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쏟아진 은총
1980년 12월 7일 / 이사야 40장 1-5절(누가복음 1장 26-35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 얼음을 녹이는 불씨
강압정치는 계속되었다. 더욱 폭군화되어 가는 정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도 같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체육관에 통대(統代)라는 꼭두각시들을 모아 놓고 선거극을 연출하여 스스루 최고권력에 오른 것이다. 교회의 전천후 지도자들이 나서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축하 조찬기도회라는 망측스런 일을 저지른다.
최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이른바 언론기관을 통폐합한답시고 이리 붙이고 저리 떼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했다. 보안사 지하실이 공장이었다. 거기로 불려간 언론사 사장들은 지체없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기독교방송은 일반 보도기능을 박탈당한다. 설교하고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선교방송의 영역을 넘는 것이니 허용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중에 한국신학대학만이 유난스럽게 반정부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학교의 설립자인 한국기독교장로회(基長) - 이렇게 삼위가 하나로 뭉쳐 정의투쟁을 하는 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이었을게다. 정부는 한신대 신학과 신입생 모집을 2년간 중지시킨다.
불교에도 손을 댔다. 승려 백수십 명을 연행하였다.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고 승적을 박탈하기도 했다. 불교도 대책없이 수모를 감수했다.
정치인에게도 강제의 손을 댔다. 정치규제자를 발표하여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비 야당, 관제 야당도 만들었다. 민주한국당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김대중은 사형이 확정되고 연루당한 민주인사들은 20년에서 2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세계가 일어나 김대중의 사형집행을 막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국내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김대중 구출활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문전박대였다.
참으로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수도교회는 새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당시 1억 1천만 원이라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지금 이만한 돈으로 교회당을 짓는 것이 우리의 제1순위 과업일까? 시작한 일이고 중단할 수 없어 끝내고 말았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이것은 시대의 빚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다음의 목표를 위한 수단임을 설교해야 했다.
모두가 지치지 않을 수 없는 터에 어떻게 또 무거운 설교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결코 정의를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지치고 피곤한 백성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더구나 지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강절이다. 위로가 있으나 정의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교인들을 나는 열망했던 것이리라.
[말씀을 향한 물음]
성탄의 계절에 본격적으로 접어 들었다. 우리는 지치고 피곤해져 있다. 좌절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다. 얼음처럼 굳어 있다. 여기 우리에게 복음이 있는가? 우리를 더욱 지치게 하지 않는 복음이 있는가? 상처난 우리의 몸을 누가 어루만져 줄 수 있겠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세계의 수백 민족 중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주셨다. 그리고 그 민족과 어떤 관련을 맺으셨느냐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구약성서이다. 적어도 구약성서에서 많은 부분은 이런 기록들이다. 요컨대 이스라엘이 범죄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끊임없이 비판하고 책망하셨다. 어떤 경우에는 저주를 예언하시기도 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패망하고 말 것을 예고하시기도 하셨다. 물론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경고, 비판, 책망, 눈물로 애원한 모든 하나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바빌론의 포로민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왕하 24:10 이하). 이스라엘 왕, 왕의 어머니, 왕비들, 내시들, 고관들은 물론 예루살렘 전 시민과 군인 1만 명, 유력인사 7천명, 은장이, 대장장이 1천 명 등이 끌려 갔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화, 기물을 빼앗겼고 성전 안의 여러 성구들이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천민층만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셔서였을까? 잘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무조건 자기가 택한 백성이라고 지켜주고 융성하게 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전지전능하신 신이 아니다.
바빌론으로 잡혀 온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이었던 예배드리는 일이 금지되었다. 그들에게 예배란 생명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상태를 의미했다.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을 빼앗겼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그 신앙에 따라 사는 생활 - 이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포로민이었다. 그들에게 정신적인 위기, 종교적인 위기는 심각했었다. 그들에게 자유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포로인 주제에 자유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그러니 그 신앙대로 살 수가 없다.
