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잔치
1971년 쯤 나는 몸이 몹시 쇄약[1]해 있었다. 기침 때문에 나들이에는 남이 민망할 정도였고 기침 날 때마다 담[2]을 뱉아야 했으니 옆엣 사람이 기분좋을 리 없다. 그래도 신문사에는 나갔다.
기침약이라고 무시로[3] 먹으니 위가 실증[4]을 낸다. 식욕이 아주 없어진다.
결국 쇄약[5]만이 는다.
캐나다에 가 있는 자식들이 내 희년[6]을 기억하고 돈을 모아 이상철 목사가 가지고 왔다. 이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6명의 목사들에게 상담훈련을 시키러 왔다. 큰 사위 신영희[7], 조카 김하용, 막내아들 관용 등이 역시 정성을 모아 융성한 잔치가 됐다. 친구들 한신졸업생들이 많이 모였다. 아카데미하우스에서였던 것 같다.
대한일보사에서 벽시계 하나 근사한 것을 보내왔다.
소변이 잘 통하지 않아서 피에 독이 섞여 돈다. 낯[8]이 황달[9] 들린 것 같이 된다.
나는 하루 저녁 시내 여전도사들, 우리 졸업생 목사들, 기장 기관의 여러분을 “크리스천아카데미”에 초청하여 “디너파티”를 열었다. 나 자신은 한 입도 먹지 못했지만, 무언가 예수님의 최후만찬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상철 목사가 그때 마침 귀국해 있었기에 가족대표로 답사도 하곤 했다.
신문사 분들은 따로 딴 날에 ‘뉴코리아’ 호텔 라운지 식당에 초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