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다.
1981년 4월 19일 / 마가복음 16장 1-8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갈릴리로 가신 주님
민중을 신뢰할 수 있는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는 정치연극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사이비 야당을 만들고 있었다. 민한당 등등이 그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창당위원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에게 일일이 통보도 했다는 소문이 넓게 퍼졌다. 정치활동을 중단당했던 정치인들이 정치의 장으로 타율적 호의(?)에 힘입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무엇 때문에 저 흉악한 부름에 응하는 것인가? 정치가 직업이니,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인가? 제법 주장하는 바도 있었다. 오늘의 폭압적이고 독재적인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부정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정당, 민한당, 국민당이 당선자를 냈다. 당이 서로 달라도 모두가 끼리끼리다. 출마자들이 미웠다. 이제 대통령 선거다. 체육관 선거인데 전두환이 당선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각본이었다. 그런데도 들러리 후보들이 나선다. 텔레비전 유세를 한답시고 얼굴에 분칠을 하고 화면에 등장했다.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호소(?)한다. 분노가 치밀었다. 저 놈의 놀음을 전두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둘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 저 추한 들러리 노룻을 물리칠 수 없었단 말인가? 경쟁 가운데서 선택된 전두환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저 더러운 짓거리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두환, 유치송 등에 있지 않다.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저들에게 문제의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다. 민중이다. 민중이 선거 놀음 동원에 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 민중이여! 우리의 싸움은 당신들과 함께, 당신들의 자유와 정의를 세워내자는 것 아니요? 이렇게도 맥없이 불의한 세력에 끌려다니고 동원에 순순히 따라 준단 말이요!
마침 부활주일이 왔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은 민중의 동원된 요구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민중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지 않았던가9 예수의 절망과 배신감이 우리의 그것에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다시 민중에게 갔다. 아,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여!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그렇다. 그것은 또다시 유권자에게, 민중에게 감이리라. 예수께서, 부활의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셨으니….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임을 고백한다. 이 신앙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이 부활을 재확인 하는 이 날에 우리는 무엇을 다짐할 것인가? 부활하신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는가? 그리고 이 나라의 역사에서 갈릴리는 어디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주님께서는 사셨다. 죽임을 당했으나 죽음이 그를 삼킬 수가 없었다. 악한 자들이 그를 정복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완전히 상식을 무시한 이 신앙이 오늘날 온세계에 울려퍼지고 있다. 완전히 무식한, 말도 안 되는 소식이 지금 온세계에 퍼져 있다.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사형수 예수가 무덤을 깨뜨리고 살아났다.” 나는 “완전히 상식을 무시한”이라는 말을 썼고 “완전히 무식한”, “말도 안 되는 소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실 많은 사람은 그렇게 여기고 있다. 심지어 신학자 중에도, 아니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조차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라거나 제자들의 신앙이 만들어낸 신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8, 19세기의 복음서 연구의 흐름은 그랬다. 20세기에 와서도,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고자 해도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막아서 있다는 주장들이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납득할 수 있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시작하는 오늘의 신학은 부활신앙을 확고하게 붙드는 경향으로 확연하게 흐르고 있다. 죽으셨던 그 예수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라는 이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모태요, 기독교의 출발이요, 이 신앙 없이 기독교는 결코 설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지금 신앙하고 있느냐는 근본적인 결단을 현대신학은 묻고 있다. 이 신앙을 논란하는 것은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이 신앙을 하지 못하는 신앙인은 패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뿐이다. 이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요 한 사귐의 집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의 사실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믿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단 부활을 신앙하기에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며 주님의 부활을 다시 확인하는 이 날에 우리는 무엇을 다짐할 것이냐를 물어야 할 뿐이다.
새번역 성서에는 마가복음 16장 8절과 9절 사이의 행간이 다른 곳보다 넓다. 이것은 원래 마가복음은 16장 8절까지였는데 9절 이하가 오랜 후에 첨가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2세기 이전의 성서 사본에는 9절 이하는 없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으신 선생님의 몸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해 보니 벌써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다. 시체는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거기 무덤에 있던 흰 옷 입은 청년 한 사람이 너희가 예수를 찾지만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마가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기록한 것 전부였다.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로 가실 것이고 거기에 가서야 그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누구나 갈릴리로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야 사랑하는 주님, 죽으셨을 때 그렇게도 원통했던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생전에 내내 갈릴리에서 생활하셨다. 갈릴리에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갈릴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는 부활하셔서 다시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갈릴리의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을 말한다. 갈릴리의 사람은 누군가? 억압받는 민중이다. 복음서에서 갈릴리는 버림받은 땅, 민중의 애환이 있는 곳으로 이해되어 있다. 경쟁에 밀리고 밀린 사람들이다. 병자요 무식쟁이다. 먹고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서민들이있다. 창녀요 날품팔이다. 권력자의 억압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못난이들이 있다. 배운 사람에게 속아 이것저것 다 빼앗긴 졸장부들이 있다. 이들이 갈릴리의 사람들이다. 이 나라 역사에도 갈릴리 사람들은 있다. 봉건사회에 눌려 있던 이 나라의 민중들, 주인 따라 묘혈에까지 묻혔던 종들, 상놈들, 그들이 있었다. 일제의 침략에 수탈당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독재에 억눌려 신음하고 근대화에 정조도 땅도 빼앗겨버린 민중들이 있다. 우리에게도 갈릴리의 사람들이 있다.
