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속 숨은 이야기 - 동양편] 제국의 멸망에도 공식이 있다? - 최진기
[전쟁사 속 숨은 이야기 - 동양편]은 최진기 강사의 최근 강의로 오마이스쿨에서 볼 수 있다. 유료이긴 하지만 오마이스쿨의 강의는 나름 일반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지식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좋은 강의들이 많이 있다. 강의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노트에 필기하면서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1강] 권력의 공식
역사를 통해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제국 멸망에 대한 공식이 있는 것 같다.
1) 막강한 신흥 강국의 등장, 2) 무능한 지배자, 3) 후퇴하는 사회 경제
명나라의 멸망에 대해서 위의 공식을 적용하면 막강한 신흥 강국은 여진족(청나라)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1559년에 출생하였고, 그가 속한 부족은 대대로 명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족이었다. 1583년 누르하치가 24세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명군에 의해 살해된 이후에도 누르하치는 계속 명에게 충성심을 보이며 주변의 부족들을 차근차근 통합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누르하치는 조선에 출병하겠다는 제안도 하였다. (물론 조선은 거절했고,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시기에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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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르하치 |
누르하치가 어느 정도 세력에 자신이 생겼을 때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였고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명나라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여진족은 유목 민족으로 농경민족에 비해서 전투기술은 상당히 뛰어났다. 그런데 명나라의 군사력이 여진족의 청나라에 비해서 형편없이 약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는 당시에 ‘홍이포’라는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626년,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산해관 앞에 있는 영원성을 공격하였는데 2만명의 명나라의 원숭환이 누르하치의 15만을 격퇴시켰다.
“짐은 25세부터 정벌한 이후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성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은 청나라에 침공당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농민군 이자성이 북경에 무혈입성하였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숭정제)가 자살하면서(1644년) 명나라가 망한 것이다.
중국 농민 봉기의 공식은 1) 기근으로 유랑민이 급증하고, 2) 탈영병 출신의 리더가 등장하며, 3) 미신적 종교가 합세하여 세력이 커졌다. 진승 오광의 난(진나라), 황건적의 난(한나라), 황소의 난(당나라), 홍건적의 난(원나라), 이자성의 난(명나라), 백련교도의 난(청나라)이 대부분 이러한 공식에 적용된다.
21세기 오늘날 중국은 이러한 위험요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1) 세계의 무역 전쟁으로 콩 가격이 폭등하고, 원유가격이 상승하고, 관세율이 높아지는 것이 기근으로 유랑민이 급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2) 탈영병 출신의 리더는 중국 공산당의 내분이라고 볼 수 있으며, 3) 미신적 종교는 민주주의의 침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 북경이 이자성에게 점령당한 이후에 산해관을 지키는 장수는 오삼계였다. 오삼계는 북진하는 이자성의 10만 군대를 대항할 것인가? 남진하는 청나라 도르곤의 10만의 군대를 대항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오삼계는 결국 산해관을 열고 청나라에게 투항한다.
이러한 이자성의 교훈에 대해서 장제스(장개석)와 마오쩌둥(모택동)은 각기 다른 견해 차이를 나타내었다. 장제스는 명은 여진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이자성에게 망했다고 보았으며,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욱 무서운 법이니, 일제와의 싸움보다 공산당과의 싸움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명은 군대가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서 진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자성이 북경까지 점령했으나,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란군이 약탈을 시작할 때부터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공산당은 적과의 싸움보다 먼저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절대 민가를 약탈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2강] 무능한 지배자의 등장
명나라의 경우 무능한 지배자의 등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명은 숭정제 때가 아닌 신종 ‘만력제’ 때에 망했다고 본다. 명나라 만력제는 재위 기간이 48년(1572~1620년)이나 되었다. 그는 초반 10년 동안은 승상 장거정의 섭정으로 나름 괜찮은 시대를 펼쳤지만 후반 30년은 황제가 파업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파업의 기간동안 오직 임진왜란 참전만 결정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의 은혜(?) 덕분에 1937년 중일전쟁 직전까지 ‘만력제’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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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만력제 |
만력제의 아들 희종(천계제)는 재위기간(1620~1627년) 동안 목공예에 심취하였다고 하다. 만력제의 파업으로 인해, 후계자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문맹으로 황제에 올랐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사회가 무능한 왕을 만들었을까? 왕이 무능해서 사회가 무능해졌을까?”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황제의 독제 체제와 만력제와 희종으로 인해서 명이 망했다고 진단하는데 서양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하버드가 본 ‘명’이 망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하버드 대학교 기획 -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티머시 브룩이 책임편집한 ‘하버드 중국사’ 참조)
명나라가 망할 즈음에 소빙하기가 있었다. 1586~1588년에 첫 번째 ‘만력의 늪’이 있었는데 이때는 장거정의 개혁으로 모은 돈으로 버텼다. 그런데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은 재정이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여진족도 힘겨운 상황 속에서 말도 안되는 명나라 정벌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1628년 숭정제 때 ‘최악의 늪’이 발생하면서 국가가 파산에 빠지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하버드의 진단은 나름 참신하긴 하지만 논리적 허점을 갖고 있다. 당시 소빙하기는 명나라에만 온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왔기 때문에 그 시기에 왕조를 지킨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만력제 때 장거정(1525~1582)의 개혁은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으로 경제력이 성장하였고, ‘은 본위 시스템’으로 필리핀 등지에서 유럽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당시 경제력 만으로는 청을 무찌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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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상화는 약간 간신타입이지만... |
그런데 위에서 말했던 ‘만력제의 파업’은 왜 일어났을까? 파업은 왜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파업은 처우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가 처우 조건 개선을 위해서 파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 즉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라고 보아야 한다.
‘명말 청초’의 지배계급은 ‘신사’라고 한다. 신사는 과거제와 학교제 등과 연계되어 국가권력으로부터 어떤 자격을 받은 관직 경력자와 예배 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학문적 배경은 당연히 성리학이었고, 유교적 소양의 사회계층에서 특권적 대지주(강남자산계급)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실질적 면세 혜택을 받고 있었다.
『중국의 신사계급』에 의하면 절대 권력자와 민중 사이에서 오로지 자신과 그 일족의 안녕과 부를 지키기 위해 기생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지식인은 기술 지식을 갖지 못한 계급이다. 그들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지혜 및 자신의 예술적 재능의 표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했다(106쪽). 이들은 명나라의 국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했던 것이다. 왕(지도자)의 무능은 거꾸로 신하들의 강력함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에서 월가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이 충돌했을 때, 과연 미국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을까?
[3강] 후퇴하는 사회 경제
과연 명나라가 망하기 전에 사회 경제는 후퇴했을까? 사실 명나라 말기에는 사회경제가 상당히 발전해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6,500만명이었던 인구는 1600년에 1억 5,00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농업과 시장이 발달하였고, 시장이 발달하면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일조편법과 은본위 제도는 전반적으로 경제는 성장시켰지만 빈부의 격차를 증가시켰고 결국 빈곤층들은 살기 위해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곡 농업 기반의 붕괴와 신사 계급의 독주로 인해서 명나라 말에 민란이 발생했을 때, 진압하러 간 군대가 오히려 (보급을 받지 못해서 약탈하기 시작했고) 민란에 합류하는 결과가 발생하였다. 사회의 발전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한다는 단순함으로 사회를 볼 수는 없다.
사회경제를 독점하고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 계층(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될 때 국가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청나라가 들어와서 접수한 것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