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뻔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내가 바로 20대를 넘어선 때, 함북 경성도청 서기로 있는 내 이질(姨姪)[1]로부터 나진항 토지구매 교섭이 왔다. 어떤 “만철”(南滿鉄道会社)[2] 이사가 나진 개발 설계도를 비밀 입수한 것을 계기로 한 몫 보자는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그는 함북도청에 근무하는 내 이질에게 나진 토지매수를 위임했고 내 이질은 웅기에 있는 내게 부탁했다. 나는 유능한 젊은 나진 친구를 내세워 몇 주일 안에 5, 6십 만평 해변가 억새밭[3]을 헐값에 샀다. 이동증명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거간료[4]도 톡톡히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뭐냐? 팔자에도 없는 토지 거간이나 한 건 해주고 나딩굴어버리느냐? “바보같이!”
그래서 어느 날 그 거간 동료 청년과 상의했다. “나진 뒷산, 널평한 완경사 초장이 ‘유휴 국유지’로 버려져 있다는데 그걸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임대차 계약을 해두며 어떠냐?” 했다. 수속은 그 청년이 맡아서 동장, 구장, 면장 등 관계관서에 벌찐 돌아다녔다. 그래서 계획대로 다 만들어 왔다. 후일에 “불하”[5]할 경우에는 임대계약자에게 우선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불하료도 싸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미 받은 합법적인 거간료를 밑천으로 급행열차처럼 서울 향해 달렸다. 때가 3ㆍ1운동 다음해[6]라, 그 조수가 나를 밀어냈다고도 하겠다.
나는 여름 방학에 돌아왔다. 그 때, 내게는 “돈” 같은 게 문제될 수 없을 정도로 “고매(?)”했다. “돈”은 “금”이 아니고 “똥”이다 하는 식이었다.
나는 귀향하여 경흥읍교회[7]를 예방했다. 위에 언급한 “나진” 청년은 그때 경흥 군청에 취직해 있었다. 그 땅 임대차 명의인을 자기 이름 단독으로 하는데 동의해 달라고 한다. 말하자면 Co-Siginer[8]로서의 내 이름을 빼고 자기 혼자 이름만으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임대료도 자기가 단독으로 납입해왔고 그 액수도 적잖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만한 내 몫을 단번에 추불할 능력도 없었다. “옛따, 먹어라”하고 도장 찍었다. 그날 밤, 그는 푸짐한 술좌석을 마련하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 무렵 백두산 목재 관계로 일약 함북의 재벌 반열에 끼어든 청진의 김기덕[9]이 나진 땅을 매점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이 나진 청년은 그 땅 임대차 권리를 상당한 고가(高価)로 그에게 넘겨줬다. 이 청년은 앉은 대로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 결과로는 주색잡기에 패가망신이란 패가 붙고 말았다.
오랜 후일에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할 나이다. 잠시 “창꼴집”에 들렸다. 아버님께서 물으신다.
“너 뭣 하려느냐?”
“교육사업 하렵니다.”
“일본놈 교육 말이냐?”
“내 나름대로의 교육 말입니다.”
“너 그 때, 계약했다던 나진 땅은 어떻게 됐니?”
“그건 자진 포기했습니다.”
“일 하겠다면서 굴러온 돈을 쫓아버렸단 말이냐? 세상 물정을 알아야 일 할 수도 있을 게 아니냐?”
그리고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허기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액의 “애카운트”가 무조건 내 이름으로 입금된다! 아버님 말씀대로 “행운아”임에 틀림없겠다. 그러나 그 “행복”이 “축복”일지는 의문이다. 십상팔구는 나를 빠지게 할 “함정”이었을 것이다. “은혜”란 빈 마음에 돌입하는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고생하며 일하는데 “은혜”가 있다.
[1981.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