를 그만둠으로써 이 같은 개인적 변화를 통하여 정치현실도 의가 지배하게 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에 하나님을 위한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도구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의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일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사실 중간은 없는 법이다. 악의 세력에 부화뇌동하는 것보다는 은둔하는 편이 낫다거나 불간여가 낫다고 하는 태도는 소극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협조가 되곤 한다. 은둔하고 있는 동안,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는 동안 불의는 그 위치를 굳혀 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소위 선비주의가 그렇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것이다. 백로의 고매한 자태는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의를 이루어 나가지는 못한다. 까마귀 판이 되는 것을 뒤집지는 못 한다.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정의의 쓰임을 받아야 한다. 정의가 부를 때 나서며 의가 필요로 할 때 자신을 바쳐야 한다.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자, 의를 이루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은 개인적 도덕성을 전제로 한다. 높은 뜻을 기리는 판에, 차원 높은 사고를 하는 판에 윤리, 도덕 따위는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 도덕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과거의 나를 무덤에 묻어 버리는 것은 그것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왜 나를 묻느냐? 하나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다. 왜 성결하여야 하느냐? 정의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인으로서 육체의 욕정에서 벗어나야 하느냐? 정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다. 왜 세례를 받느냐? 정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제 자신에게 묻자. 우리는 정의의 도구인가, 불의의 도구인가? 내가 사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죄의 권세를 위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은 그가 묻힌 무덤에 함께 묻히는 사건 속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은 그의 부활에서 함께 부활하는 사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가 이루어 나가시는 의와 정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회상 노트] 예수와 하나되는 신앙
바뀌지 않는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구나. 그저 언제나 그렇구나. 내게는 대선배가 되는 어떤 목회자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목회란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을 부으면 몽땅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만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를 지나고 보면 콩나물은 다 자라서 식탁에 오르기에 충분하게 된다. 목회에 조바심은 금물이다.
내가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들려준 말씀이었다. 그 때 벌써 나에게서 조바심 같은 걸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콩나물은 자라지 않느냐? 자랐지 않느냐? 어느새 이 교회에서 10년이나 설교를 하고 목회를 했지만 콩나물처럼 밥상에 오를 만큼 자랐다고 할 수 없다. 조바심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자라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야 한다.
왜 그럴까? 혁명적 사건을 일상적이고 예사스런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례’다. 세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사건이 아닌가!
최근의 어떤 책에 장로고시 면접시험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것을 읽었다. 필자는 피고시자에게 술, 담배를 하느냐고 기습적으로 물었다는 것이다. 단호하게 안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황하는 빛을 띄다가 안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한다. 아마 그도 그날 이후 술, 담배를 끊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술, 담배를 좋다 할 생각도 없고 그것 자체에 대해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그것을 물었다니 안타깝다. 말하자면 금주, 금연을 혁명적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술, 담배류의 금욕을 하고 그런 데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럼으로써 가치관에 혁명을 이루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콩나물 자라듯 하는 신앙은 예수의 죽음에의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닌가! 개인적, 사적 관심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사회의 온갖 불의와 부정의는 제 세상을 만들고 만다.
기독교인의 경건, 기독교인의 자유는 훨씬 깊고 근본적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그리 될 수 있을까? “무덤”, “죽음의 영향권 밖”은 결국 “정의의 도구”이기 위해서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