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깊이 읽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에 對[대]한 硏究[연구]

落穗[낙수]
1935년 2월 10일

[출처]

  • 『신학지남』 17권 2호, 1935. 3. 2-34
  • 『낙수』 1940년, 79-95.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1권, 53~61.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70~81.


역사적 사실이자 기독교 신앙의 뼈대, 그리스도의 부활

[안내의 글: 원문을 읽기 전에]

이 분석 자료는 1935년에 발표된 장공 김재준의 글 『그리스도의 復活에 對한 研究』를 문장별, 문단별로 분석한 글이다. 당시 기독교의 초자연적 기적과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자유주의 신학 및 합리주의적 성서비평학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저자는 기독교가 관념이나 신화가 아닌 ‘철두철미한 역사적 종교’임을 강력하게 변증한다.

본문은 부활이 과학적 설명의 유무에 의해 좌우되는 가설이 아니라 객관적 팩트(Fact)임을 밝히는 방법론적 서론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기절설, 도난설, 환상설 등 부활을 부인하는 당대 학설들의 모순을 치밀하게 논파하고(소극적 논증), 제자들의 극적인 삶의 변화와 사도들의 역사적 기록을 통해 부활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입증한다(적극적 논증). 또한, 무덤에 뉘었던 몸과 동일하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해 영광스럽게 변화된 ‘부활체의 본질’을 바울 신학을 바탕으로 규명하며, 나아가 부활이 신자의 칭의와 구원 완성에 어떤 절대적 의미를 갖는지 신학적으로 확증한다. 이 분석을 통해 독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 정통 신학이 마주했던 지성적 도전과, 그 도전을 성경적 텍스트와 철저한 논리로 극복해 낸 신학적 통찰의 진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1] 서론: 부활 연구의 방법론과 역사적 사실성의 전제

이 부분은 글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설정하는 단락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관념적 철학이나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종교임을 튜빙겐 학파 키텔 교수의 말을 인용해 선언한다. 부활 역시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How)를 따지기 전에,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났느냐(Did it happen)를 먼저 묻는 것이 올바른 연구 방법임을 철저한 논리로 규명하고 있다. 이후 두 번째 단락에서 부활을 부정하는 학설들을 먼저 검토함으로써(소극적 논증) 역으로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겠다는 변증학적 전개 방식을 예고하고 있다.


튜빙겐의 키틸 敎授[교수]는 말하기를 그리스도敎[교]는 徹頭徹尾[철두철미]한 歷史的[역사적] 宗敎[종교]이다.

  • ‘튜빙겐’은 독일의 유명한 신학부 소재지이며, ‘키틸(Gerhard Kittel)’은 저명한 성서학자이다. ‘철두철미(徹頭徹尾)한’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꿰뚫는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함을 의미한다.
  • ‘말하기를 ~이다’라는 직접 인용의 형식을 빌려 권위 있는 학자의 주장을 글의 대전제로 삼고 있다.
  • 기독교는 인간의 사변이나 상상으로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 뿌리를 둔 종교임을 확언한다.
  • 19세기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신화로 치부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정통 복음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역사성을 변호하기 위해 내세우는 핵심적인 신학적 방어선을 보여준다.


이는 모든 어떤 特秀[특수]한 人格[인격], 場所[장소] 時間[시간]에 關係[관계]된 具體的[구체적] 事件[사건]의 記錄[기록]이다.

  • ‘특수(特殊)한’은 보통과 다르게 구별되는 것을, ‘구체적(具體的)’은 형체를 갖추어 실재하는 것을 뜻한다.
  • ‘인격, 장소, 시간’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나열하여 역사를 구성하는 시공간적 실재를 구체화하고 있다.
  • 성경의 기록은 막연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특정 인물(예수 그리스도)이 특정한 장소(팔레스타인)와 특정한 시간(1세기)에 실제로 겪고 일으킨 구체적 사건들의 역사적 기록이라는 뜻이다.
  •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기독교의 ‘성육신(Incarnation)’ 신학이 배경에 깔려 있다. 영지주의나 신비주의처럼 물질과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를 철저히 배격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敎[교]는 우선 이 歷史的[역사적] 意味[의미]에서 理解[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강한 이중 부정 표현을 사용하여 필수적인 의무와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철학적 사색이나 도덕적 교훈으로 접근하기 이전에, 반드시 역사적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먼저 접근해야 한다는 키텔 교수의 주장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復活紀事[부활기사]에 對[대]해서도 우선 그 歷史的[역사적] 考察[고찰]부터 始作[시작]함이 堅實[견실]한 硏究方法[연구방법]일 것이다.

  • ‘부활 기사(復活紀事)’는 부활을 기록한 문헌(성경)을, ‘고찰(考察)’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함을, ‘견실(堅實)한’은 속이 차고 단단하여 믿음직함을 뜻한다.
  • ‘그러므로 ~대해서도’라는 논리적 확장을 통해 앞선 대전제(기독교는 역사다)를 글의 핵심 주제(부활)에 적용시키고 있다.
  •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이므로, 부활에 대해 연구할 때도 가장 흔들림 없는 건실한 방법론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를 먼저 묻는 것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우리가 過去[과거]를 歷史的[역사적]로 考察[고찰]할 때 第一[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果然事實[과연사실]이었느냐? 이것이 果然[과연]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로 존재한 것이었느냐?」하는 問題[문제]요 「이것이 그럴理[리]가 있느냐?」 「이것이 어떤 自然法則下[자연법칙하]에서 이렇게 되었느냐?」하는 所謂[소위] 哲學的[철학적] 解釋[해석]이나 科學的[과학적] 說明[설명]은 第二[제이], 第三[제삼]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 ‘과연(果然)’은 정말로, 틀림없이라는 뜻이며, ‘객관적(客觀的)’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을 뜻한다. ‘자연법칙(自然法則)’은 과학적 원리를 말한다.
  • ‘~하는 문제요’, ‘~은 제2, 제3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며 두 가지 질문(사실의 존재 여부 vs 사실의 해석)을 겹낫표(「」)로 병치하여 우선순위를 확고히 정립하는 대조 구조를 취한다.
  • 과거 사건을 연구할 때 최우선 질문은 "이것이 실재했던 객관적 사실인가?(Fact)"이며, "어떻게 이런 일이 과학적/철학적으로 가능하지?(How)"라는 질문은 부차적인 문제로 미루어야 한다는 학문적 원칙을 세운다.
  • 계몽주의 이후 기적을 과학적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아예 ‘사실’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합리주의적 성경 비평 학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는 부분이다.


事實[사실]의 眞實性[진실성]은 그 事物[사물]에 對[대]한 哲學的[철학적] 或[혹]은 科學的[과학적] 說明[설명]의 有無[유무]에 依[의]하여 左右[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 ‘진실성(眞實性)’은 거짓이 없는 참된 성질을, ‘유무(有無)’는 있고 없음을 뜻한다.
  • ‘~의 유무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호한 부정문을 통해 인과관계의 오류를 차단한다.
  • 어떤 사건이 참된 사실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그것을 철학이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太陽[태양]이 地球[지구]를 돈다고 說明[설명]하던 때나 地球[지구]가 太陽[태양]을 돈다고 說明[설명]하는 이때나 太陽自體[태양자체]의 實在性[실재성] 眞實性[진실성]에는 何等[하등] 差異[차이]가 없는 것이다.

  • ‘실재성(實在性)’은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을, ‘하등(何等)’은 아무런, 조금도라는 뜻이다.
  •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과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라는 과거와 현재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대조하는 예증법을 사용한다.
  • 과거 인간이 태양의 움직임을 잘못 설명했든 지금 과학적으로 옳게 설명하든, 하늘에 ‘태양’이 존재한다는 객관적 사실 자체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쉬운 예로 설명한다.
  • 인간의 과학적 설명(이성)은 언제든 변하고 불완전할 수 있지만, 객관적 진리(사실)는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지성사적(知性史的)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의 周圍[주위]에는 우리의 有限[유한]한 頭腦[두뇌]로서 至極[지극]히 說明[설명]할 수 없는 「事實[사실]」이 얼마든지 存在[존재]한 것이다.

  • ‘유한(有限)한’은 한계가 있음을 뜻하며, ‘지극(至極)히’는 더할 나위 없이를 의미한다.
  • ‘유한한 두뇌’와 ‘존재하는 사실’을 대비시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도저히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지만, 엄연히 실제로 존재하는 일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겸손한 인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說明[설명]할 수 있든 없든간에 그것이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이라면 그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사실로 판명된 때에는 그 실재를 용인 안할 수 없는 것이다.

  • ‘판명(判明)된’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을, ‘용인(容忍)’은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인정함을 뜻한다.
  •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않을 수 없으며’, ‘~안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강렬한 이중 부정의 연쇄를 통해 인간이 취해야 할 필연적인 태도를 강제하고 있다.
  •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설명 능력을 넘어설지라도, 어떤 사건이 객관적 증거를 가진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면 그 사실 앞에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실재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학문적, 신앙적 태도를 촉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에 對[대]해서도 이것이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이었다면 우리가 哲學的[철학적]으로 解釋[해석]하기 어렵고 科學的[과학적]으로 說明[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事實[사실] 앞에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그 眞實性[진실성]을 容忍[용인]안할 수 없을 것이다.

  • ‘따라서 ~에 대해서도’로 논리를 다시 부활의 주제로 회귀시킨다. 가정법(’~이었다면’)과 양보절(’~할지라도’)을 결합하여 결론을 도출한다.
  • 앞선 논리를 부활에 최종적으로 대입한다. 부활이 과학적, 철학적으로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객관적 사실임이 입증된다면 우리는 그 진실성을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단호한 결론이다.


[2] 본론 1: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 입증(소극적ㆍ적극적 논증)


1. 반대 학설 논파 (소극적 논증)


그러면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果然[과연]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이었는가?

  • 단락이 전환되며 수사의문문 형식을 사용하여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본격적인 역사적 논증의 시작을 알린다.
  • 이제 전제는 세워졌으니,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인 “부활이 정말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실이었는가?”를 파헤쳐 보자는 선언이다.


우선 이것이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이 아니었다는 學者[학자]의 設[설]을 檢討[검토]함으로 말미암아 그 反證[반증]을 찾아 보기로 하자.

  • ‘반증(反證)’은 어떤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 ‘~함으로 말미암아 ~찾아 보기로 하자’라는 청유형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변증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긍정적인 증거를 나열하기 전에 먼저 부활을 부정하는 학자들의 학설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의 모순(반증)을 찾아내어 깨뜨리는 방식(소극적 논증)을 취하겠다고 밝힌다.
  • 반대 이론의 허점을 드러내어 본래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기독교 변증학(Apologetics)의 전형적이고도 탁월한 논리 전개 방식이다.


이 學說[학설]은 세 가지로 大別[대별]할 수 있다.

  • ‘대별(大別)’은 크게 갈라 나눈다는 뜻이다.
  • 숫자를 명시(’세 가지’)하여 독자가 이어질 내용을 체계적으로 따라올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문장이다.
  •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들은 크게 세 가지(이후 본문에서 기절설, 도난설, 환상설로 이어짐)로 분류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1) 기절설 비판


[1]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復活[부활]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죽지 않았던 것이라는 設[설]이다.

  • 숫자 ‘[1]’을 붙여 첫 번째 반대 학설임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A가 아니라 B라는 설이다’라는 대조의 문장 구조를 통해 기절설의 핵심 주장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완전히 죽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의 첫 번째 가설(기절설)을 소개한다.
  • 18~19세기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영향받은 성서비평학자들(특히 벤투리니, 파울루스 등)이 초자연적인 기적(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성주의적 억측이다. 기적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리스도가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서 氣絶[기절]했었으나 十字架[십자가]에서 내리워져 石坑[석갱] 속에 누이고 못자국을 싸고 香油[향유]를 바르고 應急措置[응급조치]를 당할 때 다시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 ‘기절(氣絶)’은 의식을 잃음, ‘석갱(石坑)’은 굴을 파서 만든 돌무덤, ‘향유(香油)’는 시신에 바르는 향기로운 기름을 뜻한다. ‘응급조치(應急措置)’는 위급한 상황에서 임시로 하는 치료이다.
  • ‘石坑[석갱]’을 『신학지남』, 『낙수』에는 “石塚[석총]”,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石埃[석애]”로 표기하고 있다.
  • ‘應急措置[응급조치]’를 『신학지남』,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應急手當[응급수당]을”로 표기하고 있다.
  • ‘~었으나’, ‘~누이고’, ‘~싸고’, ‘~바르고’, ‘~할 때 ~나온’이라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 동사의 연속적 나열을 통해, 기절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상상한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실신(기절) 상태였을 뿐이며, 서늘한 돌무덤 속에 안치된 후 향유 등 당시의 장례 절차가 일종의 응급치료 역할을 하여 스스로 의식을 회복해 걸어 나왔다는 학설의 구체적 내용을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죽이기 爲[위]하여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渴望[갈망]하던 官憲[관헌]들과 바리새 敎人[교인]들이 그 死生[사생] 判明[판명]되기 前[전]에 그 屍體[시체]를 十字架[십자가]에서 내렸을 理[리]가 어디 있는가?

  • ‘갈망(渴望)’은 간절히 바람을, ‘관헌(官憲)’은 로마 제국의 총독과 군인들을, ‘사생(死生) 판명(判明)’은 죽고 사는 여부가 명백히 밝혀짐을 뜻한다.
  •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갈망하던’이라는 반복 수식을 통해 적대자들의 살의(殺意)를 강조하고, ‘~내렸을 리가 어디 있는가?’라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그들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강력히 반박한다.
  •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로마 군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숨이 확실히 끊어졌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으로 넘겨주었을 리가 만무하다는 역사적, 정황적 반박이다.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서 피를 흠뻑 흘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로 물과 피를 있는대로 쏟은 그리스도가 가령 기운을 차린다니 어찌 數時間內[수시간내]에 勝利[승리]의 氣像[기상], 靈光[영광]의 主[주]로 보일 수 있겠는가?

  • ‘기상(氣像)’은 사람의 타고난 기백과 태도를 뜻한다.
  • ‘數時間內[수시간내]에’는 『신학지남』에서 “數十時間以內[수십시간이내]에”로 표기되어 있다.
  • 육체적인 참상(’피를 흠뻑 흘리고’, ‘물과 피를 쏟은’)을 길게 묘사하여 원인으로 삼고, ‘가령(만약) ~어찌 ~보일 수 있겠는가?’라는 수사의문문으로 그에 따른 결과(승리와 영광)가 절대 불가능함을 강하게 대비시켜 논리적 모순을 찌른다.
  • 백번 양보해서 예수가 돌무덤 안에서 깨어났다 한들, 손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어가는 중환자가 어떻게 단 몇 시간 만에 스스로 돌무문을 밀고 나와 제자들에게 승리자이자 영광스러운 구원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겠느냐는 의학적, 상식적 일갈이다.


