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
1965년 6월 – 박 정권은 미국의 사주에 따라 급속도로 일본에 접근한다.
김종필이 몰래 가고 오고 하면서 ‘오오히라’(太平)[1]와 저두외교(低頭外交)[2]를 벌인다고 한다. 그래서 소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이 학원과 민간에서 날마다 격화되어 갔다.
1965년 7월 1일이었던가, 시내 각 교파를 망라한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영락교회 안에 모여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한경직, 김재준, 이태준[3] 등 불과 6, 7명이 모였었으나 차츰 그 수가 불어 시내 각 교파 교직자로서 가담하지 않는 분은 거의 없었다.
신학적인 차이나, 세대차, 교파별 등도 문제되지 않았다.
수백 명의 목사, 전도사, 문인, 재향군인, 장교 등 각계각층이 ‘일체화’했다. 회의진행 절차도 없었다. 다들 모여 오순도순 얘기하다 보면 제절로 합의되곤 했다.
결국 성명서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국회의장, 일본정부, 일본국회, 일본교회, 미국대통령, 국제연합본부 등등에 보낼 공개 서한들을 기초할 위원회가 지명되어 김재준 책임하에 모든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것이 검토 채택되었다.
그리고 마감으로 영락교회에서의 공식예배 설교시간에 대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집회허가 없이 강연하려면 교회의 기도회나 예배 형식을 취할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집회는 초만원이었다. 연사는 한경직과 나였는데 한경직은 예배 설교에서, 나는 특별 강연에서 우리의 반대 이유를 밝히려 한 것이었다.
성명서에서 우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화 이전에 우리의 태도와 각오와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① 넘치는 저수지 물이 출구를 찾는 것과 같은 ‘일본 자본’이 한국에 범람하는 경우에 한국은 일본 자본의 ‘수몰지대’(水沒地帶)로 화할 우려가 크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는 정상화 이전에 강한 견제력을 가진 외자도입법과 관리법을 제정해야 한다.
② 일제 36년간의 한국 착취와 병탐에 대한 사과의 배상과 금후 행동에 대한 다짐을 받고서 회담을 개시해야 한다.
③ 강력한 독립정신으로 국산 장려와 국가 이익 보호의 국민운동을 전개하도록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등등을 제안했던 것이다.
일본 교회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침략자의 위치에서 돌이켜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 선린(善隣)[4]의 정부로 될 수 있게 제언, 편달, 투쟁해 줄 것을 호소했다.
내 강연에서 강조한 것은 일본이 일로전쟁[5] 이전에, 39도선으로 한반도를 분단하여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사실과 러시아가 이에 불응하자 일로전쟁 준비에 광분했던 사실을 말하고 다음으로 일본은 지금도 침략 야심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군사, 정치, 경제의 순차적 지배라는 종전의 순서를 경제, 정치, 군사의 역순서로 진행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금후의 한국은 미국 자본 아래 있는 중남미와 비슷하게 그보다도 더 나쁘게, 일본 경제 침략의 제물이 될 공산이 크다고 경보[6]했다.
그날 밤 한경직의 설교는 대일 감정의 노골적인 폭발이랄 수 있는 웅변이었다.
그는 만 명 가까운 청중을 울리며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냉소적이었고 김종필은 태평(오오히라)과의 비밀회담을 급속도로 성숙시켜, 일본의 사과(謝過)는커녕, 제발 국교를 열어주십사고 애걸복걸하는 태도로 나왔다고 한다. ‘고조오’(小僧) 같이 냉대를 받으면서 빌붙었다는 것으로 ‘굴욕 외교’ 딱지가 붙은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자기들의 ‘지방정부’ 정도로 아는 모양이었다.
우리 반대 운동에 동참했던 소장 목사들 중의 일부는 계속 따로 모여 가두 데모에도 수차 나섰기 때문에 연행도 되었었고, 그 후에 ‘정치 교수’ 또는 ‘정치 목사’로 딱지 붙어, 문교부로부터 파직 선고를 받게 된 교수도 있었다. 한국신학대학의 전경연[7] 박사 같은 이가 그 일례였다.
학생들의 데모는 치열했고, 경찰과의 투석전도 빈번했다.
어느 날 박정희는 청량리 쪽으로 가는 도중 사범대학 앞을 지나게 됐다. 그때는 사범대학 학생들과 경찰과의 승갱이[8]가 최고도에 치솟은 순간이었다. 경찰의 최루탄 공세와 학생들의 투석 항거가 격전장을 연상케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학생들의 돌멩이가 우연하게도 박 대통령의 찦차 옆구리를 때리게 됐었다 한다. 발작적인 박 대통령은 다짜고짜 찦차에서 뛰어내려 교정으로 달려간다. 대통령 ‘각하’가 들어오신다는 급보에 교장 이하 모든 직원이 뛰어나가 환영 대열에 ‘차렷’ 했다.
교장이 경례를 붙이자, “이 자식 네가 교장이냐?” 하는 금속성 욕설과 함께 ‘각하’의 손은 교장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이것은 한 교사의 목격담이다.
그리고서 그는 혼잣말 같이 “학생놈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며 이를 악물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생긴 소위 ‘사립학교 법안’[9]이란 것은 이런 그의 복수심에서 안출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