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주님에게로 가자
1981년 4월 26일 / 마태복음 28장 16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갈릴리로 가신 주님
민중을 신뢰할 수 있는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는 정치연극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사이비 야당을 만들고 있었다. 민한당 등등이 그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창당위원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통보도 했다는 소문이 넓게 퍼졌다. 정치활동을 중단당했던 정치인들이 정치의 장으로 타율적 호의(?)에 힘입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무엇 때문에 저 흉악한 부름에 응하는 것인가? 정치가 직업이니,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인가? 제법 주장하는 바도 있었다. 오늘의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부정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정당, 민한당, 국민당이 당선자를 냈다. 당이 서로 달라도 모두가 끼리끼리다. 출마자들이 미웠다. 이제 대통령 선거다. 체육관 선거인데 전두환이 당선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각본이었다. 그런데도 들러리 후보들이 나선다. 텔레비전 유세를 한답시고 얼굴에 분칠을 하고 화면에 등장했다.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호소(?)한다. 분노가 치밀었다. 저 놈의 놀음을 전두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둘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 저 추한 들러리 노룻을 물리칠 수 없었단 말인가? 경쟁 가운데서 선택된 전두환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저 더러운 짓거리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두환, 유치송 등에 있지 않다.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저들에게 문제의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다. 민중이다. 민중이 선거 놀음 동원에 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 민중이여! 우리의 싸움은 당신들과 함께, 당신들의 자유와 정의를 세워내자는 것 아니요? 이렇게도 맥없이 불의한 세력에 끌려다니고 동원에 순순히 따라 준단 말이요!
마침 부활주일이 왔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은 민중의 동원된 요구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민중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지 않았던가9 예수의 절망과 배신감이 우리의 그것에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다시 민중에게 갔다. 아,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여!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그렇다. 그것은 또다시 유권자에게, 민중에게 감이리라. 예수께서, 부활의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셨으니….
[말씀을 향한 물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자칫 공허한 외침이 되기 쉽다. 부활하셨다면, 죽어계시지 않고 지금 살아계시다면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부활하셨다고만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공허한 외침이다. 주님을 지금 만나고 있는가? 어디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주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이 마가복음의 경우 마지막 증언이었다. 물론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입장이다. 같은 공관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는 것과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전함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우선 갈릴리로 가셨다는 전통을 따른다.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갈릴리 사람들에게로 가셨다는 것이며 갈릴리 사람들이란 바로 예수를 배척했던 장본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엊그제까지 호산나를 부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지나가시는 것을 환영했던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 뒤를 좇아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마침 지난 부활주일 밤에 텔레비전에서 “수난의 금요일”이라는 영화를 방영했는데 거기 보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일단의 갈릴리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여 잠입하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대세가 기울어지자 자기들의 입장을 쉽게 바꾸어 버렸다. 아무래도 빌라도, 대제사장 패가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 분명했었다. 가야바 일당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되었다. 급기야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려 했을 때 거기 맞장구를 쳐서 여론을 형성해 주는 빌라도 패가 되고 만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 십자가 처형을 내려야 한다고 빌라도의 정치놀음에 발을 맞추고 있었다. 배반자들이요 배척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를 배신한 그 갈릴리 사람들에게 가셨다는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거기,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역시 “너희도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나를 만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활주일을 막 보낸 우리, 주님을 과연 만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부활절을 기념한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부활이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공허한 일이 되고 만다.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어디서 만날 것인가? 역시 갈릴리로 가야 한다. 주님은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주일 나는 “갈릴리로 감”이 부활이라고 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제자들에게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배반자에 대한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래, 가자.” 이렇게 간단하게 가게 되었을 리가 없다.
