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의 자택 감금
그후부터 자택 감금 상태여서 아무도 얼씬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도농에 피난해 있었다. 하루는 신양섭이 도농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 졸업생으로서 ‘기독교연맹’ 맹원[1]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그 덕택에 저쪽 소식을 적어도 한주일쯤은 앞당겨 알아낸다. 그리고서는 송창근 학장과 도농에 있는 나에게 전한다. 그는 자전거 타고 40리길을 한주일 두세 번 다녀간다. 겁 없는 친구다. 그는 이렇게 전한다.
“전쟁은 말기 현상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저애들은 초조하게 발악합니다. 오늘은 송 목사님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송 목사님이 김천교회를 목회할 때 집사로 있던 ‘박철’이란 사람이 김일성이 지명한 이남 국회의원격인 인민대표자의 하나로 월북한 일이 있었는데 그자가 이번에 서울 와서 송 목사님을 찾아뵙고 사연을 말하더랍니다.
‘제가 송 목사님 신분과 안전을 절대 보장합니다. 안심하고 댁에 계십시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의 안전도 절대 보장합니다. 다들 돌아와서 다시 신학교를 맡으라고 하십시오!’” 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이튿날, 신학교 건물을 접수하여 지키고 있던 ‘민청’ 아이들을 당장 몰아내고 모든 재산과 관리권을 송 목사에게 도루[2] 마끼더라고[3] 했다.
송 목사는 혼자서 그 건물을 맡아 돌아보노라니 외로워 견딜 수 없었다면서 “‘장공’을 데려오라고 해서 일부러 왔습니다” 한다.
나는 갈 생각도 있었지만, 그때 역시 악성 마라리아[4]에 걸려 매일 떨고 있는 판이었고 못 먹고 쇠약해서 일어서다가 까무러치기도 하는 형편이어서 40리를 걸을 자신이 없었다. “몸이 좀 나으면 간다고 송 목사에게 알려라” 하고 돌려보냈다.
성결교회 신학교도 접수되고 박현명 목사 등도 숨어 있었는데 송 목사는 일부러 박현명 교수를 찾아가서 한신재단 반환된 얘기를 하고 ‘박철’을 만나라 했단다.
그대로 해서 성결신학교도 되찾고 박현명[5] 교수와 다른 선생들도 학교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한주일 지나서였다. 신양섭은 다시 도농에 왔다.
“목사님, 그때 서울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서울 안 목사 40여명이 몽땅 잡혔습니다.”
인민군 정부에서는 종로 YMCA회관에서 목사들 주최로 대대적인 ‘미영격멸대회’를 열라고 지령해 왔었는데 유호준ㆍ김종대 등을 주최자로 강제 등장시켰고 송창근 목사도 단위에 앉히려고 강권하더라는 것이다. 송 목사는 청중들 틈에 끼어 앉았었지만, 안고 밀고하면서 단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시종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시민이래야 모두 소개하고 몇 사람 없는데 늙은 할머니들이 수십 명 나와 앉았더라고 한다.
그 모임은 완전 실패였다. 그 후부터 목사 잡기 운동을 벌여서 우선 김재준부터 잡으려고 동자동을 비롯하여 있음직한 곳은 모조리 찾아다녔단다. 사람들은 김재준의 행방을 물어도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나는 도농에로 떠날 때 동사무소에 소개지 주소를 정직하게 써 놓고 왔으니까, 그것만 들춰봐도 알법한 일이었지만 그건 건드리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모두가 엉터리 주소를 써 놓았기 때문에 나도 예외가 아니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