도리어 蕭條落寞[소조낙막]의 感[감]을 줄 것이 아닌가?

  • ‘소조낙막(蕭條落寞)’은 몹시 쓸쓸하고 적막하며 처참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 ‘도리어(오히려)’라는 부사로 앞 문장의 ‘승리와 영광’을 뒤집고, ‘~아닌가?’로 반문하여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 겨우 숨만 붙어서 깨어난 처참한 중환자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새 생명의 용기를 주기는커녕, 깊은 절망과 슬픔, 동정심(처참함)만을 안겨주었을 것이라는 심리적이고 사실적인 반박이다.


이 說[설]은 너무나 어이없는 說[설]이므로 不合理[불합리]라는 것보다도 學的[학적] 良心[양심]의 破産[파산]을 暴露[폭로]하여 自身[자신]의 不道德[부도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 ‘불합리(不合理)’는 이치에 맞지 않음을, ‘학적(學的) 양심의 파산’은 학자로서 가져야 할 정직성과 객관성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뜻한다. ‘폭로(暴露)’는 숨겨진 사실을 드러냄을 뜻한다.
  • ‘~라는 것보다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비교와 단정의 구조를 통해, 비판의 초점을 단순한 ‘논리적 오류’에서 학자들의 ‘도덕적 타락’으로 격상시켜 통렬하게 비판한다.
  • 이 기절설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기적을 억지로 부정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상식마저 왜곡해 버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지적 불정직성과 윤리적 타락을 스스로 증명하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 합리적이고 이성적임을 표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닫힌 세계관(초자연주의 거부)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추론을 동원하는 세속 학문의 위선을 정면으로 타격하는 강력한 변증학적 결론이다.


2) 도난설 비판


[2]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事實[사실]이나 다시 산 것은 아니라는 說[설]이다.

  • 숫자 ‘[2]’를 붙여 두 번째 반대 학설임을 명시하고, ‘A이나 B는 아니라는’ 부분 부정을 통해 학설의 핵심을 간명하게 제시한다.
  • 앞선 기절설과 달리 예수의 육체적 죽음 자체는 인정하지만, 부활은 부정하는 또 다른 자유주의적 가설(도난설)을 소개한다.


만일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선 그 屍體[시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屍體[시체]가 없으니 어찌된 셈인가? 그 시체 두었던 무덤은 어찌하여 비었는가?

  • ‘만일 ~다면 ~할 것이다’라는 가정법을 통해 당연한 전제를 세운 뒤, ‘어찌된 셈인가?’, ‘어찌하여 비었는가?’라는 수사의문문을 연달아 던져 반대파들을 논리적 궁지로 몬다.
  • 부활을 부정하려면 죽은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떡하니 존재하므로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추궁하는 문장이다.


그것은 어떤者[자]가 屍體[시체]를 도적해다가 감추어 버린 것이라고 한다."

  • ‘도적(盜賊)해다가’는 몰래 훔쳐 내어 간다는 뜻이다.
  • ‘~라고 한다’는 간접 인용을 통해 적대자들(도난설 지지자들)의 변명을 제시한다.
  • 무덤이 빈 이유에 대해, 누군가 시신을 몰래 훔쳐서 숨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도난설의 핵심 논리를 설명한다.


그러면 누가 감추었을까? 빌라도나 猶太祭司長[유태제사장]들인가?

  • ’빌라도’는 로마 총독이며, ‘유태제사장’은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선 유대교 지도자들이다.
  • ’누가 감추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첫 번째 용의자 그룹으로 예수의 적대자들을 지목하는 의문문을 사용한다.
  • 논리적 소거법의 첫 단계로, 시신을 훔쳐 갈 만한 동기가 있는 자들 중 권력을 쥔 ‘적대자들’을 심문의 대상에 올린다.


그네들은 예수의 屍體[시체]가 꼭 두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기를 바라서 親[친]히 무덤門[문]을 封印[봉인]하고 兵丁[병정]을 보내며 守番[수번]시킨 者[자]들이니 自己[자기]네 便[편]에서 감출리는 없을 것이며 設似[설사] 감추었었다 하더라도 弟子[제자]들이 復活[부활]를 宣傳[선전]할 때에는 여기 이렇게 그의 屍體[시체]가 있는데 너희가 그런 虛妄[허망]한 말을 하는가? 하고 屍體[시체]를 證據物[증거물]로 삼아 弟子[제자]들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 ‘봉인(封印)’은 함부로 열지 못하게 막는 것이며, ‘수번(守番)’은 보초를 서며 지키는 것이다. ‘허망(虛妄)한’은 거짓되고 망령됨을 뜻한다.
  • ‘~들이니 ~없을 것이며(원인과 결과)’로 첫 번째 모순을 찌르고, ‘설사 ~하더라도 ~막았을 것이다(가정과 반사실적 추론)’로 두 번째 모순을 찔러 적대자들의 도난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한다.
  • 적대자들은 혹시라도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갈까 봐 군사를 동원해 무덤을 밀봉하고 지킨 자들이므로 스스로 시신을 빼돌렸을 리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들이 숨겼다 치더라도, 제자들이 부활을 전파하고 다닐 때 숨겨둔 시신을 꺼내어 즉각 제자들의 입을 막았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적대자들이 훔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완벽한 논리적 반박이다.


그러면 그 동산 主人[주인]인 아리마대의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동산지기나 弟子[제자]들 中[중]에 한 사람이 그 屍體[시체]를 盜去[도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도거(盜去)’는 훔쳐서 도망간다는 뜻이다.
  • ‘그러면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 도출의 구조를 사용하여, 앞선 용의자가 배제되었으므로 남은 유일한 용의자 그룹을 압축한다.
  • 논리적 소거법의 두 번째 단계로, 적들이 안 훔쳤다면 남은 용의자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추종자들)나 주변 인물일 수밖에 없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만 數日以內[수일이내]에 復活[부활]의 消息[소식]이 넓게 퍼진 것이 事實[사실]인데 이 流言[유언]을 막기 위해서라도 法[법]에 밝은 로마 官憲[관헌]으로서 이를 默過[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유언(流言)’은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이며, ‘묵과(默過)’는 알고도 모른 체하고 넘긴다는 뜻이다.
  • ‘그러나’로 논리를 뒤집고, ‘~사실인데 ~없었을 것이다’라며 역사적 정황(로마 제국의 법적 통치)을 근거로 추종자들의 도난설을 반박하기 시작한다.
  • 단 며칠 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이 온 성안에 퍼졌는데, 제국을 다스리는 엄격한 로마 총독부가 이러한 치안 교란 행위를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짚는다.


우선 第一嫌疑者[제일혐의자]인 요셉부터 調査[조사]했을 것이며 其他[기타] 그럴듯한 사람들은 일일이 調査[조사]해서 그 蜚語根絶[비어근절]할 資料[자료]를 찾았을 것이다.

  • ‘제일혐의자(第一嫌疑者)’는 범인으로 의심받는 첫 번째 인물을 뜻한다. ‘비어근절(蜚語根絶)’은 떠도는 헛소문을 뿌리째 뽑아 없앰을, ‘자료(資料)’는 문맥상 물적 증거(시신)를 의미한다.
  • ‘~했을 것이며 ~찾았을 것이다’라는 강한 추측을 통해 당시 로마 공권력의 철저한 조사 과정을 시뮬레이션한다.
  •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을 비롯하여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을 철저히 잡아다 조사해서라도 반드시 소문을 잠재울 물적 증거(시신)를 찾아냈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自明[자명]의 事實[사실]로 判定[판명]되었기 때문에 그네들은 罔知所指[망지소지]해서 그런말 다시 하지 말라고 威脅[위협]함에 그치고 復活[부활]를 不定[부정]할 何等[하등]의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 ‘자명(自明)’은 증명할 필요 없이 스스로 명백함을, ‘망지소지(罔知所指)’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맨다는 뜻이다. ‘하등(何等)’은 조금도, 아무런의 의미이다.
  • 첫단어 ‘그러나’는 『신학지남』에는 “그러나 弟子[제자]들이며 요셉이 決[결]코 그런일 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로 표기되어 있다.
  • ‘그러나 ~때문에, ~그치고 ~못한 것이다’라는 인과관계를 통해 로마 공권력의 완전한 무능과 실패를 폭로한다.
  • 아무리 조사해도 시신을 찾을 수 없고 무덤이 빈 것 자체가 인간의 개입이 없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기적)이었기 때문에, 로마 권력자들은 당황하여 제자들에게 말조심하라는 협박만 겨우 했을 뿐, 부활을 부정할 단 하나의 객관적 증거(시신)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추종자들이 훔쳤다는 논리도 박살 낸다.)
  • 사도행전 4장 등에서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 위협만 할 뿐 어찌하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법정 변호하듯 명쾌하게 활용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도무지 想像[상상]도 못할 어떤 사람이 감추었다고 생각해 보아도 그런 虛構[허구]를 通[통]하여 落寞[낙막]한 弟子[제자]들에게 어떤 새 生命[생명] 새 希望[희망]이 생기었을까?

  • ‘허구(虛構)’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만든 것을, ‘낙막(落寞)’은 몹시 쓸쓸하고 절망적인 상태를 뜻한다.
  • ‘가령 ~보아도(양보)’ + ‘생기었을까?(수사의문문)’를 통해 세 번째 용의자(제3의 인물) 가능성마저 심리적, 실존적 관점에서 완벽히 기각한다.
  • 백번 양보해서 아무도 모르는 제3자가 시신을 훔쳐 숨겼다 치더라도, 십자가 처형 이후 완전히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이 단순히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기극(허구)을 진실로 믿고 목숨을 던질 만한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얻을 수는 절대 없다는 심리적 반박이다.


또 實地[실지]로 復活[부활]한 그리스도의 聲咳[성해]에 接[접]한 수백의 간증은 무엇으로 說明[설명]할까?"

  • ‘실지(實地)’는 실제를 뜻하며, ‘성해(聲咳)’는 목소리와 기침 소리, 즉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격적 실체를 의미한다.
  • ‘또 ~은 무엇으로 설명할까?’라며 추가적인 논거(목격자들의 간증)를 덧붙여 도난설의 숨통을 끊는다.
  • 게다가 단순히 무덤만 빈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예수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만난 수백 명의 생생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시체가 도난당했다는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設[설]은 全[전]혀 歷史的[역사적] 根據[근거]를 無視[무시]한 臆說[억설]임을 避[피]치 못할 것이다.

  • ‘억설(臆說)’은 아무런 근거 없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주장을 뜻한다.
  • ‘그러므로 ~임을 피치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단락 전체의 논증을 종결짓는다.
  • 결론적으로 도난설은 역사적 정황이나 목격자들의 심리적 변화 등 모든 객관적 근거를 무시한 채, 기적을 부인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터무니없는 주장에 불과함을 확언한다.


3) 환상설ㆍ와전설 비판


[3] 그러면 復活[부활]한 그리스도를 目睹[목도]했노라는 간증은 果然[과연]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일까?

  • ‘목도(目睹)’는 눈으로 직접 봄을, ‘간증(干證/간증)’은 자신의 경험적 사실을 증언함을 뜻한다. 
  • 숫자 ‘[3]’과 함께 수사의문문 형식을 사용하여,기절설과 도난설을 넘어선 세 번째 반대 학설로 화제를 자연스럽게 전환한다.
  • 무덤이 빈 것까지는 사실이라 쳐도,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증언하는 그 기록들 역시 진짜 객관적인 사실일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近代[근대] 心理學[심리학]의 發達[발달]을 따라 이것을 한 主觀[주관]의 投影[투영]으로 說明[설명]하려는 者[자]가 많다.

  • ‘주관의 투영(主觀의 投影)’은 내면의 간절한 생각이나 감정이 마치 바깥에 실재하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는 심리 현상을 뜻한다.
  • ‘~발달을 따라 ~하려는 자가 많다’로 근대 학문의 시대적 흐름과 학자들의 경향성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 19세기 근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제자들의 부활 목격을 실제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심리 상태가 투사된 착각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학자들이 많음을 소개한다.


卽[즉]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던 까닭에 그리스도의 形狀[형상]이 눈에 선해서 보는 것 같이 느껴진 것이요, 정말 그리스도가 客觀的[객관적]으로 存在[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 ‘사모(思慕)’는 애틋하게 그리워함을, ‘객관적(客觀的)’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실재함을 뜻한다.
  • ‘즉 ~까닭에 ~느껴진 것이요,~아니었다는 말이다’라며 앞 문장의 ‘주관의 투영’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
  • 예수를 너무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 나머지 심리적 착각을 일으켜 예수가 눈앞에 아른거린 것일 뿐, 실제로 부활한 예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학설의 뼈대를 설명한다.


「幻想[환상]」(Hallucination)을 본 것이었다고 說明[설명]한다.

  • ‘환상(Hallucination)’은 헛것이 보이는 시각적 환각 현상이다.
  • 핵심 용어인 ‘환상’을 겹낫표(「」)와 영문으로 병기하여 학술적 정의를 명확히 한다.
  • 이 세 번째 학설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환각, 즉 ‘환상설’임을 명시한다.


그러나 弟子[제자]들은 그때 決[결]코 그렇게 無批判的[무비판적]으로 復活[부활]을 承認[승인]할만큼 淺薄[천박]한 心理的[심리적] 狀態[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었다.

  • ‘무비판적(無批判的)’은 따져보거나 의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천박(淺薄)한’은 생각이나 학식이 얕음을 뜻한다.
  • ‘그러나’로 논리를 뒤집고,’결코 ~않았었다’라는 강한 부정을 통해 환상설의 전제(제자들이 맹목적이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였다는 가정)를 정면으로 부순다.
  • 당시 제자들은 누가 부활했다고 해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덮어놓고 믿어버릴 만큼 심리적으로 가볍거나 맹목적인 상태가 절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에게는 그 反對[반대]의 態度[태도]가 더욱 많았다.

  • 짧고 단호한 평서문으로 앞선 문장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 『신학지남』에는 “그 反對[반대]의” 대신에 “예수의 復活[부활]을 믿으려는 것보담도 믿지 않으려는”으로 표기되어 있다. 
  • 오히려 제자들은 쉽게 맹신하기는커녕, 안 믿으려고 의심하고 경계하는 회의적인 태도가 훨씬 더 강했다는 사실을 짚어낸다.


그러므로 女人[여인]들이 그 消息[소식]을 傳[전]할 때 女人[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 하여 믿지 않았다」(눅 24:11)고 했으며 도마같은 이는 손으로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기 前[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冷情[냉정]한 精神的[정신적] 狀態[상태]에 있었던 것이 事實[사실]이니 이런 이들에게 幻想[환상]이란 것이 보일 수 없으나 보인데야 幻想[환상]을 보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意識的[의식적]으로 批判[비판]하는 者[자] 自身[자신]이 그 弟子[제자]들이었으매 妄信[망신]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 分明[분명]한 것이다.