오늘 성서 본문에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갔다”라고 단지 열 한 자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깊이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참으로 진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갈릴리는 무슨 놈의 갈릴리야?’ ‘십자가에 못박으라던 그 아우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그놈들이 있는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 웬말이야?’ ‘그깐 놈의 갈릴리 놈들 죽든 살든 상관할 것이 무엇이란 말이야?’ ‘억눌리든 빼앗기든 개, 돼지처럼 살든 우리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지긋지긋하지도 않는가? 또 갈릴리로 가자는 것일까?’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방 대세에 편승하는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의 배반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갈릴리로 갈 수는 없다. 도대체 갈릴리로 왜 가라는 것인가?’ ‘예수도 그렇지 갈릴리는 왜 가신다는 것인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감”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 -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희가 주님을 만나려 하느냐? 그러면 갈릴리로 가라. 주님은 벌써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이 부활의 메시지다. 세속적인 표현을 쓰자면 “민중에게로 감”이 부활 신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민중은 배반자만 같다. 어제까지 정의의 편에 서던 민중이 갑자기 불의의 세력을 용납해 버린다. 아니, 용납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제까지 박수를 치던 민중이 오늘은 갑자기 돌맹이를 집어 던진다. 나찌의 히틀러도 국민 투표를 했다. 집권 초기에는 60% 정도 지지이던 것이 악정을 더해가던 말기에는 지지율이 더 높아져 거의 100%의 지지를 획득했었다. 민중의 짓이다.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자기들 민중의 죄를 뉘우쳐 “침묵한 죄”를 뉘우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침묵하지도 않는다. 어제는 청색 깃발, 오늘은 노란 깃발, 차라리 침묵이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깃발을 흔들고 법석을 떤다. 역시 민중의 짓이다. 강제로 시키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강제건 자진해서이건 침묵조차 팽개치고 적극적인 박수 부대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만히나 있지, 소리를 높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던 저들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쉽게쉽게 등을 돌려대는 민중을 경험할 때 제자들이 가졌던 갈등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무엇 때문에 민중에게 가라는 것인가? 주님은 왜 가라 하시는가? 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이것을 위하여 가라는 것이다. 회개다. 역사의 구원이란 민중이 회개하는 데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곳에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 보았자 효용이 없다. 결국은 민중이 깨어야 한다. 민중이 바로 보고, 바로 서고, 바로 가게 되어야 한다. 민중이 바른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힘에 굴복하여 선악을 바꾸지 않는 민중이 되어야 한다. 대세가 기울었을지라도 편승하지 않고 옳은 것을 지켜 나가게 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민중 스스로가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또 언젠가는 죽어도 끝까지 정의는 정의고 불의는 불의라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라도 불사하고, 고난과 죽음이라도 피하지 않고 바로 서는 민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이것이 민중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를 받는 것이다.
예수는 왜 제자들을 갈릴리로 가라 하셨는가?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으로 살려내 보자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 바로 설 때 역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에겐들 야속함이 없었겠으며 예수에겐들 미움의 감정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란 바로 그 야속함이나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민중이 바로 서야만……”이라는 것을 깨달은 예수의 깨달음의 깊이에 합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이다. 우리는 민중이 아닌가? 우리는 회개할 사람이 아닌가? 우리 역시 민중이다. 우리가 바로 서야 한다. 빌라도에게 편승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힘에 굴복하여 선악을 흐트러 놓았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폭력을 용납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바로 서야 한다. 바로 서는 것 - 이것이 세례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설 때 비로소 이 역사가 구원받을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는 왜 갈릴리로 가셨는가? 아니, 부활하신 예수는 왜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것일까? 우리를 회개시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바로 서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세상을 탄식하지 말아라. 지금 이 세상을 냉소하지 말아라. 지금 이 세상을 개탄하지 말아라. 이 세계는 바로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신앙으로 굳게 섬으로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잡히게 된다. 민중을 일으켜 바로 세우고 또 우리 스스로 바로 서는 이 이중의 소임을 우리는 맡고 있는 것이다. 한 민중으로서 나를 바로 세우고, 교회로서 민중을 또 바로 세워놓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예수가 계속하여, 갈릴리로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은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이다. 예수는 왜 갈릴리로 가셨나? 민중을 훈련하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은 선이요 사랑이다. 정의요 자유다. 인권이요 진실이다.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할 민중이다. 선할 수 있는 훈련, 사랑하는 훈련, 정의에 서는 훈련, 자유하는 훈련, 인권과 진실을 위해 싸우는 훈련,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훈련, 십자가를 지는 훈련, 고난을 극복하는 훈련 -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할 민중이다. 그렇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오셨다. 왜? 무엇하러? 훈련시키시려고 오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훈련시키면서 또 나아가 민중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이중의 소임을 맡고 있다. 이 백성을 훈련시켜야 한다. 여러분은 교관이다. 여러분은 선생이다. 가서 가르쳐라. 주님의 말씀, 주님의 명령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 이 민족에게 수없이 오고 있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은 누구에게 준 것인가? 회개하고 훈련하는 사람들에게다. 악에 도전하는 제자들에게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다. 아무에게나 값없이 싸구려로 주는 말씀이 아니다.
여러분,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을 믿으라. 무서워하거나 위축될 필요가 없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을 믿으라.
주님은 부활하셨다. 갈릴리에서 일하신다. 우리 사이에서, 저 배척의 상징인 민중 사이에서 일하시고 계신다. 거기 가서 주님을 만나자. 죽으신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