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에의 기류
미국과 소련의 열전(熱戰)[1] 대결은 ‘피장파장’이어서 어느 한 켠의 시원한 승리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38선에서 ‘교착’[2]되고 말았다.
‘평화조약’은 가망이 없더라도 ‘휴전’은 해야 할 판이었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맥아더 장군은 ‘소뿔[3]은 단김에 뽑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 ‘까리’에 아예 만주와 중공까지도 쓸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것을 원치 않았고 따라서, 전방 사령관으로 릿지웨이를 보낸 것이다.
이제부터 서둘러야 할 일은 휴전 조약과 포로 교환에 대한 협의와 협정이었다.
서울은 이미 탈환되었으나 작전지구라서 환도[4]는 허락되지 않았다.
미ㆍ소는 서로 버티다가 1951년 7월 8일에 판문점에서 두 켠 연락 장교단이 예비 교섭을 열고, 본회의 개최에 합의했다 한다. 그러고 보면 휴전은 시간 문제였다.
우리와 협력하던 캐나다 선교사들도 한신과의 협력에 더 따끔하게[5]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신’의 본격적인 건설은 소망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