  • ‘허탄(虛誕)한’은 거짓되고 미덥지 않음을, ‘냉정(冷情/冷靜)한’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함을 뜻한다. ‘망신(妄信)’은 이성적 판단 없이 맹목적으로 믿음을 의미한다.
  • 『신학지남』, 『낙수』에는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기” 대신에 “만지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해보기”,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기” 대신에 “보고 입으로는 말해보기”로 표기되어 있다.
  • 성경 구절(눅 24:11)과 도마의 일화를 병렬적으로 나열하여 긴 호흡으로 원인과 결과를 촘촘히 엮는다. ‘~이었으매 ~분명한 것이다’로 논증을 완성한다.
  • 여인들의 증언을 헛소리로 치부했던 사도들이나,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도마처럼 차갑고 이성적인 제자들에게는 심리적 환상이 일어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설령 헛것이 보였다 해도 제자들 스스로 “이게 혹시 환상이 아닐까?”라며 의심하고 검증했을 것이므로, 맹신에 빠져 환상을 부활로 착각했다는 주장은 심리학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 성경 텍스트 자체에 기록된 제자들의 ‘회의주의(Skepticism)’를 역이용하여, 자유주의 학자들의 심리학적 해석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고도의 변증학적 논리이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弟子[제자]들이 예수의 죽은 후에 聖經[성경]을 仔細[자세]히 상고하며 舊約[구약]의 메시아 豫言[예언]과 저들이 메시아인줄 믿던 예수와를 對照[대조]하는 中[중] 그가 메시아실진대 「반드시 살아야 할 것이다」는 말이 아무도 모르게 퍼지게 되었으며 그 말이 또 보태어져서 「그가 산 것을 보았다」하는 결론을 얻었을 때 어떤 곳에서 「그가 살았다」하는 所聞[소문]까지 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 ‘상고(詳考)하며’는 자세히 생각하고 살펴봄을, ‘대조(對照)’는 맞대어 비교함을 뜻한다. ‘소문(所聞)’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뜬소문이다.
  •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라고 한다’로, 환상설과 궤를 같이하는 또 다른 자유주의 학설을 소개한다. 겹낫표를 이용해 소문이 진화하는 과정(‘살아야 할 것이다’ → ‘산 것을 보았다’ → ‘살았다’)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반드시 살아야 할 것이다」는 말이 아무도 모르게 퍼지게 되었으며 그 말이 또 보태어져서 「그가 산 것을 보았다」하는” 대신에 “「바드시 살아야 할 것이다」하는”으로 표기되어 있다.
  • 『신학지남』에는 “얻었을 때 어떤 곳에서” 대신에 “얻었다. 그러는 中[중] 어떤데서”, 『낙수』에는 “얻었을때 어떤데서”로 표기되어 있다.
  • 『신학지남』에는 “「그가 살았다」하는” 대신에 “「그가 살았다」하는 말이 아모도 모르게 떠돌게 되였을 것이며 그 말이 또 보태여저서 「그가 산 것을 보았다」는”, 『낙수』에는 ““「그가 살았다」하는 말이 아모도 모르게 퍼지게 되였을 것이며 그 말이 또 보태여저서 「그가 산 것을 보았다」는”으로 표기되어 있다.
  •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所聞[소문]까지” 대신에 “말이 아무도 모르게 퍼지게 되었으며 그 말이 또 보태어져서 「그가 산 것을 보았다」는 所聞[소문]까지”로 표기되어 있다.
  • 제자들이 구약성경을 연구하다가 “메시아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는 교리적 소망을 갖게 되었고, 이 바람이 입에서 입을 거치며 점차 부풀려져 종국에는 “부활을 보았다”, “부활했다”는 거짓 소문으로 조작되었다는 또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서술한다.


卽[즉] 流言[유언]이 不知中[부지중]에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처럼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 ‘유언(流言)’은 근거 없는 뜬소문을, ‘부지중(不知中)’은 알지 못하는 사이를 뜻한다.
  • ‘즉 ~라는 말이다’로 앞의 긴 문장을 명쾌하게 요약한다.
  • 신학적 열망에서 비롯된 뜬소문이 시간이 흐르며 덧살이 붙어 진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굳어져 버렸다는 이른바 ‘와전설(Myth Theory, 신화설)’의 핵심을 정리한다.


이런 「訛傳[와전]」은 카임(Keim)이 指摘[지적]한 바와 같이 적어도 數年[수년] 或[혹] 數十年[수십년]의 時間[시간]을 지낸 다음에라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요 이틀 동안에 그렇게 없는 事實[사실]이 있는 것 같이 訛傳[와전]되어서 온 天下[천하]에 퍼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 ‘와전(訛傳)’은 사실과 다르게 잘못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카임(Keim)’은 19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역사가이다.
  • 유명 학자의 권위를 빌려(‘~지적한 바와 같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요,~일은 없는 것이다’라는 시간의 물리적 대조(수십 년 vs 이틀)를 통해 와전설의 모순을 통렬히 찔러낸다.
  • 근거 없는 소문이 신화적 사실로 완벽히 둔갑하려면 최소 수년에서 수십 년 이상의 긴 세월이 필요한데, 예수가 죽고 단 이틀 만에 소문이 부풀려져 온 예루살렘과 천하에 퍼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회학적 법칙상 아예 불가능하다는 날카로운 반박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三日[삼일]에 復活[부활]하셨지만은 時間[시간]으로 따진다면 不過[불과] 滿[만] 1일반 밖에 안되는데 그 동안에 그렇게 複雜[복잡]한 精神的[정신적] 社會的[사회적] 階段[계단]을 밟아 主觀[주관]이 客觀的[객관적] 事實[사실]처럼 되었으리라는 것은 臆說中臆說[억설중억설]이다.

  • ‘만(滿) 1일 반’은 꽉 찬 하루 반나절(약 36시간)을 뜻한다. ‘억설중억설(臆說中臆說)’은 수많은 억지 주장 중에서도 최악의 억지 주장이라는 강한 수사적 표현이다.
  • ‘~안 되는데 ~되었으리라는 것은 ~이다’라며 물리적 시간의 절대적 짧음(36시간)과 심리적/사회적 과정의 복잡성(신화 형성)을 대조하여 학설의 허구성을 극대화한다.
  • 예수가 금요일 늦은 오후에 죽어 주일 이른 아침에 부활했으므로 이를 3일 만의 부활이라 부르긴 하나, 실제 물리적 시간은 만 36시간에 불과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자들의 주관적 소망이 사회적인 객관적 사실로 진화하여 집단적 믿음이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일축한다.


더구나 弟子[제자]들이 聖經[성경]으로 復活[부활]을 證據[증거]하게 된 것은 復活[부활]이란 事實[사실]을 본 다음에 그 事實[사실]의 意義[의의]를 解釋[해석]하기 爲[위]하여 必然的[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요, 決[결]코 그 反對반대]는 아니다.

  • ‘필연적(必然的)’은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 ‘더구나’로 추가 논거를 제시하고,’A한 것은 B요,결코 C는 아니다’라는 구조를 통해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바로잡는다.
  • 제자들이 성경(구약)을 연구하다가 그 결론으로 부활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순서상 ‘부활’이라는 압도적인 기적 현실을 먼저 목격한 후에 그 엄청난 사실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성경을 상고하게 된 것임을 밝히며 인과관계와 선후관계를 바르게 정립한다.


그러므로 이 說[설]을 主唱[주창]한 스트라우스(Strauss) 自身[자신]도 얼마 後[후]에는 그 誤診[오진]임을 自白[자백]하고 말았다.

  • ‘주창(主唱)’은 주의나 사상을 앞장서서 주장함을 뜻한다.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는 19세기 독일의 신학자로 《예수의 생애》를 써서 복음서의 기적을 신화로 해석한 대표적 인물이다. ‘오진(誤診)’은 잘못된 진단을 뜻한다.
  • ‘그러므로’로 최종 결론을 내리며, 적장(주창자)의 패배(자백)를 직접 언급하여 단락 전체의 논증을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한다.
  • 이러한 역사적, 시간적, 논리적 한계들 때문에 신화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기독교를 흔들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 스트라우스조차도, 훗날 자신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확인 사살을 하며 논파를 끝맺는다.


2. 적극적 증거 (직접적 입증)

이 부분은 기독교 역사의 가장 강력한 증거인 ‘제자들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제자들이 겪은 처절한 절망과 공포,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으려 했던 냉소적인 심리를 성경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런 다음, 이토록 무기력했던 자들이 불과 수십 일 만에 목숨을 걸고 천하를 뒤집는 순교자로 돌변한 역사적 사실은 ‘환상’이나 ‘거짓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오직 ‘부활한 예수라는 객관적 실재와의 만남(생명)’만이 이 위대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임을 확증하며 논증을 절정으로 이끌고 있다.


以上[이상]은 消極的[소극적] 意味[의미]에서 復活[부활]이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임을 提示[제시]하였거니와 이제 積極的[적극적] 方面[방면]으로 그 事實[사실]을 考察[고찰]하기로 한다.

  • ‘소극적(消極的)’은 남의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내 주장을 세우는 방식을, ‘적극적(積極的)’은 직접적인 증거를 내세워 증명하는 방식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積極的[적극적] 方面[방면]으로” 대신에 “積極的[적극적]으로”로 표기되어 있다.
  • ‘~하였거니와 이제 ~하기로 한다’라는 전환의 구문을 사용하여, 앞선 단락들과 앞으로 전개될 단락들 사이의 논리적 뼈대를 명확히 세워준다.
  • 지금까지는 부활을 부정하는 학설들의 모순을 깨뜨려(소극적)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했다면, 이제부터는 부활이 일어났다는 실제적이고 긍정적인 증거(적극적)를 직접 살펴보겠다는 선언이다.


쌀리스베리 公[공]은 말하기를 「모든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 가운데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처럼 確實無疑[확실무의]한 것은 없다. 왜 그런고 하니 事實[사실]이 없는 그리스도敎[교]의 存在[존재]를 說明[설명]할 수가 到底[도저]히 없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事實[사실] 그리스도敎[교] 自體[자체]가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을 가장 크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 ‘쌀리스베리 공(Lord Salisbury)’은 영국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이다. ‘확실무의(確實無疑)’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아주 확실함을 뜻한다.
  • 권위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고, ‘~까닭이다’, ‘사실 ~인 것이다’라며 거시적인 역사적 현상(기독교의 존재)을 부활의 첫 번째 결과물로 제시한다.
  • 부활이라는 실제 사건(원인)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를 뒤덮은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결과)가 탄생하고 존재할 수 없으므로, 기독교의 존재 그 자체가 부활이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실임을 소리쳐 증명하고 있다는 뜻이다.


1)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


[1] 最後[최후]의 晚餐[만찬]을 나눌 때 까지도 그릇된 메시아觀[관]을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될까 하는 世俗的[세속적] 榮華[영화]를 바라던 弟子[제자]들이매 그 期待[기대]의 메시아가 十字架上[십자가상]의 이슬로 사라진 때 그 心情[심정]이 어떠하였을 것은 不言可想[불언가상]이다.

  • ‘세속적 영화(世俗的 榮華)’는 세상에서의 정치적 권력과 부귀를, ‘불언가상(不言可想)’은 말하지 않아도 능히 상상할 수 있음을 뜻한다.
  • 기호 ‘[1]’로 첫 번째 적극적 논거(제자들의 변화)의 시작을 알린다. 기대(세속적 영화)와 현실(십자가의 죽음)을 극적으로 대조하여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논리적으로 추론(’~어떠하였을 것은 ~이다’)해 낸다.
  •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가 로마를 뒤엎고 정치적 왕이 될 것이라 착각했는데, 그 예수가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 그들이 느꼈을 절망과 충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의 救贖者[구속자] 되기를 바랐더니」하는 엠마오 道中[도중]의 두 弟子[제자]의 會話[회화] 中[중]에는 「萬事休矣[만사휴의]」라는 落望[낙망]의 氣分[기분]이 품겨있다.

  • ‘구속자(救贖者)’는 억압에서 구해내는 자를, ‘만사휴의(萬事休矣)’는 모든 일이 끝장나서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낙망(落望)’은 희망을 잃고 맥이 빠짐을 뜻한다.
  •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대화를 인용하여 앞선 심리적 추론(불언가상)에 대한 성경적 물증을 제시한다.
  •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줄 알았는데(다 틀렸다)”라는 제자들의 한탄 속에는 이제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는 완전한 패배주의가 서려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恐怖[공포] 不安[불안] 落望[낙망] 怨恨[원한] 等[등]의 散亂[산란]한 心緖[심서]에 싸여 아무러한 先後策[후속책]도 없이 하루 이틀 지냈을 것이다.

  • ‘산란(散亂)한 심서(心緖)’는 어지럽고 뒤죽박죽된 마음속의 생각을, ‘선후책(先後策/원문은 후속책으로 표기됨)’은 일이 벌어진 뒤에 수습할 계획이나 대책을 의미한다.
  • 부정적인 감정 어휘(공포, 불안, 낙망, 원한)를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예수 죽음 직후 제자들이 겪은 극도의 혼란을 시각화한다.
  •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져,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없이 그저 숨어서 멍하니 하루 이틀을 보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분석이다.


그들의 눈에 비치인 죽음의 그림자는 너무나 深刻[심각]했었기 때문에 죽음 以外[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餘裕[여유]가 없었다.

  • ‘~너무나 심각했었기 때문에 ~없었다’라는 인과 구문을 통해, 그들이 부활이라는 초자연적 기적을 스스로 상상해 낼 정신적 여력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남긴 충격과 공포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죽음’뿐이었지 ‘부활’ 같은 희망적인 단어를 떠올릴 마음의 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天使[천사]의 하는 말을 들은 後[후]에도 오히려 예수의 屍體[시체] 없어진 것만 생각하고 울고 있었으며 마리아의 復活[부활] 消息[소식]을 듣고 무덤에 와 實地[실지]로 무덤 빈 것을 본 베드로도 한 奇異[기이]한 現狀[현상]이라고 確信[확신]없이 돌아갔으며 十一使徒中[십일사도중] 大部分[대부분]은 「女子[여자]의 허탄한 소리」라고 믿지 않으려 했으며 도마는 손으로 만져 보기 前[전]에는 믿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 ‘기이(奇異)한 현상’은 기묘하고 이상한 일을, ‘허탄(虛誕)한 소리’는 실속 없고 거짓된 헛소리를 뜻한다.
  • ‘~으며, ~으며, ~으며, ~말한 것이다’라는 병렬 구조로 마리아, 베드로, 열한 사도, 도마의 반응을 긴 호흡으로 엮어 낸다. 이는 예수를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자들이 예외 없이 얼마나 부활에 무지하고 회의적이었는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 천사를 만난 마리아조차 시체가 없어졌다고만 생각했고, 빈 무덤을 본 베드로는 고개만 갸우뚱했으며, 남은 사도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헛소리로 취급했고, 도마는 물리적 증거를 요구하는 등, 아무도 부활을 먼저 기대하거나 쉽게 믿은 사람이 없었음을 성경적 팩트로 증명한다.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復活[부활]를 期待[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 매우 짧고 단호한 평서문으로 앞선 긴 문장의 내용을 하나의 명제로 요약하여 못을 박는다.
  •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미리 상상하거나 고대하지 않았음을 확언한다. 이는 곧 그들이 부활의 ‘환상’을 보거나 ‘신화’를 지어낼 심리적 동기가 원천적으로 제로(0)였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변증이다.