갈릴리의 사람들은 또 누군가? 모든 비인간화의 힘에 도전했던 민중이다. 예수의 관심의 표적이었던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에 가실 때 그들은 겉옷을 벗어 만세를 불렀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스크럼을 짜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시위를 벌였다. 예수에게 끝없는 환성을 질렀다. 이제 자신들도 역사의 대열에 선 것을 선언하는 양 환성을 올렸다. 로마의 관헌에게, 율법학자, 장로들에게 맡겨놓았던 역사를 이제 스스로 형성해 가겠다는 주체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다. 예수에게서 빛나는 희망의 불빛, 정의의 냄새, 사람의 훈기를 느끼고 그에 반하여 둑터진 물처럼 쏟아져 몰렸던 이들 -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본다면 1894년 전라도 고부 땅에서 일어난 봉기의 주인공, 동학의 주인공인 농민들이 그들이다. 1919년 3ㆍ1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 땅을 그 함성으로 덮어 씌웠던 민중들이다. 1960년 4ㆍ19일 학생들의 의거에 물을 날라 마른 목을 축여주고 피를 뽑아 수혈을 자청하던 민중, 함께 시위대열에 섰던 민중 - 그들이 이 땅의 갈릴리 사람이다. 1979년 10월, 그렇게도 기다렸던 정의의 시대, 양심의 시대, 폭력이 아닌 평화의 시대를 소망하여 기대와 조용한 열망으로 반년이나 참아오던 그들이다. 그들이 이 역사의 갈릴리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방금 예수께서 경험한 갈릴리인은 누군가? 배척과 배반의 민중이다. 바로 엊그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던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은 누군가? 그들은 곧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가지를 꺾어 환호를 쳤던, 그러나 엊그제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던 바로 그들 자신이다. 배척의 장본인, 예수에게 등을 돌린 장본인, 어느새 장로, 서기관들과 한통속이 되어버린 그들이 갈릴리인이다. 어느새 로마의 총독과 하나가 되어 자기들의 지도자를 저버린 배반자들이 갈릴리인이다. 시세, 형세를 판단하여 자기 스승조차 부인하고 안일로 들어 앉아 양심을 속이는 저들, 저들이 갈릴리인이다.
우리의 역사는 갈릴리인, 배척과 배반의 사람들에 의하여 수백번 곤두박질을 해오고 있다. 동학 이후, 3ㆍ1 독립운동 이후가 그랬었다. 몸을 던져 독재에 항거했던 자유와 정의의 혼, 그들과 함께 이 나라를 정의 위에 세우겠다던 민중들은 5ㆍ16 군사 쿠데타 후 독재를 용납함으로 예수시대의 갈릴리인들처럼 저 4ㆍ19의 희생자들을 배반하고 말았다. 이들이 오늘 이 역사의 갈릴리인이다. 10ㆍ26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이제는 명실공히 폭력의 시대를 보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보자, 억압의 시대를 보내고 양심이 편안한 시대를 열어보자, 이제는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만드는 민중의 시대를 열어보자고 서로 다짐하던 민중들은 지금 어찌하고 있는가? 폭력을 용납하고 양심을 배척하면서 또다시 꼭두각시로 전락해 가고 만 것이다. 또다시 배척의 민중, 배반의 사람 – 갈릴리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 죽음을 이기신 그는 어디에 계신가? 하늘? 옥좌? 아직은 아니다. 그 배척의 민중에게 다시 가시고 있다. 그 배반의 사람들에게 다시 가셨다. 갈릴리 사람,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하는 그들에게 가셨다. 부활은 무엇이냐? 그 갈릴리인에게 갈 수 있음이다. 배척한 그들에게, 배반한 그들에게, 어느새 등을 돌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저들에게 갈 수 있음이다.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갈릴리로 갈 수 없다. 그들이 밉고 그들이 무섭기 때문이다. 배신과 모멸감 때문에 그들에게 갈 수 없다. 패배와 냉소 때문이다. 누가 또 다시 가는가? 주님이다. 부활하신 주님이다. 누가 또 다시 갈 수 있는가?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분명히 믿는 제자들이다.
오늘 우리의 형편에서 부활절은 무엇인가? 갈릴리로 다시 가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거기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배척하는 민중일지라도, 배신의 민중일지라도 주님은 거기 다시 가셨다. 우리도 민중에게 다시 가야 한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더라도, 모든 것이 다 좌절되어 버린 것 같더라도, 부활의 대열에 서자면 갈릴리로, 민중에게로 가야 한다. 그들이 살아나지 않고는 역사의 부활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좇아 갈릴리로 다시 가야 한다. 5ㆍ16에 죽은 민중, 5ㆍ17에 죽은 민중이 살아나지 않고는 이 역사에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갈릴리로 갈 것을 다짐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담을 헐고 배반의 민중에게로 나갈 것을 결단해야 한다. 갈릴리로 가신 주님을 무겁게 만나지 말자. 기쁨으로 만나자. 승리의 주님이시다. 이제 갈릴리로 가신 주님을 만나고자 이 성찬의 자리에 모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