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10-12] 부러워할 낙원 – 1980년 12월 21일, 김상근 목사

부러워할 낙원

1980년 12월 21일 / 말라기 3장 10-1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 얼음을 녹이는 불씨

강압정치는 계속되었다. 더욱 폭군화되어 가는 정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도 같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체육관에 통대(統代)라는 꼭두각시들을 모아 놓고 선거극을 연출하여 스스루 최고권력에 오른 것이다. 교회의 전천후 지도자들이 나서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축하 조찬기도회라는 망측스런 일을 저지른다.

최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이른바 언론기관을 통폐합한답시고 이리 붙이고 저리 떼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했다. 보안사 지하실이 공장이었다. 거기로 불려간 언론사 사장들은 지체없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기독교방송은 일반 보도기능을 박탈당한다. 설교하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선교방송의 영역을 넘는 것이니 허용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중에 한국신학대학만이 유난스럽게 반정부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학교의 설립자인 한국기독교장로회(基長) - 이렇게 삼위가 하나로 뭉쳐 정의투쟁을 하는 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이었을게다. 정부는 한신대 신학과 신입생 모집을 2년간 중지시킨다.

불교에도 손을 댔다. 승려 백수십 명을 연행하였다.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고 승적을 박탈하기도 했다. 불교도 대책없이 수모를 감수했다.

정치인에게도 강제의 손을 댔다. 정치규제자를 발표하여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비 야당,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민주한국당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되고 연루당한 민주인사들은 20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세계가 일어나 김대중의 사형집행을 막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국내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김대중 구출활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문전박대였다.

참으로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수도교회는 새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당시 1억 1천만 원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지금 이만한 돈으로 교회당을 짓는 것이 우리의 제1순위 과업일까? 시작한 일이고 중단할 수 없어 끝내고 말았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이것은 시대의 빚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의 목표를 위한 수단임을 설교해야 했다.

모두가 지치지 않을 수 없는 터에 어떻게 또 무거운 설교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지치고 피곤한 백성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강절이다. 위로가 있으나 정의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교인들을 나는 열망했던 것이리라.


[말씀을 향한 물음]

퍽 막연한 말이지만 ‘낙원’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춥고 배고픈 자들의 가냘픈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집과 불신에 시달린 영혼의 한숨일지도 모르겠다. 또 그것은 미움과 싸움에 지친 사람들의 기도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많으나 서로서로 홀로 버려져 있는 현대인들의 영혼 속에는 낙원을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 같다. 낙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슬라이드]

얼음을 녹이는 불씨

1980년, 모든 것을 삼켜버린 차가운 시대

자랑이 아닌, 시대의 빚 : 지치고 피곤한 백성들 앞에서, 교회는 이 무거운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성탄절이 던지는 네 가지 질문 :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본질의 상실과 회복 : 타락한 성전 vs 성서적 십일조

십일조의 4대 원리 : 고인 물이 아닌 생태계의 순환

십일조는 성전 유지비나 경상비가 아니다. 이 세상에 하나가 되는 일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

내 삶의 예산, 그 단호한 재편성

부러워할 낙원

얼음을 녹이는 불씨


[설교 전문]

어느 해나 성탄절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리나 상가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의 등장이다. 꼭 그것이 성탄 때에만 나오는 것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딘지 흐뭇하고 인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올해에는 유난히 자선냄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나의 증언은 쉽게 우리 눈에 들어오는 네 가지 것들에서 시작된다. 첫째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다. 우리는 이제 주일로서는 마지막 대강절 예배를 드리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고대하고 기도하는 데 우리의 정성과 온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적선을 구하는 자선냄비다. 우리의 개인생활에서도 1년을 정리하고 새해의 삶의 골격과 성격을 다듬어야 하는 그런 시간에 놓여 있다. 셋째는, 교회의 건물이다. 교회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전 건축을 위하여 모든 일을 뒤로 미루어 온 편인데 이제 성전도 완공되었다. 과연 이 교회가 어떤 도약을 해야 할 것인가? 넷째는, ‘주정헌금 작정서’라는 한 장의 종이다.