그러면 이렇듯 落望[낙망] 無氣力[무기력]했던 弟子[제자]들이 不過[불과] 數十一[수십일] 以內[이내]에 天下[천하]를 단숨에 征服[정복]하려는 衝天[충천]의 意氣[의기]를 가지고 挑戰[도전]하게 된 것은 그 原因[원인]을 무엇으로 說明[설명]할까?

  • ‘무기력(無氣力)’은 어떠한 일을 감당할 기운이나 힘이 없음을, ‘충천(衝天)의 의기(意氣)’는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사기와 굳센 기상을 뜻한다.
  • ‘무엇으로 설명할까?’라는 날카로운 수사의문문을 사용한다. ‘낙망/무기력(Before)’과 ‘충천의 의기/도전(After)’을 ‘불과 수십 일(오순절 사건을 암시)’이라는 짧은 시간의 간격 속에 밀어 넣어 그 극단적인 변화의 간극을 부각한다.
  • 이토록 겁에 질려 덜덜 떨며 모든 것을 포기했던 무기력한 자들이, 불과 한 달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갑자기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한 엄청난 용기와 기백으로 나타난 이 역사적 미스터리를 도대체 어떤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렇듯이 믿지 않으려는 冷情[냉정]한 態度[태도]로 復活[부활] 消息[소식]을 대하던 弟子[제자]들이 不過[불과] 數十日內[수십일내]에 全[전] 生命[생명]을 걸어놓고 復活[부활]한 그리스도를 證據[증거]하며 그렇게 卑怯[비겁]하던 베드로가 죽음을 눈 앞에 보면서도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0:20)고 膽大[담대]히 외치게 된 그 原因[원인]을 무엇으로 說明[설명]할까?"

  • 원문의 행 40:20은 행 4:20의 오기로 보인다.
  • ‘냉정(冷情)한’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이성적 상태를, ‘비겁(卑怯)한’은 비열하고 겁이 많음을, ‘담대(膽大)히’는 겁이 없고 용감하게라는 뜻이다.
  • 앞 문장과 동일한 패턴(’무엇으로 설명할까?’)을 반복하는 평행 구조를 취하여 질문의 압박감을 극대화한다. 예수를 부인했던 ‘비겁한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목숨을 걸고 사자후를 토하는 ‘담대한 베드로’로 변한 구체적 일화를 대비시킨다.
  • 부활을 믿기는커녕 비웃던 제자들이 자기 목숨을 던져가며 부활을 전파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를 저주하며 도망쳤던 베드로가 최고 권력자들의 사형 위협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리를 외치게 된 이 혁명적인 인간 개조를 도대체 무엇으로 해석할 것이냐는 추궁이다.


꿈같은 幻想[환상]이 그렇게도 偉大[위대]한 新[신] 生命[생명]을 創造[창조]할 수 있을까? 人爲[인위]의 虛構虛說[허구허설]이 사람의 生命[생명]을 이렇게도 힘있게 할 수 있을까?

  • ‘허구허설(虛構虛說)’은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꾸며낸 헛소문이나 학설을 뜻한다.
  • 다시 두 번의 수사의문문(’~창조할 수 있을까?’, ‘~힘있게 할 수 있을까?’)을 연달아 던져 자유주의 학자들의 환상설과 소문설(도난설)을 완전히 논리적으로 분쇄한다.
  • 인간의 심리적 착각(환상)이나 누군가 꾸며낸 사기극(허구)이 한 인간의 내면을 이토록 위대하게 재창조하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느냐는 뜻으로,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단언이다.


生命[생명]은 生命[생명]에서만 誕生[탄생]되는 것이며 確信[확신]은 實在[실재]에 부닥칠 때에만 생기는 것이다."

  • ‘실재(實在)’는 관념이 아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에서만 ~되는 것이며’, ‘~때에만 생기는 것이다’라는 절대적인 명제(진리) 형식을 사용하여, 질문을 끝내고 확고한 결론을 도출한다.
  • 가짜(환상, 거짓말)는 진짜 생명을 낳을 수 없다. 위대한 생명력은 오직 진짜 살아있는 생명으로부터만 태어나며, 사람이 목숨을 바칠 정도의 굳은 확신은 환상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실체’와 정면으로 충돌(부닥칠)했을 때에만 생겨난다는 영적, 철학적 통찰이다.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事實[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事實[사실]을 證據[증거]하는 者[자]에게 새 確信[확신] 새 힘 새 勇氣[용기]가 생긴 것이요, 그 밖에는 아무 說明[설명]도 求[구]할 餘地[여지]가 없는 것이다(벧전 1:3).

  • ‘여지(餘地)’는 남은 공간이나 가능성을 뜻한다.
  • ‘~때문에 ~생긴 것이요, 그 밖에는 ~없다’라며 제자들의 변화에 대한 유일무이한 해답을 선포한다.
  • 죽음을 이기고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객관적인 ‘사실(실재)’이었고 제자들이 그 사실과 직접 부딪혔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확신과 용기가 솟아난 것이다. 제자들의 변화는 오직 ‘예수의 실제 부활’이라는 단 한 가지 원인 외에는 다른 그 어떤 심리학적, 철학적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최종 결론이다.


그러므로 스트라우스는 이런 學說[학설] 저런 學說[학설]로 좀 新奇[신기]한 說明[설명]은 다 試驗[시험]해 보다가 結局[결국]은 다 失敗[실패]하고 「弟子[제자]들의 復活[부활]에 對[대]한 믿음의 原因[원인]은 예수의 復活[부활]을 外的[외적] 奇蹟的[기적적] 事件[사건]이라고 記述[기술]한 福音記者[복음기자]들의 말을 그대로 是認[시인]하는 때에만 滿足[만족]히 解釋[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 ‘신기(新奇)한’은 새롭고 기이함을, ‘시인(是認)’은 옳다고 인정함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다 試驗[시험]해 보다가” 대신에 “試[시]하려고 애쓰다가”로 표기되어 있다.
  •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해 적극적 논증의 대미를 장식한다. 부활을 집요하게 부정했던 적장(스트라우스)의 고백을 인용하여 변증의 승리를 확정 짓는다.
  • 자유주의 신학자 스트라우스조차도 제자들의 기적 같은 삶의 변화를 환상, 소문 등 온갖 기이한 이론으로 설명해보려다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부활은 외부에서 실제로 일어난 기적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성경(복음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제자들이 보여준 믿음과 삶의 변화를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항복(시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2)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 및 학자들의 인정

이 부분은 기독교 역사 기록의 신뢰성을 입증하여 부활 변증의 쐐기를 박는 부분이다.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마태, 마가, 요한, 누가)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자들이며 과학적 소양까지 갖추었음을 들어 성경 기록이 맹신이나 조작이 아님을 증명한다. 특히 바울의 고린도전서 기록이 예수 부활 직후 불과 1~2년 내에 형성된 가장 오래된 증언이며, 수백 명의 생존 목격자를 거느리고 있음을 밝혀 ‘신화설’을 완전히 종식시킨다. 결론적으로 부활은 인간의 철학이나 과학이 함부로 평가(용훼)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기적이자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인간은 그 실재 앞에 겸손히 항복해야 함을 선포하고 있다.


[2] 베드로나 요한이나 其他[기타] 모든 弟子[제자]들은 道德的[도덕적]으로 가장 嚴正[엄정]한 사람들임은 萬人[만인]이 公認[공인]하는 바이다.

  • ‘엄정(嚴正)한’은 잣대가 엄격하고 바르며 거짓이 없음을, ‘공인(公認)’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인정함을 뜻한다.
  • 숫자 ‘[2]’를 붙여 앞 단락의 제자들의 심리적 변화([1])에 이은 두 번째 적극적 논거임을 밝힌다. ‘~임은 만인이 공인하는 바이다’를 통해 반박 불가능한 보편적 전제를 세운다.
  •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증언한 사도들은 도덕적으로 한 점 부끄럼 없이 가장 바르고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은 세상 누구나 인정한다는 뜻이다. (사기꾼이 아니라는 도덕적 변증의 기초를 놓는다.)


마태 마가 요한 等[등]의 福音記事[복음기사]가 直接間接[직접간접]으로 이 使徒[사도]들과 關係[관계]되는 것이매 그 記事[기사]가 實記[실기]임에 틀림없으며 누가로 말할지라도 그가 科學的[과학적] 素養[소양]있는 醫學者[의학자]로서 모든 材料[재료]를 蒐集[수집]하여 「자세히 根源[근원]을 미루어 살핌으로」(눅 1:3) 그 福音[복음]을 著述[저술]한 것이니 그 歷史的[역사적] 眞實性[진실성]을 疑心[의심]할 餘地[여지]가 없다.

  • ‘실기(實記)’는 사실 그대로 적은 기록을, ‘소양(素養)’은 닦아놓은 학식이나 지식을, ‘수집(蒐集)’은 자료를 찾아 모음을 뜻한다.
  • 마태ㆍ마가ㆍ요한과 누가를 나누어 설명한다. ‘~틀림없으며’, ‘~여지가 없다’라는 강한 확신의 표현을 연달아 사용하여 복음서의 완벽한 신뢰성을 주장한다.
  • 복음서들은 앞서 말한 도덕적으로 엄정한 사도들이 직접 쓰거나 관여했으므로 100% 진실한 기록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비과학적인 맹신자가 아니라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의사로서 모든 팩트를 철저히 조사하고 수집하여 책을 썼으므로, 성경 기록의 역사성은 한 치도 의심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特[특]히 바울이 고린도前書[전서] 15장 3절에 말한 復活記錄[부활기록]은 하르낙(Harnak)의 年代表[연대표]에 依[의]한다면 主後[주후] 53年[년]에 쓴 것으로 最古[최고]의 復活記錄[부활기록]이라고 꼬데[Codet]는 말한다.

  • ‘최고(最古)’는 가장 오래되었음을 뜻한다.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독일의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이며, ‘꼬데(Frédéric Louis Godet)’는 스위스의 저명한 보수 신학자이다.
  • 외부의 유명 학자들(특히 자유주의 학자인 하르낙까지 포함)의 권위를 인용하여 바울 서신의 기록 연대를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남긴 부활 증언은 학자들의 객관적인 연대 측정으로 보아 기원후 53년경에 쓰인,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부활의 물적 증거라는 뜻이다.


이 記錄[기록]은 바울이 直接[직접] 다른 使徒[사도]들에게 들은 것일 터이니 그가 회개한 後[후] 一[일], 二年[이년] 內[내]에 된 일일 것이다.

  • ‘회개(悔改)’는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옴(바울의 다메섹 회심)을 의미한다.
  • ‘~일 터이니 ~일일 것이다’라는 합리적인 추론의 형식을 취하여 시간의 간격을 극한으로 좁혀낸다.
  • 바울이 쓴 기록은 그가 회심한 직후 베드로 등 원래 사도들을 만나 직접 전해 들은 것이므로, 부활에 관한 핵심 증언은 예수가 죽은 지 불과 1~2년 안에 이미 완벽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팩트의 추적이다. (신화가 만들어질 수 없는 짧은 시간임을 재확인한다.)


바울이 이 記錄[기록]을 고린도에 보낼 때에 復活[부활]한 그리스도를 目睹[목도]한 五百名[오백명] 中[중] 태반이나 아직도 살아 있다고 했으니 그러면 自己[자기] 以外[이외]에 적어도 二百五十餘名[이백오십여명]의 現存[현존]한 目擊者[목격자]를 列擧[열거]하면서 이 復活[부활]을 證據[증거]하는 바울이 어찌 實相[실상] 없는 허튼 소리를 할 수 있었으랴?

  • ‘태반(太半)’은 절반 이상(대부분)을, ‘현존(現存)’은 현재 살아 있음을, ‘열거(列擧)’는 죽 늘어놓음을 뜻한다. ‘실상(實相)’은 실제의 참된 모습이다.
  • 숫자의 계산(500명의 절반 이상 = 적어도 250명)을 통해 객관성을 부여하고, ‘~할 수 있었으랴?’라는 수사의문문으로 조작의 불가능성을 통쾌하게 찌른다.
  •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예수를 직접 본 500명 중 적어도 250명 이상이 버젓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는데, 만약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이 생존자들이 당장 거짓말을 폭로했을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교차 검증의 증인들을 내세우며 글을 쓴 바울이 어찌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가장 강력한 법정적, 역사적 변증이다.


萬一[만일]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事實[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世上[세상]이 낳은 最大[최대]의 聖者[성자]들을 詐欺者[사기자]로 認[인]하며 萬世[만세]에 宣[선]한 最大[최대]의 生命運動[생명운동]을 虛構[허구]에 돌림이 될 것이니 惡魔[악마]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敢[감]히 이런 暴論邪說[폭론사설]을 勘當[감당]하랴.

  • ‘만세(萬世)’는 아주 오랜 세월(영원)을, ‘허구(虛構)’는 지어낸 거짓을 뜻한다. ‘폭론사설(暴論邪說)’은 사납고 악하며 이치에 어긋나는 주장을, ‘감당(勘當)’은 견디어 냄을 뜻한다.
  • ‘만일 ~한다면 ~돌림이 될 것이니 ~누가 감당하랴’라는 극단적인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사용하여 반대 주장의 결론이 얼마나 끔찍하고 말이 안 되는지를 폭로한다.
  •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덕적 성자들(사도들)이 사실은 끔찍한 사기꾼이었다는 뜻이 되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한 기독교 생명 운동 전체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니 마귀가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그런 패륜적인 주장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며 자유주의 신학의 맹점을 매섭게 질타한다.


그러므로 젤러(Zelle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을 否認[부인]하려는 것은 歷史的[역사적] 根據[근거]에서가 아니라 哲學的[철학적] 學說[학설]에 根據[근거]한 것이라고 言明[언명]하였다.

  • ‘젤러(Eduard Zeller)’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언명(言明)’은 말로 분명하게 밝힘을 뜻한다.
  • ‘그러므로’로 결론을 이끌며, 학자의 말을 인용해 ‘A가 아니라 B에 근거한 것’이라는 명확한 구도로 적들의 정체를 규정한다.
  • 역사적 증거는 차고 넘치며 압도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활을 부정하는 진짜 이유는 ‘증거(역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적 자체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신들의 닫힌 ‘철학적 편견(자연주의 세계관)’ 때문이라는 뼈아픈 팩트 폭력이다.


