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대오에의 초대
1983년 10월 30일 / 마가복음 8장 31-34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예수에게 무엇인가를 구한다. 그것을 위해 여기 매주일 나오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시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여기 나온 것은 내 요구 때문이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요청 때문이어야 할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 교회에 특별한 손님들을 초청한 날이다. 말하자면 “예수 믿읍시다”라는 말을 직선적으로 하기가 적절치 못하여 가까운 분들을 초청하고 교회와 관련을 맺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교인이 눈에 띄게 늘어날 리가 없다. 하여간 우리 교회도 여러분이 합류하여 교인이 늘어났으면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또 손님을 초대하여 왜 그리스도인 되기를 기대하는가?
한국 교회의 교인수를 800만이라 하는데 올 1년 동안 100만은 늘어났을 것으로 추산한다면 900만, 혹은 1,000만이라는 놀라운 숫자가 된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중요한 이유는 역시 한국 교회의 자기 확장본능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고 전도에 열성인 이유가 크다고 본다. 이것 자체가 물론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교인이 급팽창하는 데는 사회과학적인 이유도 있다고 본다. 예컨대 우리 내부에 팽배되어 있는 불안을 달래기 위하여 종교가 필요하다는 이유라든가,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사람에게 다른 일거리는 생기지 않고 시간은 남아나는 과도적 시기에 무언가 소일거리를 찾는 층이 생기고 있다는 이유 등이다. 전자는 서민 대중들에게 해당되고 대중이 아닌 일부 상류층, 즉 퍽 불안하다고 느끼는 상류층 사람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후자 역시 경제적으로 중상류층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또 우리는 수천년 동안 소위 보장종교로서의 민속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 인사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로 고정될 만큼 무서운 현실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그 무엇을 찾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병마에 쫓기고 상전의 호령에 몸을 사리며 관헌과 높은 관리들에게 언제나 재산과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살았기 때문이다. 로스케, 되놈, 왜놈 하지만 그들이 한번 몰아쳐오면 재산도, 목숨도, 처녀도, 유부녀도 남아나지를 못했다. 나를 지켜주는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시집을 가서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것도 큰 죄악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게 해주는 그 어떤 힘을 요청하게 되기도 했다. 자식이 장성하면서, 상인의 경우는 아예 포기한 것이었지만, 양반네들은 그 자식의 입신양명이 또한 문제였다. 과거 시험을 보려는 아들을 떠나 보낸 부모는 앞날의 영달을 보호해 주는 신을 찾게 되었다.
그 급하고 현실적인 요청에 따라 형성된 것이 갖가지 무속신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속신앙이란 철저한 보장종교가 되도록 강요받아 왔다. 재산, 목숨, 딸자식을 지켜주어야만 했고, 아들을 낳게 해주고 그 아들 또한 과거에 급제케 해주어야 했다. 결혼을 하거나 이사를 할 때도 부정이 없도록 해주어야 했다. 이것이 우리 문화와 우리의 뼈 속 깊이 끈적이는 유전인자의 정체다. 그 유전인자가 상대를 바꾸어 끝끝내 보장종교를 요청하고 찾아다니게 한다. 아무리 씻으려 해도 이 유전인자를 씻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문화생할의 수준이 높아져 가면 가장 그럴듯한 종교로 그 기대를 옮겨 놓음으로써 오염시키고 말았다.
과거에 거의 모든 백성이 불교도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처럼 20-30%가 아니라 80-90%였다. 불교의 본래적 교리는 차치하고라도 무속종교인지 불교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성황당이나 큰 암벽, 나무 대신 불상 앞에서 절을 하는 것으로 그 대상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불교에 의해 신자가 변혁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 의해 불교 자체가 변질되고 말았다. 상당히 오랜 동안 우리 민족은 불교를 새로운 보장종교로 삼았다. 불교는 개인의 오늘과 내일을 보장해 줄 뿐 아니라 호국종교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아침 저녁으로 어제 오늘로 종주국이 바뀔 정도로 외세에 밀려 다녔던 우리의 처지가 불러낸 결과다. 몽고가 침범했을 때 큰 사찰이 세워지고 또 어디의 침략을 받았을 때 호국을 위해 절이 세워졌다. 개인적 차원의 보장종교가 국가적 차원의 보장종교로 그 폭을 넓혔을 뿐 여전히 보장종교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무엇이고 좋은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서양적인 것이다. 서양 흉내를 내려고 한다. 서양화한 것이 가장 좋고 잘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물론 서양 것이 우리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경향이 있다. 모두의 깊은 속에는 ‘서양화’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서양이 강하고 서양이 좋아 보인다. 서양이 잘 산다. 그런데 그 서양은 모두가 기독교 국가요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더라. 무속 신앙보다 불교보다 유교보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서양에 한 발 가까이 가는 것이라 기대하게 된 것이 기독교를 현대판 보장종교로 만들어 가는 이유가 되고 있다. 출세하는 사람도 서양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적어도 서양물을 먹고 와야 내로라 하고 산다. 역시 서양이 좋고 그래서 또 기독교는 인기가 있게 된다. 하여튼 무당, 불교 다 겪어 보았지만 역시 예수교가 가장 실속있는 종교요 무언가를 실제적으로 보장해 주는 종교라는 의식이 여기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생기게 되었다. 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데는 이같은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출세와 안전, 건강과 행복, 돈과 양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종교로 기독교가 찍힌 것이고 기독교의 교역자들은 그에 빨리 야합하여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인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개인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정의와 사랑, 내가 아닌 우리의 공존, 경쟁이 아닌 양보가 차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일까? 아니면 여전히 무속적인 신앙 혹은 변질된 불교신앙, 불상 앞에서 손을 비벼 합장하며 기구하는 바로 그것을 이제는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것인가?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예수도 한 때 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던 때가 있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병자를 고치고 가르치시는 것이 세상의 권력자보다 훨씬 권위가 있는 그분에게서 어떤 보장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마태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는 예수께 아들의 입신양명을 부탁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출세를 부탁한다. 보장적 지도자로 머물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예수 자신이 받고 있었다. 언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 바로 그때다.