지난 주일 81년도의 목회지침을 제직회에서 검토했다. 거기에 교인들이 “선교를 위해서도 헌금할 수 있도록 선교적 헌금정신을 높인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을 검토한 직후 한 집사님이 지금 81년도 주정헌금을 정하고 있는데 처음 정할 때부터 무언가 지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출했다. 나의 오늘 증언은 바로 이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는 1977년 10월부터 시작하여 1980년 9월까지 만 3년 동안 성전 건축헌금을 해서 1억 1천만 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모았다. 실로 이 액수는 막대하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돈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이 자랑이면서 동시에 ‘이것은 빚’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성전을 짓는 일도 우리가 꼭 해야만 했던 일이었지만 1억 1천만 원을 모아놓고 꼭 해야만 했던 일이 성전 건축만이었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마 이 시대, 우리의 여건 속에서 1억 1천만 원으로 해야 할 일은 성전 건축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많은 돈을 모으고서도 성전 건축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해낼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 다른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빚이라는 것이다. 이 성전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빚입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겨울이 되어 난방을 가동시켜 보니 더욱 그렇다. 참 좋긴 하지만 …… 이제 우리 교회는 무언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를 위해서 일을 하고 돈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가계부를 정리해보면 아마 많은 집들이 적자였을 것이다. 적자가 아니었다면 아등바등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런 생활이 1980년에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많이 번 해는 많이 쓰고 적게 번 해는 적게 쓰고 살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는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모두가 같다. 요컨대 나서 죽을 때까지 꼭 그렇게만 살 것이냐는 질문을 저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가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또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 같은 물음은 절실해진다

우리에게는 ‘헌금’이라는 훌륭한 의식이 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우리 기독교가 이 헌금의식이 가장 잘 개발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고 계시다는 매우 초보적 신앙에서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재물뿐 아니라 내 몸도 드리겠다는 헌신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을 만큼 발전되어 있다. 우리 교회에서 ‘헌금’ 순서를 ‘봉헌’이라 한 것은 ‘헌금’은 돈을 바친다는 기분이 있고 ‘봉헌’이라 하면 돈뿐 아니라 나 자신, 우리의 재능, 시간 등 돈 아닌것도 드린다는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주정헌금을 작정한다는 것은 이 같은 신학과 신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인상이니 예산에 맞추느니 하는 계산보다는 신앙적인 태도가 더 필요하다. 올해에는 예산을 세우지 않은 채 헌금 작정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는 심정으로 주정헌금을 작정하고 매주일 챙겨 가지고 나오느냐 하는 것과 교회는 그것을 제대로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나는 십일조 제도에 대하여 말씀드림으로써 위의 세 가지 아름다운 성전, 자선냄비, 주정헌금 작정서가 던져주는 문제의 해결을 찾i자 한다. 우리 교회에도 십일조를 바치는 분이 간혹 있는 것을 본다. 대단히 고맙고 훌륭한 일이다. 어느 교회나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수입의 십분의 일은 교회에 내야 한다는 뜻이다.

십일조에 대한 4가지 대목이 성서에 있다. 첫째로, 십일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거룩한 것이다”(레 27:30).

여기에는 무슨 조건이나 논리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일 뿐이다.

둘째로, 십일조는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먹고 즐기는 것이었다.

“너희는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 그 곡식과 술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맏배와 함께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그를 모시고 먹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너는 너희 하나님 야훼를 길이 공경해야 할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그 돈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사서 먹으며 즐겨라 …… 너희 하나님 야훼를 모시고 너희와 너희 온 집안이 먹으며 즐겨라”(신 14:22-26).

함께 먹고 즐기는 그것으로 하나님 공경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논리다. 이 때나 저 때나 다 각각 제 일에 몰두하다보면 각박해지고 메말라져 버린다.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 맛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일조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십분의 일을 따로 떼어 놓았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먹고 즐기라는 것이다. 각박한 너희 사이에 훈풍을 일으켜라, 메말라진 너희 삶에 윤기가 돋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것이라는 신학이다. 함께 먹고 즐길 줄 모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십일조는 왜 하느냐9 함께 먹고 즐기기 위해서 한다.

셋째로,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었다.

“야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론은 레위족이다.] ‘너는 이 백성이 차지할 땅에서 그들과 함께 나누어 받을 유산이 없다. 그들 가운데서 너에게 돌아 갈 몫은 없다. 다만 내[하나님]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네가 차지할 몫이요 유산이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 레위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아무 유산도 상속받지 못한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 떼어 바치는 십일조을 레위인들에게 유산으로 준다’”(민 18:20-24).

말하자면 성전에서 전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다른 기업을 가질 수 없고 또 그 대를 잇는 후손에게도 유산을 물려줄 수도 없기 때문에, 즉 성전에서 일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를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준다는 것이다.