勿論[물론] 自然人[자연인]의 入場[입장]에서 생각하는 때 復活[부활]은 不可解[불가해]의 것이며 經驗[경험]을 超越[초월]한 것이니 自然法則[자연법칙]을 重視[중시]하는 哲學者[철학자] 科學者[과학자]로서는 이에 容喙[용훼]할 資格[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 ‘자연인(自然人)’은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을 뜻한다. ‘불가해(不可解)’는 이해할 수 없음을, ‘초월(超越)’은 한계를 뛰어넘음을, ‘용훼(容喙)’는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여 말참견(부리를 들이밀다)하는 것을 뜻한다.
  • ‘물론’으로 반대파의 입장을 일정 부분 수용하는 듯하다가,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라는 짧고 강력한 선언으로 학문(이성)의 한계를 단호하게 긋는다.
  • 성령을 받지 못한 일반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부활은 경험을 초월한 이해 불가 영역이 맞다. 따라서 자연법칙만 따지는 과학자나 철학자는 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일’에 감히 입을 대거나 평가할 자격조차 없다고 선을 긋는다.


「예수의 復活[부활]과 함께 무덤의 屍體[시체]가 없어진 것은 敵[적]이나 弟子[제자]가 다 함께 認定[인정]하는 바인데 이에 對[대]한 自然法則[자연법칙]으로의 說明[설명]은 全然[전연] 不可能[불가능]하다」고 벨하우젠(Welhausen)도 말하는 것이다.

  •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은 19세기 성경 비평학(문서설)의 기초를 놓은 대표적인 자유주의 구약 학자이다. ‘전연(全然)’은 아주, 전혀라는 뜻이다.
  • 가장 보수적이지 않은 자유주의 비평학자의 입에서 나온 패배주의적 고백을 직접 인용하여 변증의 신뢰도를 최고조로 높인다.
  • 기적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학자인 벨하우젠조차도 “기독교의 편이든 적이든 빈 무덤 사건 자체는 역사적 팩트로 모두 인정하는데, 도대체 이걸 자연의 법칙(과학)으로는 설명할 길이 전혀 없다”며 인간 학문의 완벽한 한계와 실패를 자인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미 序論[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歷史的[역사적]로 보아 움직일 수 없는 儼然[엄연]한 事實[사실]일진대 이 事實[사실]에 對[대]한 哲學的[철학적] 과학적 解釋[해석]이 이 事實[사실] 自體[자체]의 眞實性[진실성]을 左右[좌우]할 수 없는 以上[이상] 우리는 다만 謙遜[겸손]한 마음으로 神[신]의 偉大[위대]하신 奇蹟[기적]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엄연(儼然)한’은 어길 수 없이 명백함을 뜻한다. ‘좌우(左右)’는 이리저리 지배함을 뜻한다.
  • ‘그러면 이미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로 글 전체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룬다. ‘~일진대’, ‘~없는 이상’,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논리적 완결성을 지닌 긴 문장으로 역사적 증명 단락의 장엄한 마침표를 찍는다.
  • 서론의 대전제로 돌아와 최종 결론을 맺는다. 부활은 이처럼 수많은 증거로 가득한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과학이나 철학이 이것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고 해서 일어난 사실 자체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유한한 인간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초자연적 기적 앞에 항복하고 엎드려야 한다는 신앙적, 학문적 선언이다.


[3] 본론 2: 그리스도의 부활체 본질 규명


1. 부활체의 동일성

이 부분은 부활한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뉘어졌던 바로 그 육체와 완전히 동일한 몸임을 논증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제자들이 그저 ‘빈 무덤(공총)’만 보고 부활을 믿은 것도 아니며, 반대로 육체와 상관없는 환영(현현)만 보고 믿은 것도 아님을 밝힌다. 부활 신앙은 무덤 속에 뉘었던 그 실제 육체가 다시 일어났음을 제자들이 확인(동일성 유지)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며, 찰스 하지 박사의 말을 인용해 그 몸에 십자가의 못 자국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事實[사실]이라면 그 復活[부활]한 몸은 大體[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 앞서 논증한 결과(‘사실이라면’)를 조건절로 삼고, 이어지는 의문문(‘어떤 것이었는가?’)을 통해 논의의 주제를 ‘역사성(사실)’에서 ‘존재론(부활체의 본질)’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한다.
  • 부활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그 무덤에서 일어난 몸의 정체와 성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규명해 보겠다는 선언이다.


이것을 생각하기 前[전]에 우선 留意[유의]해야 할 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를 有機的[유기적]으로 關係[관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유의(留意)’는 마음에 새겨 두어 조심함을, ‘유기적(有機的)’은 여러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떼어낼 수 없는 전체를 이룸을 뜻한다.
  • 두 개의 핵심 사건(‘빈 무덤’과 ‘예수 목격’)을 겹낫표(「」)로 묶어 대등하게 세우고,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해야만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 부활체의 성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시체가 사라졌다는 물리적 사실(빈 무덤)과 살아난 예수를 영적으로 만났다는 사실(현현)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되며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 만으로 復活[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다.

  • ‘~만으로 ~믿은 것이 아니다’라는 부분 부정을 통해 맹목적인 믿음을 경계한다.
  • 제자들은 단순히 시체가 없어진 현상 하나만 보고 "부활했다!"고 믿어버릴 만큼 어리석거나 단순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女人[여인]들과 베드로까지 무덤이 빈 것을 보았지마는 復活[부활]을 믿지 않았었다.

  • 구체적인 성경의 인물들(마리아, 베드로 등)을 나열하여 앞 문장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귀납적 논증을 취한다.
  • 실제로 무덤이 비어 있는 물리적 상태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그들은 부활을 깨닫거나 믿지 못했다는 성경의 팩트를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復活[부활] 信仰[신앙]은 事實[사실] 「空塚[공총]」에 基因[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自身[자신]의 顯現[현현]에 基因[기인]된 것이라」고 심프손[S. Simpson]은 말하였다.

  • ‘공총(空塚)’은 빈 무덤을, ‘기인(基因)’은 원인이 되어 일어남을, ‘현현(顯現)’은 눈앞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 심프손의 학술적 견해를 직접 인용(‘A가 아니라 B에 기인된 것이다’)하여 부활 신앙의 진짜 출발점을 명확히 짚어준다.
  • 빈 무덤 자체가 신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며 인격적으로 다가오신 부활한 예수(현현)를 직접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顯現[현현]만을 보고 弟子[제자]들이 復活[부활]을 確信[확신]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 ‘~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라는 자문자답을 통해 논리를 한 번 더 비틀어 균형을 맞춘다.
  •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눈앞에 나타난 예수의 형상(현현) 하나만 달랑 보고 부활을 믿은 것도 아님을 밝힌다. (즉, 빈 무덤과 현현이 반드시 결합해야 함을 논증하기 위한 포석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는 무덤에 누워 있던 그의 몸과는 關係[관계]없는 別個[별개]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별개(別個)’는 서로 연관성이 없이 완전히 다름을 뜻한다.
  • 가정법(’그렇다면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을 사용하여 앞 문장의 논리가 결여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이단적 오류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 만약 무덤 속에 시체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예수의 영혼이나 환영만 나타난 것이라면, 그들이 만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바로 그 예수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별개)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는 논리적 귀결이다.


그들은 變化山上[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再現[재현]을 目睹[목도]하였었으나 그 現像[현상]을 가지고 모세나 엘리야가 復活[부활]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 ‘재현(再現)’은 다시 나타남을, ‘현상(現像)’은 눈앞에 드러나는 형상을 뜻한다.
  • 변화산 사건(마 17장)을 예시로 끌어와 영적 현현과 실제 부활의 차이를 대조한다.
  • 과거 제자들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영적 환영이 나타난 것을 직접 보았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육체가 살아나는 부활을 입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단순히 혼령이 나타난 것을 부활로 착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는 「무덤」 속에 뉘었던 몸이 그 同一性[동일성]을 잃지 않고 「再現[재현]」한 것임을 그들은 確認[확인]하였다.

  • ‘동일성(同一性)’은 성질이 바뀌지 않고 똑같이 유지되는 것을 뜻한다.
  • 겹낫표(「」)로 ‘무덤’과 ‘재현’을 강조하며, 마침내 두 사건(빈 무덤과 현현)을 완전하게 통합하여 결론을 내린다.
  • 제자들이 확신한 예수의 부활체는 뜬구름 같은 영혼이 아니라,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바로 그 육체가 원래의 정체성과 속성(동일성)을 그대로 가진 채 완전히 다시 살아난 실체였음을 분명히 확인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지[C. Hodge] 博士[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復活[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곧 十字架[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同一[동일]하였다는 것은 再論[재론]을 不俟[불사]할 만치 確實[확실]하다.

  • ‘찰스 하지(C. Hodge)’는 19세기 미국 장로교의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재론을 불사(不俟)할’은 두 번 말할(다시 논의할) 필요를 기다리지 않을 만큼 명백하다는 한자어 표현이다.
  • 『신학지남』, 『낙수』에서는 “同一[동일]하였다는” 대신에 “同一體[동일체]였다는”으로 표기되어 있다.
  • 정통 신학자의 권위 있는 발언을 인용하여 단락의 신학적 무게감을 더한다.
  • 부활하신 몸과 십자가에서 고통받다 죽으신 몸이 완벽하게 100% 같은 몸이라는 것은 더 이상 논쟁할 가치조차 없이 명백하고 확실한 진리임을 선언한다.


그의 復活體[부활체]에는 발과 손에 못자국조차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 ‘못 자국’은 십자가 처형의 역사적이고 물리적인 상흔이다.
  • ‘~조차 남아 있었다’라며 가장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증거를 마지막에 배치하여 동일성 논증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끝맺는다.
  • 그 몸이 십자가에서 죽은 몸과 같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예수의 부활한 손과 발에 십자가의 참혹한 못 자국이 영광스러운 흉터로 여전히 새겨져 있었음을 제시한다.
  • 영지주의적 이원론(육은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고, 육체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body)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정통 신학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다.


2. 변화성(영화) 규명

이 부분은 완벽한 동일성을 유지한 예수의 몸이, 동시에 과거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어떻게 놀랍게 ‘변화’되었는지를 분석하는 부분이다. 부활체는 뼈와 살을 가진 물질적 육체이면서도(음식을 먹음),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돌연히 나타나고 영적인 맹목성에 갇힌 인간의 눈으로는 즉시 알아볼 수 없는 ‘영화롭고 신령하게 변화된 몸(Glorified Body)’임을 성경의 세 가지 근거를 종합하여 명쾌하게 도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同時[동시]에 또한 相當[상당]히 變化[변화]되었던 것도 事實[사실]이다.

  • ‘상당(相當)히’는 꽤 수준이 높거나 정도가 심하게를 뜻한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라는 접속사를 통해, 앞 단락의 주제인 ‘동일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필적하는 새로운 속성인 ‘변화성’을 제시하는 모순적 통합의 문장이다.
  • 부활한 몸이 예전의 몸과 똑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차원으로 크게 변화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선언이다.


① 弟子[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를 園丁[원정]인줄 알았었으며(요 20:15) 엠마오 途中[도중]에 두 弟子[제자]는 그를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한 巡禮者[순례자]인줄만 알았다가 떡을 떼며 祝謝[축사]할 때에야 겨우 알아 보았으며(눅 24:31) 디베랴 바다의 弟子[제자]들도 그 奇蹟的[기적적] 豐漁[풍어]를 經驗[경험]한 다음에야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요 21:7).

  • ‘원정(園丁)’은 동산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정원사)을, ‘순례자(巡禮者)’는 종교적 목적으로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을 뜻한다. ‘축사(祝謝)’는 떡을 떼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것이고, ‘풍어(豐漁)’는 물고기를 아주 많이 잡는 것이다.
  • 기호 ‘①’을 붙여 첫 번째 특징(인지의 어려움)을 제시하고, 세 가지 성경 일화(마리아, 엠마오 두 제자, 디베랴 바다의 제자들)를 쉼표 없이 병렬로 나열하여 근거의 양을 풍성하게 확보한다.
  • 예수와 3년을 동고동락했던 가장 친밀한 제자들조차 부활한 예수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사나 나그네로 착각했다는 사실은, 예수의 몸과 분위기가 이전의 평범한 육체와는 다르게 신비롭고 영광스럽게 변모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라는 것이다.


② 그의 顯現[현현]이 突然的[돌연적]이었다. 門[문]이 密閉[밀폐]된 房內[방내]에 그는 突然[돌연]히 나타났었다(요 20:19, 눅 24:36).

  • ‘돌연적(突然的)’은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을, ‘밀폐(密閉)’는 틈이 없이 꽉 닫힌 것을 뜻한다.
  • 기호 ‘②’로 두 번째 특징(공간의 초월성)을 제시하고,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의 교차 인용을 통해 사실성을 높인다.
  • 인간의 육체라면 물리적인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하지만, 부활한 몸은 꽉 닫힌 방 안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을 만큼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완전히 변화된 몸이었음을 지적한다.


③ 그러나 그와 同時[동시]에 살과 뼈가 있는 同一[동일]한 物質體[물질체]를 가진이였다.

  • ‘물질체(物質體)’는 영혼과 대비되는, 실체가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이다.
  • 기호 ‘③’으로 세 번째 특징을 제시하되, ‘그러나’를 붙여 앞의 1, 2번 특징(영적인 초월성)이 자칫 육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즉각 브레이크를 걸며 물리적 육체성을 재강조한다.
  • 비록 공간을 초월하고 단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화하셨으나, 그 몸은 환영이나 귀신이 아니라 명백히 살과 뼈를 만질 수 있는 이전의 그 물리적인 육체 그대로였다는 모순적 합일의 선언이다.


눅 24장 36절에 있는 記事[기사]를 본다면 弟子[제자]들이 그의 顯現[현현]을 보고 귀신인가 하여 놀라며 떨고 있었다고 한다.

  • 성경의 구체적 기록을 인용하여 앞 주장의 근거(제자들의 두려움)를 제시한다.
  • 갑자기 방 안에 나타난 예수를 보고 제자들이 몹시 놀라고 떤 이유는, 그 형상이 영혼이나 귀신(유령)인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역사적 정황을 서술한다.


그때 主[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발과 내 손을 보라. 이는 나 自身[자신]이다. 만져 보아라. 神[신]은 살과 뼈가 없는 法[법]인데 나는 너 보는 대로 그런 것이 다 具備[구비]해 있지 않느냐?」하고 飮食[음식]을 나눠 잡수셨다고 하였다.

  • ‘신(神, 여기서 원어적 의미는 영혼/Pneuma)’은 육체가 없는 영적인 존재를, ‘구비(具備)’는 빠짐없이 고루 갖춘 상태를 뜻한다.
  • 예수의 육성을 직접 인용(겹낫표)하여 논증의 최종적 권위를 부여하고, ‘음식을 나눠 잡수셨다’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육체성에 대한 반박 불가능한 쐐기를 박는다.
  • 스스로를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영혼은 뼈와 살이 없지만 나는 다 가지고 있다. 직접 내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하셨으며, 직접 생선 조각 등의 음식을 드심으로써 당신이 완벽한 물질적 육체를 입고 부활하셨음을 몸소 증명해 내셨다는 것이다.


