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
“서론”이 길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리고 요구 조항만을 적어 본다.
①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데모는 주권을 뺏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외친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1]며 불의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민족 정기(正氣)의 표현이다.
②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使嗾)[2]로 보는 것은 고의의 이곡[3]이며 학생들 정의감에 대한 모독이다.
③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데모에 나선 학생들에게 총탄과 폭력을 기탄없이[4] 남용하여 공전[5]의 민족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자유와 민주를 기본으로 한 대한민국의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私兵)이다.
④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 민권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한 현 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⑤ 3ㆍ15 선거는 부정선거다. 공명한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을 다시 뽑으라.
⑥ 3ㆍ15 부정선거를 조작한 자는 중형에 처하라.
⑦ 학생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와 직접 하수한 자는 즉시 체포 처단하라.
⑧ 깡패를 철저히 색출 처단하고 그 전국적 조직을 분쇄하라.
⑨ 모든 구속된 학생은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설사 파괴와 폭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동료의 피살에 흥분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파괴와 폭동이 그 본의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⑩ 공적지위를 이용하거나 관권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군, 관,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부패와 부정을 방지하라.
⑪ 경찰의 중립화를 확립하고 학원의 자유를 절대 보장하라.
⑫ 곡학아세(曲學阿世)[6]의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⑬ 정치 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⑭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여 이성을 지키고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⑮ 학생제군은 이북의 선전에 이용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종내의 ‘반공’ 명의를 도용하는 방식으로 제군이 흘린 피의 댓가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 선언문은 정석해[7]를 의장으로, 이종우(李種雨)[8]가 기초하여, 토의 수정한 것을 이항령[9]이 낭독한 것이며 권오돈[10]의 만세삼창으로 마무리된 것이었다.
나 자신은 서울 시내에서 20리 외따로[11] 있는 수유리의 화계사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에 소식도 몰랐고 ‘교수단’ 모임도 물론 몰랐다. 알았댔자 그 당시의 신학교 교수란 성명이 없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데모 날에사 알고 시내에 들어갔다. 동대문 가까이서부터 교수단 행진 대열의 옆변두리 보도를 같이 걸었다. 학생들의 교수단 옹위[12]와 그 존경도는 대단했다.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시청 앞 광장은 Sit Strike 학생들로 초만원이었다. “민주국가 건설하라”, “매판자본[13] 물러가라” 등의 프랑카드를 들고 나서는 학생들은 시민에 비하여 얼마나 ‘선각자’인가를 나는 맘 깊이 느끼며 스스로 머리가 숙여졌다.
고대생 선배인 이철승이 인촌 김성수의 ‘장기전’ 유훈을 발표하고 고대생에게 해산을 권고했다. 고대생들은 일어나 대열을 지어 학교로 행진한다.
시민들은 이미 흩어져 제각기 자기 집 가기에 바빴다.
바로 그날 밤이었던가 나는 수유리 신학교 마당에 서 있었다. 횃불을 휘두르며 고함치는 찝차부대가 수유리 신작로로 몰려든다. 의정부 최인규 집을 부수고 그를 잡아낼 계획이었단다. 가는 길에 수유리 파출소도 불에 삼켜졌다. 의정부의 최인규[14]는 벌써 어디론가 도망쳤고 그의 호화 주택만 액운을 당했다. 그가 내무장관이었으니까 당할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튿날 또 시내로 간다. 미아리 고개길에서 찝차탄 데모대를 연방 만난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열(高熱)에 들떠 미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시내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은 태풍 후의 지저분한 검부러기[15]들을 말끔하게 청소한다. 질서도 정연했다. 관제 폭력단의 만행만 없었더라면 학생들의 희생도 덜했을 것이고 시민생활의 정상화도 비교적 순조로웠을 것이 아닐까 싶다.
서소문 밖 독립문 가는 길에서 시민 대열에 끼어 같이 걸었다. 이기붕 집앞에서의 소동을 목격했다. 정동 대법원 앞에서 “선거소송 속히 판결하라”고 고함치는 일부 데모대에 섞이기도 했다. 종로 중앙청 사이 길에서 ‘의전’ 학생들이 흰 가운차림으로 부상 데모원들을 병원에 운반하는 광경을 봤다. 성스러운 얼굴들이었다.
동아일보나 외국기자들의 찝차가 나타나면 환성을 올리며 그들을 환영한다.
1960년 4월 26일
미국 주한 대사관의 마카나키[16]는 아래와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본 대사관은 이 나라 국민의 갈망을 심심한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국민도 동조해야 한다.
당국은 국민의 정당한 불만에 응답할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 정의를 선양하고 솔직하고 철저한 해결책을 취해야 한다. 미봉책을 쓸 시기는 지나갔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권고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서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진 치안과 질서유지를 담당하여 평온하게 공백기를 극복했다. (학원사 발행 4ㆍ19 기록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