넷째로, 십일조는 불우한 이웃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다.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회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 14:28-29).

이것은 십일조 중 3년째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라는 표상은 가난하다거나 소외되어 있다거나 불우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근거도 없고 의지도 없고 장래에 대한 아무런 기약도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일조를 써야 한다. 그래야 너희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대로 우리가 수입한 것의 십일조는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 거룩한 것이라는 말이다. 각박해진 인간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기쁨을 위해서 쓰여져야 하고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쓰여져야 하는 것이 십일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내지도 않게 되었고 또 거두어진 십일조는 그렇게 쓰여지지도 않았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으로 읽은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도대체 제대로 내지 않으려 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에 와서는 헌금을 많이 하라고 독촉할 때 전거구처럼 쓰여지고 있다. 말라기서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복구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말라기의 말을 적은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마당에 반드시 회복시켜 놓아야 할 것들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 중의 한 가지가 십일조제의 부활이었다.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말 3:8).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다. 낸다, 낸다 하면서 적당히 줄이고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걷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말 3:9-10).

이것이 원칙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원칙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쓰여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십일조는 성전에 모아진다. 그런데 그것을 본래 의도대로 쓰고 있지 않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폭탄 선언을 한 것이나 성전에서 제물을 팔거나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을 내쫓고 그 상을 둘러 엎으신 일, 그러면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신 것은 성전에서 모으는 그 많은 돈을 부당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십일조를 받아 그것을 대제사장, 대사제의 가족만이 떵떵거리고 먹게 했다. 그리고 로마의 속국 주제에 성전을 화려하게 꾸몄고 건물 유지에 모든 돈을 소비하고 있었다. 성전을 얼마나 잘 꾸몄던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후 성전 장식에 사용되었던 금이 시리아 시장에 유출되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시리아 시장의 금값이 반값이나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도대체 헌금, 십일조 관리를 잘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이나 다음 주일까지 1981년도 주정헌금을 작정하여 작정서를 제출키로 되어 있다. 그 액수가 크고 작고간에 성의를 다하여 반드시 작정하고 이행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는 더 이상 설명하거나 장황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의 일은 특별히 예배 시간에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이제 십일조다. 이 땅에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다. 또 주님이 오셔서 도와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년부터 그들을 위해 십일조 헌금을 하기로 작정해 보자. 교회에 내면 교회에서는 십일조만큼은 성전 유지비나 경상비에 쓰지 말고 이 세상이 하나가 되는 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에,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도록 해보자. 꼭 교회에 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자기 형제나 부모는 발가벗겨 놓은 채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십일조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요컨대 교회에 내든 오늘 내 삶의 주변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을 직접 돕든 십일조는 반드시 바치도록 하자는 것이다. 내년부터 우리의 가계 예산을 아예 그렇게 해보자.

그러나 너무 큰 무리가 된다면 이제까지 한 푼도 안 하고 지내기도 했는데 이십분의 일, 혹은 삼십분의 일도 좋다. 어쨌든 십일조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의도를 좇아서 꼭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또 아직 십일조 따로 주정헌금 따로 내실 수 없는 분은 형편대로 해야 하겠지만 그 헌금의 정신만큼은 십일조 정신을 따라가야 한다. 올해 여러분이 적어 내는 주정헌금 작정서는 여러분의 그 같은 결단이 담겨 있기를 바란다. 사실 주정헌금만 작정하라는 것은 타당한 일이 못된다. 십일조도 적어냄으로 하나님께 약속을 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 내겠다, 혹은 어떠한 일에 쓰겠다는 등 이렇게 써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살면, 말라기의 말을 계속 인용해 보자.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말 3:10).

글쎄, 물질적인 면에서 꼭 이렇게 될 것인지, 오히려 오죽했으면 이런 말씀을 다 하셨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쎄, 갚아 주실지 갚아 주시지 않을지 거기에 기대를 두기보다는 그 다음 말씀에 더 역점을 두고 싶다.

“너희가 사는 이 땅은 낙원이 되어 뭇 민족이 너희를 부러워하게 되리라”(말 3:12).

십일조는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하여 바쳐서 돕고 도와줄 때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거기에 낙원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이런 신앙, 이런 행위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는 불씨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이, 우리 자신이 이 불씨를 고대하고 있다. 스쳐가는 사람은 많은데 홀로 버려져 있는 현대인들,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현대인들, 우리의 영혼 속에는 실로 이 낙원에 대한 희구가 있는 것 아닌가? 낙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