弟子[제자]들이 알아 보지 못한 것은 눈을 희미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누가는 說明[설명]하였다(눅 24:16).

  • 앞서 언급한 ①번의 문제(제자들이 왜 즉시 알아보지 못했는가)에 대해 누가의 해석을 빌려와 해명한다.
  •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예수의 몸이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인 눈(인식)이 가려져 희미해졌기 때문이라고 의사 누가가 성경에 기록했음을 지적한다.


勿論[물론] 罪[죄]많은 눈으로 榮光[영광]의 메시아를 볼 때 희미하였을 것도 事實[사실]일지나 또한 다른 點[점] 卽[즉] 弟子[제자]들이 幽靈[유령]인줄 알고 놀라서 떨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거기 무슨 變化[변화]된 點[점]이 있었던 것도 事實[사실]일 것이다.

  • ‘유령(幽靈)’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뜻한다.
  • ‘물론 A일지나 또한 다른 점 즉 B로 보면 C인 것도 사실일 것이다’라는 균형 잡힌 추론 구조를 통해 주관적 원인(제자들의 영적 무지)과 객관적 원인(부활체의 변화)을 종합한다.
  • 죄악된 인간의 눈이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감히 알아보지 못해 눈이 가려진 영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보고 유령인 줄 알고 공포에 질린 현상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예수의 몸 자체에도 과거의 물리적 한계를 벗어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합리적 추론이다.


이제 以上[이상]의 諸點[제점]을 綜合[종합]해 보건대 그리스도의 復活體[부활체]는 曾前[증전]의 몸과 그 同一性[동일성]을 가지면서도 그와 同時[동시]에 마치 變化山上[변화산상]에서 變化[변화]할 때와 같이 榮光[영광] 靈化[영화]된 몸이었음이 分明[분명]하다.

  • ‘제점(諸點)’은 여러 가지 측면이나 요점들을, ‘증전(曾前)’은 일찍이 이전(십자가에 달리기 전)을 뜻한다. ‘영화(靈化)’는 신령하게 변화되어 영적인 속성을 충만하게 띠게 됨을 의미한다.
  • ‘이제 이상의 제점을 종합해 보건대’라는 전형적인 결론 도출의 구문을 사용하여 부활체의 본질에 관한 장황한 논증을 하나의 명제로 압축해 마침표를 찍는다.
  • 앞선 모든 현상들을 종합해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예수의 부활체는 십자가에서 찢기고 상했던 이전의 육체와 완벽한 ‘동일성(뼈와 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변화산에서 빛난 광채를 냈던 것처럼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영광스럽고 신령하게 질적으로 변화(영화)된 완벽하게 새로운 몸이라는 것이다.
  • 유한한 육체를 입은 인간이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어떠한 몸을 입게 될 것인지(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신비)에 대한 정통 개혁주의 종말론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훌륭한 신학적 결론이다.


3. 바울의 영체론 및 종합 정의

이 부분은 바울 신학(고린도전서 15장)을 바탕으로, 썩을 혈육의 몸이 어떻게 ‘신령한 영체’로 변화하는지 그 원리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현재의 몸(동물적 생명)과 장차 가질 영체(영적 생명) 사이의 철저한 질적 차이를 역설하면서도, 이 둘이 어떻게 동일성을 유지한 채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창조의 신비로 돌린다. 마지막으로 뜨겁게 달궈진 쇠(鐵)의 비유를 통해 육체의 ‘영화(榮化)’라는 깊은 신학적 주제를 탁월하게 시각화하며 부활체에 대한 논증을 맺고 있다.


끝으로 우리는 使徒[사도] 바울의 靈體[영체]에 대한 說明[설명]을 參考[참고]할 必要[필요]가 있다.

  • ‘영체(靈體)’는 영적인 속성을 지닌 신령한 몸을 뜻한다.
  • ‘끝으로’라는 표지어를 통해 부활체 본질 논쟁의 결론부임을 알리고, 성경적 권위(사도 바울)를 끌어온다.
  • 예수의 부활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부활 신학을 가장 깊이 다룬 바울의 ‘영체’ 개념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한다.
  •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른바 ‘부활장’으로, 기독교 종말론과 부활체 연구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信者[신자]가 復活[부활]할 때에 받을 몸이 그리스도의 榮光[영광]의 몸과 같으리라고 말하고 그 몸의 性質[성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辱[욕]된 것으로 심고 榮華[영화]로운 것으로 다시 살며 弱[약]한 것으로 심고 强[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血氣[혈기]의 것으로 심고 神靈[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血氣[혈기]의 몸이 있은즉 또한 神靈[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 ‘혈기(血氣)의 것’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연약한 육체를, ‘신령(神靈)한 몸’은 성령에 의해 온전히 지배받는 몸을 뜻한다.
  • ‘심고 ~ 다시 살며’라는 대조적 대구법(Antithesis)이 반복된 바울의 서신을 직접 인용(겹낫표)하여 현재의 몸과 부활체의 본질적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 성도가 장차 입을 부활체는 예수의 몸과 같은 성질을 지니며, 그것은 현재의 썩고 욕되고 약하고 혈기적인 몸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썩지 않고 영화로우며 강하고 신령한 몸이라는 성경적 정의를 제시한다.


이로 보건대 그는 現在[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肉體[육체]와 將次[장차] 가질 靈體[영체]와를 相對的[상대적] 意味[의미]에서 말하였다.

  • ‘상대적(相對的)’은 서로 맞서 대립하거나 비교되는 관계를, ‘장차(將次)’는 다가올 미래를 뜻한다.
  • ‘이로 보건대’라며 앞선 인용구에 대한 저자 자신의 신학적 해석을 시작한다.
  • 바울은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와 미래에 입을 영체를 서로 완전히 다른, 대립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前者[전자]는 動物的[동물적] 生命[생명]의 原則[원칙] 위에 선 것이요, 後者[후자]는 靈的[영적] 生命[생명]의 原則[원칙] 위에 선 것이다.

  • ‘동물적(動物的) 생명’은 호흡과 음식물에 의존하는 물리적 생물학적 생명을 뜻한다.
  • ‘전자는 ~ 후자는 ~’ 구조를 통해 두 몸을 작동시키는 근본 원리가 다름을 명확히 대조한다.
  • 현재의 육체는 땅의 원리인 짐승과 같은 물리적 생명 원리로 작동하지만, 장차 올 부활체는 하늘의 원리인 성령의 영적인 생명 원리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兩者[양자]는 서로 混同[혼동]하거나 妥協[타협]할 수가 없다. 前者[전자]가 後者[후자]의 삼킨바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 ‘타협(妥協)’은 서로 양보하여 합의함을, ‘삼킨바’는 완전히 먹혀 흡수되는 상태를 뜻한다.
  • 두 문장을 통해 양립 불가능성과 철저한 정복(’삼킨바’)의 이미지를 결합한다.
  • 생물학적 몸과 영적인 몸은 적당히 섞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불완전하고 유한한 육체가 완전한 영체에게 완전히 먹혀버리듯 압도당해 완전히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그러나 이른바 靈體[영체]라는 것도 몸인 以上[이상] 必然的[필연적]으로 形體[형체]를 갖추었을 것이다.

  • ‘필연적(必然的)’은 반드시 그렇게 됨을, ‘형체(形體)’는 눈에 보이는 모양과 몸뚱이를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갖추었을 것이다” 대신에 “가초았을 것이며 따라서 空間[공간]을 占領[점령]한 物的存在[물적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낙수』에는 “가추었을것이다.”로 표기되어 있다.
  • ‘그러나 ~인 이상 ~갖추었을 것이다’라며 ‘영(Spirit)’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물질적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경계선을 긋는다.
  • 신령한 몸이라고 해서 형체도 없는 유령이나 안개 같은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몸’이라고 부르는 이상 확실한 물리적, 공간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준다.


그가 意味[의미]한 것은 다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살과 피」의 生理的[생리적] 存在[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 ‘생리적(生理的)’은 생물체의 생명 활동(노화, 소화 등)과 관련된 것이다.
  • 형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되, ‘~생리적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로 구체적인 성질을 제한한다.
  • 바울이 말하는 영체란, 늙고 병들고 썩어가는 현재의 생물학적인 살과 피의 작용을 가진 그런 육체는 더 이상 아니라는 뜻이다.


血肉[혈육]은 그 本質上[본질상] 썩을 것이므로 썩을 血肉[혈육]이 그대로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썩을 것이 不可不[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어야 하겠다.」(고전 15:50-53) 바울은 말한 것이다."

  • ‘혈육(血肉)’은 피와 살을 가진 현재의 몸을, ‘불가불(不可不)’은 하지 않을 수 없이 마땅히 그래야 함을 뜻한다.
  • 인과관계(’~므로 ~못할 것이다’)와 바울의 성경 구절을 다시 인용하여 영체로의 변화가 ‘신학적 필연’임을 증명한다.
  • 부패하고 썩어버릴 지금의 피와 살로는 영원하고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몸이 반드시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썩지 않는 신령한 옷(영체)으로 갈아입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설명한다.
  • 『신학지남』에는 이후에 “復活[부활]한 몸은 現在[현재]의 肉身[육신]과 같이 情慾[정욕]과 缺乏[결핍]에 支配[지배]받을 몸이 아니다”가 첨가되어 있다.


復活[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아니 들고 시집도 아니감이 하늘의 天使[천사]와 같을 것이다(마 22:30).

  • 마태복음 속 예수의 발언을 인용하여 부활체가 지닌 초생물학적 특징을 추가한다.
  • 부활한 후에는 인간의 생물학적 번식이나 생리적 욕구(결혼 등)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천사와 같이 영원하고 거룩한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生理的[생리적] 存在[존재]이었던 血肉[혈육]을 가진 몸이 어떻게 그 同一性[동일성]을 잃지 않고 靈體[영체]로 化[화]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모든 生命[생명]의 움직임과 創造[창조]가 神祕[신비]임과 同樣[동양]으로 神祕不可解[신비불가해]의 것이다.

  • ‘신비불가해(神祕不可解)’는 너무나 신비로워 인간의 지혜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고 풀 수 없음을 뜻한다.
  • ‘어떻게 ~화하는가’라는 방법론적 질문을 던지고, ‘~신비불가해의 것이다’라며 인간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긋는 답을 낸다.
  • 그렇다면 도대체 썩어질 피와 살이 어떻게 ‘자기 자신(동일성)’을 유지한 채 전혀 다른 물질인 ‘영체’로 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생명이 태어나고 우주가 창조된 것이 기적인 것처럼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비라고 선언한다.


이는 하나님의 全知全能[전지전능]에 屬[속]한 行事[행사]요 人間[인간]의 알바가 아니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전지전능(全知全能)’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行事)’는 행하신 일(사역)을 뜻한다.
  • ‘~알 바가 아니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인간의 지적 교만을 꺾고 신의 영역임을 확언한다.
  • 부활의 변화 메커니즘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므로, 유한한 인간이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復活[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그러면 그의 肉體的[육체적] 存在[존재]를 하나도 잃지 않는 同時[동시]에 그의 靈的[영적] 生命[생명]을 表現[표현]함에 가장 適應[적응]된 表現機關[표현기관]인 몸 卽[즉] 榮化[영화] 永遠化[영원화]한 몸이었던 것이다."

  • ‘표현기관(表現機關)’은 내면의 생명을 밖으로 드러내는 물리적 수단(그릇)을 뜻한다. ‘영원화(永遠化)’는 썩지 않고 영원한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 ‘그러면 ~ 즉 ~몸이었던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부활체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신학적인 종합 정의를 내린다.
  • 부활하신 예수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은 물리적 육체를 그대로 유지함(동일성)과 동시에, 신령한 생명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발산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질적 변화(영화, 영원화)를 이룬 가장 궁극적인 몸이라는 최종 결론이다.


鐵[철]이 그 同一性[동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內外[내외]가 아울러 變[변]하여 榮光[영광]과 熱[열]을 發[발]함에도 比[비]할 것일까?

  • ‘내외(內外)’는 안팎을, ‘발(發)함’은 뿜어냄을 뜻한다.
  • 쇳덩이(철)가 불에 달궈지는 비유를 활용한 수사의문문으로 단락의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 『신학지남』, 『낙수』에는 “鐵[철]이” 대신에 “鐵[철]에 熱[열]을 加[가]한대 鐵[철]이”로 표기되어 있다.
  • 『신학지남』에는 “榮光[영광]과” 대신에 “光[광]과”로 표기되어 있다.
  • 마치 시커먼 쇳덩이가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면 쇠(철)라는 본질(동일성)은 잃지 않으면서도, 안팎으로 시뻘겋게 변하여 엄청난 빛(영광)과 열을 내뿜는 새로운 상태로 변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육체가 영체로 변하는 신학적 신비를 감각적이고 탁월한 은유를 통해 독자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키는 명문장이다.


[4] 본론 3: 부활의 종교적 및 신학적 의의


1) 도입 : 부활과 신앙의 관계

이 단락은 부활의 신학적 의미를 전개하기 위한 서론 역할을 한다. 저자는 바울의 서신과 초대 교회의 역사를 근거로 삼아, 부활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성립 자체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터전(기초)’임을 명확히 규정한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음을 선언하며 논의의 무게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이런 몸으로 復活[부활] 昇天[승천]하신 것이 事實[사실]이라면 우리의 信仰[신앙]과 어떠한 關係[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 『신학지남』, 『낙수』에는 “事實[사실]이라면” 대신에 “事實[사실]이라면 이 事實[사실]이”로 표기되어 있다. 
  • 앞선 단락들의 결론(부활체에 대한 증명)을 조건절(‘~사실이라면’)로 받아,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문문을 통해 글의 초점을 ‘역사적 사실 증명’에서 ‘신앙적 의미 도출’로 자연스럽게 이동시킨다.
  • 부활이 부인할 수 없는 팩트이고 영광스러운 몸의 변화임이 입증되었으니, 이제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는지 파헤쳐 보겠다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이 없이 우리의 信仰[신앙]은 없는 것이다(고전 15:17).

  • 성경 구절(고린도전서 15:17)을 괄호 안에 인용하며, ‘A 없이 B는 없다’는 강한 절대적 명제를 제시한다.
  •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우리가 믿는 모든 내용도 거짓이 되므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을 지탱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근거임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使徒[사도]들은 復活[부활]을 기독교의 터전으로 잡고 이를 證據[증거]하기 爲[위]하여 使徒[사도]를 擇定[택정]하였으며(행 1:22) 「아덴」에서 辯論[변론]할 때의 바울이 또한 「예수와 및 그 몸의 復活[부활]」을 傳[전]하였던 것이요[행 17:18] 온갖 初代[초대] 敎徒[교도]들이 외친 것이 또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을 우리가 다 證據[증거]하노라」하는 一句[일구]이었다.

