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과 나
주역[1]에 ‘하늘과 땅과 내가 서로 같아졌다’란 구절이 있다.
내가 거처하는 방은 맨 아래층이어서 여름 더운 줄 모른다. 들창 커텐을 제쳤더니 화끈 햇살이 들이닥친다. 오늘은 진짜 여름인가보다. 계곡의 바위틈을 굴러내리는 수정같이 맑은 물줄기를 오르내리던 소년 시절이 그리워진다. 아내는 옷까지 갈아입고 “쇼핑”도 할 겸 나가자고 서두른다.[2] “쇼핑센터”에서 모색이를 돌며는 막다른 골목이 깊숙한 계곡에서 끝난다. 사닥다리 계단을 내려가면 꽤 큰 개천이 자갈 밭 위를 어루만지며 간다. 금년들어 여름 볕 첫날이다. 물이 맑길래 발 잠글 욕심으로 맨발이 됐다. 그러나 께름해서 잔디만을 밟기로 한다. 여기저기 하수도 물이 합류하기 때문에 개천은 “맑아도 더러울” 거라는 나의 결벽성 때문이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도연명[3]은 “魚父(어부)”의 입을 빌어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흐렸거든 발을 씻어 세상과 흐름을 같이할 것이지 뭐 그리 도도하게 고결하냐”는 나무람을 듣는다.[4] 그때 창랑의 물은 흐렸어도 오늘 여기를 흐르는 이 맑은 개울보다 깨끗했을 것이다.
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잔디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푸름이 숨쉬는 흙향기가 몸에 배인다. 뜨겁던 해도 얇은 구름 속에서 형광등처럼 보드랍다. 언덕을 덮은 숲 위를 흰 갈매기 두세 마리 날아온다. 잔디, 갈대, 혼자 선 노목, 서로 부축하며 자라는 숲의 억억만 잎사귀들, 흥겨운 생명의 무도장이다.
지금 내게는 하늘과 땅이 한데 어울렸다. 무릉도원[5]이 따로 있을까 싶어진다.
3시에 나왔는데 6시가 됐다. 일어날까 하는데 어떤 아낙네가 동무하는 큼직한 개가 다짜고짜 뛰어와 내 낯을 핥는다. 혓바닥이 산뜻하게 찼지만 친밀 감각이 오히려 고마웠다.
돌아와 목욕하고 시원한 아래층에서 낮잠 잔다. 나 진정 걱정 잊은 은사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