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0:27-31] 얼음을 녹이는 불씨 – 1980년 12월 14일, 김상근 목사

얼음을 녹이는 불씨

1980년 12월 14일 / 이사야 40장 27-3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 얼음을 녹이는 불씨

강압정치는 계속되었다. 더욱 폭군화되어 가는 정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도 같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체육관에 통대(統代)라는 꼭두각시들을 모아 놓고 선거극을 연출하여 스스루 최고권력에 오른 것이다. 교회의 전천후 지도자들이 나서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축하 조찬기도회라는 망측스런 일을 저지른다.

최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이른바 언론기관을 통폐합한답시고 이리 붙이고 저리 떼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했다. 보안사 지하실이 공장이었다. 거기로 불려간 언론사 사장들은 지체없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기독교방송은 일반 보도기능을 박탈당한다. 설교하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선교방송의 영역을 넘는 것이니 허용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중에 한국신학대학만이 유난스럽게 반정부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학교의 설립자인 한국기독교장로회(基長) - 이렇게 삼위가 하나로 뭉쳐 정의투쟁을 하는 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이었을게다. 정부는 한신대 신학과 신입생 모집을 2년간 중지시킨다.

불교에도 손을 댔다. 승려 백수십 명을 연행하였다.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고 승적을 박탈하기도 했다. 불교도 대책없이 수모를 감수했다.

정치인에게도 강제의 손을 댔다. 정치규제자를 발표하여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비 야당,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민주한국당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되고 연루당한 민주인사들은 20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세계가 일어나 김대중의 사형집행을 막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국내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김대중 구출활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문전박대였다.

참으로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수도교회는 새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당시 1억 1천만 원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지금 이만한 돈으로 교회당을 짓는 것이 우리의 제1순위 과업일까? 시작한 일이고 중단할 수 없어 끝내고 말았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이것은 시대의 빚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의 목표를 위한 수단임을 설교해야 했다.

모두가 지치지 않을 수 없는 터에 어떻게 또 무거운 설교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지치고 피곤한 백성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강절이다. 위로가 있으나 정의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교인들을 나는 열망했던 것이리라.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주님의 분부하심과 세상의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살아왔다. 밝지만은 않은 세상의 여러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이렇게 힘들어도 어디 한 곳 우리에게 힘을 일으켜 주는 곳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하나님조차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생기게 된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계시다는 신앙이 우리에게 뜨겁게 생동하고 있는가?


[슬라이드]

1980년의 짙은 어둠, 그리고 대강절의 빛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신앙이 생동하고 있는가?

숨이 막히는 전방위적 억압 : 우리는 모두가 포로처럼 살고 있다.

위로가 필요하지만, 결코 정의 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신앙을 열망하다.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신다는 묵직한 메시지

오랜 억압은 단순히 육체를 구속하는 것을 넘어, 민족의 희망과 주체적 정체성을 소멸시킨다.

막다른 골목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 탄식 : 우리의 하나님조차 우리를 외면하시는가?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지친 인간의 현실은 피곤을 모르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만날 때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은총의 역학

1980년의 중력 : 억압, 혼미, 좌절

의심을 멈추고 앙망(仰望)을 시작하라

은총에서 사명으로 : 위로받은 자가 세상을 녹이는 불씨가 된다.

얼음을 녹이는 불씨가 되자

시대를 초월하는 불씨, 오늘 우리의 막다른 골목에서

[설교 전문]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고대하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을 과연 기다리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매년처럼 맞는 성탄절이고 매년처럼 맞는 대강절이기 때문에 특별한 감회나 기대없이 이 기간을 보내기 쉽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깬 정신으로 들여다 본다면 여기에 주님께서 와 주셔야 하겠다. 아니, 주님을 모셔야만 하겠다는 절실함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결코 연중 행사, 교회력에 의하여 대강절을 보낸다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늘은 또 전국 교회가 인권주일로 지키고 있다. 예년 같으면 지방별로 인권연합예배를 드릴 텐데 올해에는 설교 원고를 미리 제출하라는 등 당국과 협의가 안 되어 연합예배는 한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각 교회에서 드리게 되었다. 인권 예배가 필요한 상황이 우리의 상황이다.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고 계속 꼬여만 갈 때 그 말만 들어도 지겨운 것처럼 여러분도 이제는 인권이라는 말만 들어도 지겹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일에 연결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갖은 수모와 고난을 다 겪어 왔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매를 맞고 이방 민족의 포로가 되어 제 나라에서 끌려나오게까지 되었다. 하나님의 선민의 꼴이 아니다.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것을 따질 만큼 여유가 없다. 도대체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47년간이나 포로로서 바빌론에서 살아오고 있다. 47년이라는 이 길고 긴 세월이 그들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버렸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36년 동안 제국주의 일본에 식민지가 되어 지내 봤었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한 민족으로서 살아 남으려는 의지조차 잃고 말았었다. 제 성(姓)을 갈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말한다면 이제 우리는 지쳐서 우리의 성(姓)조차 지킬 힘이 없어졌다는 말이 된다. 우리말조차 점점 없어지고 유식하고 잘난 사람들은 벌써 일본말을 제 나라 말로 사용했다. 이것은 물론 일본의 정책이었지만 처음부터 일본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김이 다 빠지고 절망해 버리게 되었을 때 들이댄 일본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하여 우리가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를 전혀 가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36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47년이나, 우리는 이 땅에서 당했는데, 그들은 남의 나라로 끌려가서 당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좌절과 실망이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좌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기도 했고 그야말로 매달리기도 했다. 이 민족을 살려 주십사고, 우리의 이 고생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십사고, 우리도 어엿한 민족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사고 기도도 했을 것이고 지하운동도 했을 것이다. 저항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앞에 가로놓인 것은 ‘절망의 산맥’뿐이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 따윈 전혀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다. 자기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 자기들의 신조차 자기들을 돌아 보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그들의 절망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사 40:27).