  • ‘터전’은 건물이 서는 튼튼한 밑바탕(기초)을, ‘택정(擇定)’은 가려 뽑아 정함을 뜻한다. ‘일구(一句)’는 하나의 구절, 즉 핵심 메시지를 의미한다.
  • 사도행전의 세 가지 역사적 사건(맛디아 사도 선출, 바울의 아테네 전도, 초대 교회의 공통된 선포)을 병렬로 나열하여 귀납적인 논거를 제시한다.
  • 초대 교회가 결원된 사도를 새로 뽑을 때 그 자격 요건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았고, 바울이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 전한 핵심 진리도 부활이었으며, 모든 초대 성도들이 외친 단 하나의 구호 역시 부활이었다는 역사적 팩트를 통해 기독교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부활’ 위에 세워진 종교임을 증명한다.


그러면 이것이 어떤 意味[의미]에서 우리의 信仰[신앙]을 左右[좌우]하는 것인가?

  • ‘좌우(左右)하는’은 어떤 일의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침을 뜻한다.
  • 다시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단락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이어지는 본론(첫째, 둘째 의미)으로 독자를 강하게 이끌어들인다.


2) 그리스도의 기독론적 품위 확증

이 부분은 부활의 첫 번째 종교적 의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기독론)이 확증된 사건임을 논증한다.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참 메시아이며, 율법의 저주(십자가)를 끊어내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오직 부활을 통해서만 최종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 그리고 신학자 마이어의 해석을 동원하여 부활이 십자가 구속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인이자(아멘) 기독론의 완성임을 탁월하게 밝혀내고 있다.


[1] 그리스도의 品位[품위]에 對[대]한 結論的[결론적] 立證[입증]이다.

  • ‘품위(品位)’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위격과 정체성(기독론적 지위)을 뜻한다. ‘결론적(結論的) 입증’은 더 이상의 논란을 잠재우는 최종적 증명을 의미한다.
  • 기호 ‘[1]’로 첫 번째 의의를 명시하며, 주제문을 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한다.
  • 부활이 우리 신앙에 주는 첫 번째 의미는, 예수가 정말로 우리가 믿고 따를 만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는 것을 완벽하고 최종적으로 증명해 낸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들로 믿음이 信者[신자]로서 救援[구원]에 參與[참여]하는 첫 告白[고백]이라 할진대 그가 그리스도의 品位[품위]를 具有[구유]하셨다는 客觀的[객관적] 立證[입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 ‘구유(具有)’는 골고루 갖추어 가짐을 뜻한다.
  • ‘~할진대 ~있어야 할 것이다’라는 조건과 당위의 논리를 사용한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 16:16)을 전제로 삼아 논리를 전개한다.
  • 기독교인의 구원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고백에서 출발한다면, 예수가 과연 그런 자격을 갖춘 분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리라는 것은 舊約[구약]에 豫言[예언]된 바요(시 16:8-11) 예수 自身[자신]이 스스로 屢次[누차] 豫言[예언]한 바이니(막 8:31, 10:34 等[등]) 그가 만일 復活[부활]하지 않았다면 「積山九仞[적산구인], 功虧一簣[공휴일궤]」 格[격]으로 그의 메시아로서의 品位[품위]는 最後[최후]의 「아-멘」을 告[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 ‘누차(屢次)’는 여러 번을 의미한다. ‘적산구인(積山九仞), 공휴일궤(功虧一簣)’는 "아홉 길의 높은 산을 쌓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공이 무너진다"는 뜻의 사자성어로, 마지막 한 단계를 넘지 못해 전체가 실패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 성경 구절(구약과 신약)을 괄호 안에 병기하여 팩트를 나열한 뒤, 사자성어와 가정법(’~하지 않았다면’)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부활이 결여될 경우의 치명적 결함을 꼬집는다.
  • 구약 성경도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했고 예수 자신도 수없이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했는데,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의 십자가 희생과 모든 훌륭한 가르침은 마지막 한 고비를 넘지 못해 공든 탑이 무너진 것처럼 실패작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즉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의 최종적 승인(아멘)도 없다는 것이다.


「나무에 달린 者[자]마다 咀呪[저주]아래 있다」한 것이 猶太[유태] 律法[율법]이다."

  • 신명기(21:23) 율법을 인용하여 당시 유대 사회의 세계관을 짤막하게 던진다.
  • 십자가 처형은 단순히 로마의 사형 틀을 넘어, 유대교 율법상 ‘하나님께 저주받아 버림받은 자’라는 영적 사형 선고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萬一[만일] 十字架[십자가]만 있고 復活[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咀呪[저주] 아래 있는 者[자]이니 어찌 救贖主[구속주]가 될 수 있으랴?

  • 앞 문장의 율법적 전제를 바탕으로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고 수사의문문으로 반박한다.
  •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그는 그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비참하게 죽은 한 명의 죄인일 뿐이므로 절대로 남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뼈아픈 신학적 논리이다.


그러나 그에게 復活[부활]이 있을 때 비로소 그는 榮光[영광]을 얻으시고 昇天[승천]하사 하나님 右便[우편]에 앉으시고 保惠師[보혜사]를 보내신 것이다.

  • ‘보혜사(保惠師)’는 은혜로 돕고 보호하시는 분, 곧 성령(Paraclete)을 뜻한다.
  • ‘그러나’로 반전을 이루며 부활이라는 사건이 가져온 영광스러운 결과들(승천, 우편 좌정, 성령 강림)을 연속적인 동사 구문으로 웅장하게 전개한다.
  • 『신학지남』에는 “保惠師[보혜사]를 보내신 것이다” 대신에 “保惠師[보혜사]를 보내시며 審判主[심판주]가 되실 수 있은 것이다”로 표기되어 있다.
  • 십자가의 저주를 부활로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예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로 올라가 통치자의 자리에 앉으셨고 신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수 있는 참된 구속주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衝天[충천]의 意氣[의기]를 얻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祖上[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도 삼고 救主[구주]도 삼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悔改[회개]케 하여 罪[죄]를 赦[사]하여 주고자 하셨다」(행 5:30)고 외치게 된 것이다.

  • ‘충천(衝天)의 의기’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은 상태를 뜻한다.
  •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공회를 향해 외친 담대한 설교를 직접 인용하여 앞선 신학적 해설(저주받은 죽음 → 하나님의 살리심 → 구주가 되심)에 대한 역사적 실증을 제공한다.
  • 율법의 저주인 나무(십자가)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기 때문에, 비로소 예수가 우리의 임금이자 구원자가 되어 죄 사함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베드로가 기세등등하게 외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復活[부활]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는 「主[주]시요 그리스도시며」(행 2:36), 「生命[생명]의 主[주]」이시오(행 3:15) 「救援[구원]의 唯一[유일]한 이름이시라」(행 4:12)고 베드로는 傳[전]하게 된 것이다.

  • 베드로의 세 가지 위대한 기독론적 선포(주/그리스도, 생명의 주, 유일한 구원의 이름)를 나열하며 그 모든 수식어의 근원적 바탕에 ‘부활’이 있음을 강조한다.
  • 나사렛 목수 예수가 온 우주의 주님이요, 생명의 주권자이며, 유일한 구원자라는 엄청난 칭호들을 얻게 된 것은 오로지 그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임을 거듭 증명한다.


「그가 하나님 아들」 되신 것도 또한 이 復活[부활]로 말미암아 最後[최후]에 立證[입증]을 얻게 된 것이다.

  • 베드로의 설교에서 바울의 신학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한 징검다리 문장이다. 기독론의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Divine Sonship)’ 개념을 이끌어낸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4절에 福音[복음]은 곧 하나님 아들을 가리키신 것이니 그는 「肉身[육신]으로 말한즉 다윗의 子孫[자손]으로 誕生[탄생]하시고 聖德[성덕]의 神[신]으로 말한즉 죽은 가운데서 復活[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들된 것을 權能[권능]으로 나타내셨으니 곧 우리主[주] 그리스도시라」고 言明[언명]하였다.

  • ‘성덕(聖德)의 신’은 원어상 성결의 영(Spirit of Holiness)을 뜻하며, ‘언명(言明)’은 말로 분명히 밝힘을 뜻한다.
  • 바울의 기독론적 정수라 불리는 로마서 서문(육신 vs 영, 다윗의 자손 vs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인용하여 양성(인성과 신성)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연약하게 태어났으나, 영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은 뒤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심(부활)으로써 그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권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온 세상에 선포되고 확증되었다는 바울의 신학적 통찰을 제시한다.


卽[즉] 福音[복음]의 眞髓[진수]는 하나님 아들 自身[자신]이오 하나님 아들은 人間性[인간성]으로는 다윗의 子孫[자손]이요 聖神[성신]으로는 復活[부활]로 말미암아 그 靈的[영적] 權能[권능]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 ‘진수(眞髓)’는 사물이나 현상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을, ‘성신(聖神)’은 거룩한 영(성령)을 뜻한다.
  • 『신학지남』, 『낙수』에는 “聖神[성신]” 대신에 “神性[신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 ‘즉 ~이오 ~요 ~것이다’라는 구조로 바울의 긴 인용문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재요약한다.
  •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인데, 그분은 참 인간이심과 동시에 부활의 기적을 통해 영적인 권능을 드러내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양성론적 진리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마이어[Meyer]에 依[의]하면 바울이 여기에 말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다만 메시아라는 말의 同義語[동의어]로 쓴 것이 아니라 先在[선재]하시고 아버지의 本體[본체]로부터 나오신 同格的[동격적] 神性[신성]임을 말함이니 「메시아」라는 職務的[직무적] 用語[용어]보다 더욱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意義[의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 ‘마이어(H.A.W. Meyer)’는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신약 주석가이다. ‘선재(先在)’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미리 존재함을, ‘본체(本體)’는 근본 바탕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은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철학적(여기서는 존재론적 신학적) 의미를 뜻한다.
  • 저명한 신약 학자의 주석을 인용하여 바울이 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깊이를 존재론적 차원(Ontology)으로 끌어올린다.
  • 부활로 확증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유대인들이 흔히 쓰던 정치적 구원자(메시아) 정도의 직분적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으로서 동등한 신성(神性)을 지닌 분임을 가리키는 훨씬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신학적 개념임을 논증한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라는데 對[대]한 最後[최후]의 結論的[결론적] 立證[입증]이 곧 그의 復活[부활]이었으며 이 메시아가 몸을 贖罪祭[속죄제]로 드리며 「다 이루었다」하신 十字架上[십자가상]의 말씀에 對[대]한 하나님의 「아-멘」이시다."

  • ‘속죄제(贖罪祭)’는 죄를 씻기 위해 바치는 희생 제사를, ‘아멘’은 ‘그렇게 될지어다(진실로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인정과 승인을 의미한다.
  • ‘그러면 ~입증이 곧 그의 부활이었으며’로 첫 번째 종교적 의의의 결론을 내리고, 예수의 말씀(’다 이루었다’)과 하나님의 응답(’아멘’)을 절묘한 대구법으로 배치하여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장엄함을 극대화하며 단락을 맺는다.
  • 최종적으로 나사렛 예수가 참된 메시아이자 성부와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결론지어 증명한 사건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며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아들 예수의 사역을 향해, 성부 하나님께서 부활이라는 기적을 통해 "그래, 네가 다 이루었다. 내 아들이 맞다"라고 최종적인 결재 도장(아멘)을 찍어 주신 것이 부활의 가장 위대한 기독론적 의미라는 탁월한 영적 통찰이다.


3) 신자 구원의 확증과 원동력

이 부분은 앞서 다룬 첫 번째 기독론적 의미에 이어, 부활이 신자의 구원 성취와 영생의 보장에 있어 어떠한 최종적 확증이 되는지 논증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바울의 신학을 바탕으로 십자가의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가납되었다는 객관적 증거가 바로 부활이며, 이 부활이 신자에게 칭의의 근거가 됨을 밝힌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반 신자 부활의 전제이자 원동력으로서 구원의 시작과 끝을 완벽하게 보증한다고 분석한다.


[2] 信者[신자]의 救援[구원]에 對[대]한 最後[최후] 및 最終[최종]의 確證[확증]이다.

  • ‘최후 및 최종의 확증(最後 및 最終의 確證)’은 구원의 완성과정에 있어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마지막 보증을 뜻한다.
  • 기호 ‘[2]’를 사용하여 부활의 두 번째 종교적 의의를 명시하는 명사구 형태의 주제문을 제시한다.
  • 부활이 신자의 구원이 진실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이고 마지막인 증거라는 점을 선언한다.


① 使徒[사도] 바울은 罪[죄]와 죽음, 義[의]와 復活[부활]을 有機적[유기적] 關係[관계]에서 말하였다.

  • ‘유기적 관계(有機的 關係)’는 각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뗄 수 없는 관계를 뜻한다.
  • 기호 ‘①’을 통해 첫 번째 세부 논증(칭의와 십자가·부활의 관계)을 시작하며, 사도 바울의 신학적 관점을 인용의 서두로 삼는다.
  • 사도 바울이 죄, 죽음, 의로움, 그리고 부활이라는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 주제들을 서로 분리되지 않는 유기적인 틀 안에서 설명했음을 밝힌다.


「예수는 우리 犯罪[범죄]함을 因[인]하여 十字架上[십자가상]에 贖罪[속죄]의 祭物[제물]로 그 몸을 드리었다. 그는 第二[제이] 아담으로 全人類[전인류]의 代表[대표]이심에 그의 十字架功德[십자가공덕]으로 因[인]하여 全人類[전인류]가 神[신]과 和睦[화목]함을 얻게 된 것이다.

  • ‘제이 아담(第二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순종을 통해 구원을 이룬 그리스도를 뜻하며, ‘화목(和睦)’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됨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因[인]하여” 대신에 “因[인]하야 내여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義[의]롭다하심을 爲[위]하야 살아나섰나니라」(롬 4:25) 그는 우리의 犯罪[범죄]함을 因[인]하야”로 표기되어 있다. 
  • 『신학지남』에는 “全人類[전인류]가” 대신에 “全人類[전인류]가 客觀的[객관적]으로”로 표기되어 있다.
  • 바울의 신학적 논증을 직접 인용하여 십자가의 속죄 사역과 인류 대표성의 원리를 설명한다.
  • 예수께서 인류의 대표인 제2 아담으로서 범죄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그 공로로 인해 온 인류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렸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 十字架[십자가]는 그가 사람 便[편]에 서서 하나님께 드린 祭祀[제사]인 것 뿐이니 하나님이 이 祭祀[제사]를 嘉納[가납]하셨다는 客觀的[객관적] 表示[표시]가 없는 限, 우리는 아직도 罪[죄]에 屬[속]한 者[자]임을 免[면]치 못할 것이다.