예수는 그들에게 언제나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언제나 옹위했고 큰 상전으로 모셨다. 날로 인기가 높아가고 모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거기 영원히 안주하고픈 유혹이 예수에겐 왜 없었을까? 그런데 어느날 예수는 청천의 벽력 같은 선언을 한다. 너희가 지금까지 나에게 가지고 있었던 기대가 곧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의 전부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부차적이다. 너희, 나의 제자라는 너희만큼은 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너희에게 보장인이 되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나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저들의 기대를 산산이 부셔뜨리는 선언이다. 보장적 메시아로서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옴으로 따라다녔던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는 선언이다. 모두가 흩어질 위험조차 있는 것이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또 다른 보장적 메시아를 찾아 나서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것을 선언하고 만다. 모두가 떠나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그가 그리스도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홍분하여 침을 튀기며 오히려 예수를 가르치려 한다. 사람들은 흩어져 버린다. 정작 그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 따르던 군중들은 돌연 예수의 반대자로 표변한다. 기대를 배신한 대가를 그에게 주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만큼 배반감도 컸던 것 같다.
예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보장이 문제가 아니라 내 뒤를 따라옴이 문제다. 보장을 과연 받을 수 있느냐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의 길, 그의 삶을 따라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문제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정적으로 대중을 되돌려 보내는 말이요 제자들에게 심각한 고뇌를 주는 선언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예수의 선언을 할 때가 이미 왔다고 본다. 비록 이 선언이 한국 교회 사람들을 산산이 흩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흩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연의 자리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소위 기독교 국가를 보게 된다. 인구의 1/4, 1/2이 아니라 전 인구가 그리스도인인 국가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증진이 있고 신앙적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일까? 고난과 배척과 죽임을 선언하지 않은 채 양적 증가의 길만을 걸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자신을 위한 하나의 보장종교 또는 의식을 위한 편의종교 이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라,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선언을 유보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교회를 다녀볼까 하던 사람들조차 돌아서게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예수에게 희망이라는 차원에서의 보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존의 보장을 우리는 그에게 구하고 또 그는 그것을 보장해 주51자 한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사고 기도하라 하시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는 제자의 무리가 필요했다. 고난과 배척과 죽임의 길을 함께 걸어갈 거룩한 무리가 필요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필요했다.
우리 교인들은 물론이고 오늘 여기 초대를 받고 오신 분들 중에 진정으로 쉼과 보장이 요청되는 분이 있는가? 예수는 여러분을 쉬게 하실 것이며 꼭 필요한 보장을 주실 것을 믿으라. 그러나 또한 보장보다 십자가의 길을 걸을 무리를 찾고 계신 우리 주님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가는 다음 주일로 미룰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는 그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부름을 듣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교인되는 동기를 그 부름에서부터 찾으라. 예수의 제자들은 그랬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장종교로 전락시키고 오염시키려는 육적인 나의 요청을 거두어 들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복하여, 십자가 대오에의 초대에 응답하여 감히 그 길에 서기 바란다.
[회상 노트] 땅과 하나되는 하늘
수도교회에는 ‘전도의 날’이나 ‘총동원 주일’이란 것이 없다. ‘친구 초대의 날’이란 것이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초대하여 교회를 맛보게 해주자는 프로그램이다. 예전도 친교도 어울림도 보여주고 우리의 신앙고백도 보여주자는 것이다. ‘예수 믿으십시오. 믿으면 형통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 - 이런 투로 설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잡은 테마는 십자가였다. “십자가 대오(隊伍)에의 초대”가 설교 제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것, 선택당하는 것임을 말해야 했다. 십자가의 길을 걸을 무리를 주님께서 찾고 있다고 설교하려 했다.
다음 주일에도 설교를 이었다. 우리가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을 찾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당신을 초대한다는 심정이었다. 내 가슴 가득히 구속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있었다.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오늘의 신앙인도 교인도 아니라 여겼다.
초대받고 그 예배에 참예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그러나 금방 교인이 되겠다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성공하지 못한 프로그램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그렇다, 그러나다) 나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날, 그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했다면 무의식 속에서라도 복음의 씨앗이 잠재할 것이기에 그렇다. 선교는 단기가 아니다. 장거리 레이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