하나님조차 외면하시고 하나님조차 관심을 두시지 않으신다는 이 절망은 그야말로 산맥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을 막아 놓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지경에까지 떨어져 버렸었다. 오죽했으면 이런 탄식을 했겠는가? 이렇게 좌절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과연 관심도 않으시고 알은 체도 않으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한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사 40:27).

말하자면 네가 어찌해서 야훼께서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알은 체도 않으신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민족, 좌절과 절망 속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이 말씀으로 절망의 산맥에 희망의 터널이 뚫리게 된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 절망 속에서 여러분을 발견하게 된다. 생기있게, 정의롭게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거의 갖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이 절망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조선 시대는 그만두고라도 일본 제국주의의 저 뼈아픈 압제에서 36년을 보내고 해방이 되었으나 해방 후 36년간도 독재와 인권 탄압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무언가 반짝 빛이 비치는 것 같더니 끝내 어둠이 1980년을 온통 덮어버리고 만 것 같다. 기어코 우리의 입에서도 저 이스라엘 민족의 탄식이 새어나오게 되었다. 야훼께서는 우리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시는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시는구나 …… 우리는 끝내 불쌍한 민족이구나.

우리의 마음은 무거워 있다.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이 겨울에는 더욱 무겁다. 과연 이 민족을 하나님은 외면하시는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처럼 고생에 고생을 거듭할 수 있겠으며 혼미에 혼미를 거듭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혼란의 악순환, 경색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포로처럼 살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 저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들려 주셨던 말씀을 듣기 바란다. 절망의 산맥을 뚫고 터널을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너희 절망 속에 있는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이 어찌 그런 주장을 펴느냐? 라는 이 말씀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이 신앙은 얼어붙은 이 민족을 녹이는 불씨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불씨가 필요하다. 누가 걱정하면, 누가 좌절하면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어찌 그런 주장을 펴느냐고, 신앙을 갖자고 격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같은 절망의 경험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편에 그러한 절망의 기도가 많다.

“나의 영혼이 괴로움에 휩싸였고 이 목숨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땅 속에 묻힌 것과 다름없이 되었사오니 다 끝난 이 몸이옵니다.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와 같이 당신 기억에서 영영 사라진 자와 같이 당신 손길이 끊어진 자와도 같이 이 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던져졌사옵니다”(시 88:3-5).

이 시인이 겪은 절망도 그 질에 있어서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절망과 같다. 그의 영혼은 괴로움으로 온통 싸여 있고 목숨은 이제 마치 죽음의 문턱에 와버린 것 같은 절망을 저는 느끼고 있다. 더 나아가 땅 속에 묻혀버린 것 같아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탈 속에 빠진 상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도 이러한 절망의 경험을 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솟아날 가망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떨어졌을 때 그 같은 절망 속에 빠진다. 병고와 싸우고 싸워도 전혀 가능성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저 시인과 같이 되어버린다. 도덕적으로 새로워지고 싶지만,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는 경험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저 시인과 같은 심정에 있게 된다. 한 고비가 넘어가는가 하면 또 더 큰 고비가 길목을 지키고 나를 삼키려 한다. 더 힘이 없다.

“나의 영혼이 괴로움에 휩싸였고 이 목숨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와 같이, 당신 기억에서 영영 사라진 자와 같이, 당신 손길이 끊어진 자와도 같이, 이 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던져졌사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면 우리는 탄식을 하고 있던 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형편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야곱아, 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느냐? 내가 어째서 너를 관심하지 않겠으며 내가 어째서 너를 알은 체도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은 우리 앞에 가로놓인 저 엄청난 절망의 산맥에 한 터널을 뚫으시고 계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격려와 용기를 얻으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좌절 속에 있는가? 가로지른 절망 앞에 있는가? 포로처럼 붙잡혀 있는가? 어느 한 구석 솟아날 수 있는 구멍조차 보이지 않는가? 여러분의 인권이 근원적으로 억압되어 있는가? 이 말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도 그 당장은 바빌론 땅에 있었다. 그 당장은 포로로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절망의 한가운데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을 이어 나가신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사 40:28).

우리의 하나님이 어떤 신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느냐는 말이다. 그 분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관심하시고 계시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계시다.

그 하나님은 또 어떤 신이시냐?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라고 말한다. 세상에 그 어떤 힘이라도 이 하나님을 대항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간교한 꾀도 우리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힘이 있으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그 하나님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시고 관심도 않으시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힘이 빠졌는가? 기진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우러러 보라. 하나님을 믿으라. 힘을 주실 것이다. 기력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은 30절처럼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고 장정들도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 나리라. 날개쳐 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31절) 새 힘이 솟아 나리라. 저를 믿고 바라면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이제 우리는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말자. 하나님은 무엇하시느냐는 푸념을 더 이상 하지 말자.

지금 우리가 할 한 가지 신앙적 결단이 있다면 이 절망의 산맥 앞에서 야훼를 믿고 바라는 것이다. 저를 쳐다보는 것이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 절망의 산맥을 뚫어 희망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놓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자. 그리고 나가서 우리가 얼어붙은 이 땅을, 얼어붙은 가슴들을, 얼어붙은 이 세상을 녹이는 불씨가 되자.

우리의 주님은 이 1980년의 세모에 특히 여기 앉은 여러분에게 오시고자 하신다. 여러분을 절망에서 구하고 얼음을 녹이는 불씨로 세상에 내보내시고자 여러분에게 오시고자 하신다. 이 대강절에 저를 맞아들이자. 기쁨으로, 희망으로 저를 맞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