  • ‘가납(嘉納)’은 기쁘게 받아들임(열납함)을 뜻한다.
  • ‘그러나’라는 역접을 통해 십자가 사역만으로는 부족한 객관적 증거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대비시킨다.
  •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은 여전히 죄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고전 15:17)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앞서 전개한 논리에 절대적인 성경적 권위를 부여한다.
  •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된다는 바울의 엄숙한 선언을 전달한다.


卽[즉]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그의 贖罪祭[속죄제]를 하나님께서 嘉納[가납]하셨다는 客觀的[객관적] 證左[증좌]이다.

  • ‘증좌(證左)’는 증거가 되는 사물을 뜻한다.
  • ‘즉 ~이다’라는 요약적 평서문을 통해 부활의 신학적 기능을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한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이 그의 십자가 속죄 제사를 완전히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義[의]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十字架[십자가]만이 우리의 稱義[칭의]를 成就[성취]할 수 없는 것이오 오직 復活[부활]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 十字架[십자가]의 贖罪[속죄]가 功效[공효]를 生[생]하게 되는 것이니 復活[부활]은 우리 救援[구원]의 最初[최초] 第一步[제일보], 卽[즉] 稱義[칭의]에 對[대]한 根據[근거]가 되는 것이다.

  • ‘칭의(稱義)’는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공효(功效)’는 공과 효험, 즉 실제적인 능력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根據[근거]가 되는 것이다” 대신에 “確證[확증]을 보이신 것이다”로 표기되어 있다.
  • 인과관계의 접속사(’그러므로’)와 대조 구문을 사용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유기적 협력 관계를 설명한다.
  • 부활로 인해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게 되었으며, 십자가 단독으로는 칭의를 완성할 수 없고 부활이 결합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속죄가 효력을 발휘하므로 부활은 구원의 첫걸음인 칭의의 절대적 근거가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②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또한 一般信者[일반신자]의 復活[부활]에 對[대]한 前提[전제]임과 同時[동시]에 그 原動力[원동력]이다.

  • ‘전제(前提)’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먼저 있어야 할 조건이며, ‘원동력(原動力)’은 어떤 일을 추진하는 근본적인 힘을 뜻한다.
  • 기호 ‘②’를 붙여 두 번째 세부 논증(신자의 부활과 원동력)으로 주제를 확장한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 개인의 사건에 그치지 않고, 모든 믿는 신자들이 미래에 부활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자 동시에 그 부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영적 힘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對[대]한 論議[논의]는 롬 5:6, 8:11, 고전 15장 等[등]에 詳述[상술]된 것이니 췌론을 피하거니와 特[특]히 롬 8:10절 以下[이하]의 바울의 理論[이론]은 有名[유명]한 것이다.

  • ‘췌론(贅論)’은 쓸데없이 길게 덧붙이는 말을 뜻한다.
  • 성경 본문의 구체적 위치를 언급하며 불필요한 설명을 줄이고 핵심 논리로 직행하는 수사적 장치를 쓴다.
  • 성경 여러 곳에 자세히 기록된 바를 들어 설명을 간추리면서, 특히 로마서 8장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구원론적 논리가 매우 중요함을 환기한다.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罪[죄]로 因[인]하여 죽고 영은 義[의]로 因[인]하여 살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居[거]하시는 聖神[성신]으로 너희 죽은 몸을 살리시리라」(롬 8:10-11)한 것이다.

  • ‘성신(聖神)’은 거룩한 영, 즉 성령을 뜻한다.
  • 로마서 8장 10-11절의 핵심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바울의 영적 부활 논증을 뒷받침한다.
  •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실 때 육체는 죄로 인해 죽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되며,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죽을 몸 또한 살려내실 것이라는 부활의 약속을 제시한다.


萬一[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罪[죄]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것이니 靈的[영적] 方面[방면]에 있어서는 「復活[부활]」이 이미 始作[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인용구에 대한 저자 자신의 신학적 해석을 덧붙여 현재적 구원의 차원을 설명한다.
  • 『신학지남』,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罪[죄]로 말미암아” 대신에 “因[인]하야 죽음의 範疇[범주]에 屬[속]한 肉體[육체]는 죽는다할지라도 神[신] 即[즉] 사람의 神[신]은 그리스도의 義[의]로 말미암어”로 표기되어 있다.
  •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거할 때 이미 영적인 차원에서는 부활의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실존적 구원론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새로운 靈的活動[영적활동] 聖神[성신]의 活動[활동]은 점점 그 程度[정도]와 領域[영역]을 넓혀서 우리의 肉體的[육체적] 方面[방면]에까지 미치며 나중에는 우리의 죽을 몸 卽[즉] 肉體[육체]까지 復活[부활]시키리라는 말이다.

  • ‘영적 활동(靈的活動)’과 ‘성신의 활동(聖神의 活動)’은 동의어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靈的活動[영적활동] 聖神[성신]의 活動[활동]은 점점” 대신에 “靈的活動[영적활동]은 漸漸[점점]”으롶 표기되어 있다.
  • ‘점점 ~넓혀서 ~미치며 나중에는 ~시키리라’라는 점층적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구원의 확장성을 시각화한다.
  • 성령의 거룩한 활동은 영혼에 머물지 않고 점차 영역을 넓혀 우리의 육체적 측면까지 영향을 미치며, 결국 종국에는 우리의 죽을 육신까지 온전히 부활시키는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구속사의 거대한 흐름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最後[최후]의 원수인 죽음을 征服[정복]할 첫 證據[증거]를 보임과 同時[동시]에 그의 復活[부활]하신 生命[생명]이 우리 안에 原動力[원동력]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榮光[영광]의 몸으로 復活[부활]하게 할 것이니 이는 우리의 救援[구원]을 완성하는 날이다.

  • ‘최후의 원수인 죽음’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사망의 권세를 뜻한다.
  • ‘~보임과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 ~완성하는 날이다’라는 복합 문장으로 두 번째 종교적 의의 전체를 결론짓는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최후의 원수인 죽음을 꺾어버린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며, 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장차 우리를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게 함으로써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는 날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復活[부활]은 우리 救援[구원]의 처음과 나중에 確證[확증]을 주는 것이며 永生[영생]의 希望[희망]도 이 復活[부활]의 事實[사실]에서 그 確實性[확실성]을 보는 것이다.

  • ‘처음과 나중(처음과 나중)’은 구원의 시작(칭의)부터 완성(육체의 부활)까지의 전 과정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처음과 나중에 確證[확증]을 주는 것이며 永生[영생]의 希望[희망]도 이 復活[부활]의 事實[사실]에서 그 確實性[확실성]을 보는 것이다” 대신에 “最終[최종]의 確證[확증]을 보이신 것이다”로 표기되어 있다. 
  •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전체 논의를 요약하며, ‘구원의 처음과 나중’, ‘영생의 희망’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단락의 대미를 장식한다.
  •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구원이 시작될 때와 완성될 때의 모든 순간에 확실한 보증이 되어주며, 우리가 품는 영생의 희망 역시 오직 이 부활의 객관적 사실성 안에서만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을 갖게 된다는 심오한 신학적 결론을 내린다.


[5] 결론: 부활의 우주적 승리 선포와 기독교의 본질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 전체의 진위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임을 총망라하여 선언하는 결언이다. 저자는 만약 부활이 없다면 복음은 거짓이요 기독교 전체가 허망 중의 허망에 불과할 것이며, 창세 이후의 구속 경륜이 한바탕 허튼 꿈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가정법을 통해 역설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모든 자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선포하며, 성경의 진리성 확증, 사탄의 패배, 죽음에 대한 생명의 우주적 승리를 장엄하게 선언한다. 최종적으로 기독교야말로 명실상부한 ‘부활의 종교’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확증하며 글을 맺는다.


그리스도가 살으셨다면 福音[복음]은 참말이다.

  • ‘살으셨다면(부활하셨다면)’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뜻하며, ‘복음(福音)’은 기쁜 소식으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의미한다.
  • 조건문 형식(’~다면’)을 사용하여 부활의 사실성이 진리의 참과 거짓을 가르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임을 제시하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 성립한다면, 그분이 전파하고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 전체가 조금도 거짓 없는 진실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 全基督敎[전기독교]는 虛妄中[허망중]의 虛妄[허망]이다.

  • ‘허망중의 허망(虛妄中의 虛妄)’은 헛되고 헛되며 그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허무와 거짓을 뜻한다.
  • ‘그러나’라는 역접과 가정법을 결합하여 부활이 없을 때의 파국적 결과를 극대화하며, 최상급의 표현을 사용하여 비참함을 강조한다.
  • 만약 예수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역사 속의 기독교는 진리가 아니라 거대한 착각이자 가장 헛된 헛소동에 불과하게 된다는 준엄한 경고이다.


그가 復活[부활]하셨다면 先知者[선지자]가 豫言[예언]한 메시아시며 하나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同等[동등]이시다.

  • ‘선지자(先知者)’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언자를, ‘동등(同等)’은 본질과 성품이 같음을 뜻한다.
  • 『신학지남』, 『낙수』에는 “先知者[선지자]가” 대신에 “先知者[선지자]의”로 표기되어 있다.
  • ‘~하셨다면 ~이시다’라는 조건과 귀결의 구조를 반복하여 부활이 가져오는 신학적 지위의 확정을 설명한다.
  • 부활을 통해 예수가 구약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을 성취한 진짜 메시아이며,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임이 완벽하게 증명된다는 뜻이다.


그가 復活[부활]하셨다면 그의 犧牲[희생]은 萬民救贖[만민구속]의 實效[실효]를 나타내심이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도 咀呪[저주]아래 있을 것이다.

  • ‘만민구속(萬民救贖)’은 모든 사람을 죄에서 건져냄을, ‘실효(實效)’는 실제로 거두는 효력이나 결과를 뜻한다.
  • 부활했을 때의 결과와 그렇지 않을 때의 결과(~않다면)를 대조하여 구원론적 실효성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 부활이 있음으로 해서 십자가의 희생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되지만, 부활이 없다면 인류는 여전히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방치되어 있을 것이라는 구원론적 결론이다.
  • 『신학지남』에는 이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는 人類[인류]의 代表[대표]이심애 그가 살면 우리도 살고 그가 죽으면 우리도 죽을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니 포도나무가 살명 가지도 살고 포도나무가 죽었으면 가지도 죽을 것이다.”


그가 살지 않으셨다면 創世[창세] 以來[이래]의 救援[구원]의 全經綸[전경륜]이 무너짐이니 사람과 天使[천사]와 온갖 階級[계급] 온갖 秩序[질서]를 爲[위]하여 때를 따라 世紀[세기]를 따라 豫言[예언]하고 期待[기대]한 永光[영광]스러운 結末[결말]이 한마당 허튼 꿈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 ‘전경륜(全經綸)’은 하나님의 온 세상 구원 계획 전체를, ‘허튼 꿈’은 헛되이 꾸고 사라지는 실체 없는 환상을 뜻한다.
  • 『신학지남』에는 “허튼 꿈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허튼꿈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로 표기되어 있다.
  • 우주적이고 장엄한 스케일의 주어들(사람, 천사, 계급, 질서)과 시간적 범위(창세 이래, 세기를 따라)를 엮어, 부활 부재 시의 우주적 파국을 묘사하는 가정법 문장이다.
  • 만약 부활이 없다면 창세 이후 하나님이 인류와 천사와 온 우주 질서를 위해 세워오신 거대한 구속사적 계획 전체가 산산조각 나며,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이들이 고대했던 영광스러운 구원의 결말이 단지 한바탕 허무한 꿈으로 끝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는 웅장한 선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일어나서 모든 者[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으매」 聖經[성경] 全體[전체]가 信託[신탁]임이 立證[입증]되었으며 黑暗[흑암]의 나라가 함몰되고 사탄이 번개같이 하늘에서 떨어져 眞理[진리]가 虛僞[허위]를 이기고 惡[악]이 善[선]에 삼킨바 되고 죽음이 生命[생명]에 삼킨바 되었으니 진실로 그리스도 敎[교]는 復活[부활]의 宗敎[종교]라는 讚辭[찬사]를 받기에 不足[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 ‘처음 익은 열매’는 부활의 첫 번째 사례이자 이후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을, ‘신탁(信託)’은 하나님이 믿고 맡기신 참된 진리의 말씀을, ‘함몰(陷沒)’은 무너져 파묻힘을 뜻한다. ‘찬사(讚辭)’는 칭찬하여 기리는 말을 뜻한다.
  • ‘그러나 이제’라는 전환을 통해 앞선 비관적 가정들을 일시에 깨뜨리고, 성경 구절 인용과 함께 수많은 승리의 동사들(’입증되었으며’, ‘함몰되고’, ‘떨어져’, ‘이기고’, ‘삼킨바 되고’)을 병렬적으로 폭발시키며 절정에 이른다.
  • 『신학지남』, 『낙수』, 『김재준 저작전집』에는 “者[자]의” 대신에 “자는 者[자]의”로 표기되어 있다.
  • 그러나 현실은 가정(만약)이 아니라 실제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로써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신실한 진리임이 증명되었고, 어둠의 세력과 사탄은 완전히 패배했으며, 진리가 거짓을,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우주적 승리가 완성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야말로 이 모든 승리를 가능하게 한 ‘부활의 종교’라는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장엄한 결단과 확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글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의


1. 신학적·역사적 의의: 신앙을 지성으로 방어한 변증학적 명작

장공 김재준의 이 논문은 단순한 교리 해설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 사건을 당시의 세속적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 앞에 당당히 세운 위대한 변증학적 성과물이다. 저자는 신앙을 맹목적인 도그마나 감정적 열정으로 강요하지 않고, 역사적 사료(복음서, 바울 서신), 인간 심리에 대한 분석, 그리고 엄밀한 논리적 소거법을 동원하여 부활이 객관적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해 냈다. 이는 기독교 진리가 이성과 역사적 검증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2. 오늘날 우리가 이 글을 읽어야 하는 의미: 불확실성의 시대에 던지는 부활의 실재성 회복

모든 것이 다원화되고 과학적 실증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영적 세계와 초자연적 기적을 점점 신화나 상징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교회 안조차도 부활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심리적 위안이나 종교적 메타포 정도로 변질시키려는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이 글은 우리에게 묵직한 경고와 도전을 던진다. 부활은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뼈와 살을 지닌 역사적 실재이며, 이 실재가 결여된 기독교는 허망한 소동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외침은 오늘날 성도들과 신학도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다시금 ‘부활의 객관적 사실성’ 위에 굳건히 내리도록 촉구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1세기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 역사하며(롬 8:11), 최후의 원수인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고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이끌어갈 절대적 원동력이다. 진리와 생명이 허위와 죽음을 완전히 집어삼킨 이 우주적 승리의 소식을 붙들 때, 현대인들은 절망과 허무의 바다에서 벗어나 비로소 ‘부활의 종교’가 주는 참된 생명과 영생의 소망을 현재적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