백성들은 패배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하나님을 말할 의욕조차 잃어 버렸다. 우리의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라고 외쳐댈 용기를 상실해 버렸다. 도대체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거기 포로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는데도 속수무책인 하나님이라면 무능한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 하나님의 종이라는 예언자들은 이 세대를 구원하기는 고사하고 이 세대에 대하여 아프고 괴로운 말만 하지 않았는가? 이제 또 그 말을 다시 곱씹어 말해 보았던들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고 그들은 기진맥진하여 땅바닥에 주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심판을 예언하던 그들 예언자의 예언이 불행하게도 성취되어 버린 것이고 이렇게 되자 일단 예언의 활동조차 멈추게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이 같은 역사의 아픔을 직접 겪고 있었다. 그들은 포로기의 암흑을 뼈 속 깊숙이에서 아파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그야말로 상처 투성이, 상처의 흔적 바로 그것이었고 그들의 시대는 엄동의 계절이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바빌론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힘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상대해 싸울 의욕조차 없었지만 힘도 없었다. 참으로 곤욕스런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피곤의 극에 다달았을 것이다. 상처의 백성, 상처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족 같은 말이지만, 그 시대에도 그 같은 현실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아예 좌절할 것도 없었을 것이고 패배감에 사로잡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주일부터 대강절이 시작되었다. 대강절이란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특별히 기다리고 기도하는 기간이다. 말하자면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처음부터 기쁜 소식이다.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기쁨이 복받쳐 오르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어떤 증언의 말씀을 드릴 것인가로 번민하였다.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성탄절은 다가 오는데 무슨 메시지를 전할 것이냐? 이렇게 번민한 이유는 우리가 얼음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지쳐 있고 온 백성이 좌절감과 패배감의 암혹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말이다.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지쳐 있다는 고백을 들어오고 있다. 우리보고 이 시대를 어떻게 하라느냐라는 항변을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포로다. 이제는 누구나 다 이 역사를 어쩌지 못하고 ‘갈 대로 가라’ 라고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누구를 탓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피해자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양심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 사람 아니냐는 항변조차 허용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막바지에 살고 있다. 우리 개인의 생활도 ‘에라, 될 대로 되라’다.
만약 이 아픔을 우리가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지쳐 있다’는 말이 옳은 불평이다. 만약 오늘의 모든 불안을 실제로 직면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깊은 패배감 속에 빠져 있다’ 는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 여러분은 지쳐 있고 여러분은 좌절해 있다. 여러분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다. 상처 투성이다. 상처의 백성, 상처 난 사람들이다. 나는 상처로 얼룩진 ‘나’ 속에서 상처로 얼룩진 여러분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의당 기뻐해야 할 성탄이 돌아오는데도 무슨 말을 할까를 걱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도무지 이번 성탄은 즐겁게 지낼 수 없을 것 같다. “아, 기뻐라. 주 오셨네”라고 찬송을 부르게 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서 좌절한 것, 패배감의 노예가 된 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다. 정신을 차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오늘 불안 속에 살고, 좌절 가운데 있다면,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도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나? 이렇게 무능한 하나님을 우리가 목을 늘여 기다릴 필요가 있나? 이 심한 좌절, 패배감, 그리고 불안의 골짜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고 계신가? 바빌론 포로의 기막힌 현실에 떨어져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던가? 그들이 깊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 ”
사실 하나님은 그 때 이 같이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처에 쏟아진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한 위대한 한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름도 남아있지 않다. 그를 가리켜 우리는 제2의 이사야라고 부를 뿐이다.
여러분, 흑암의 시대에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고 허탈해 넋두리를 토해 놓고 있는 지금,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라고 하나님은 외치고 계시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처에 쏟아진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이 아닌가? 내가 이 대강절에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 고뇌하고 있을 때 바로 이 말씀, 상흔에 쏟아지는 은총의 말씀이 들려 왔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이 말씀은 ‘얼음을 녹이는 불씨’이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 불씨를 주시니 고맙습니다.’ 여러분, 이 불씨, 얼음을 녹이는 불씨를 지금 받읍시다. 대강절은 이 불씨를 받는 절기이다. 이 기쁨의 소식을 받아들이는 계절이다. 이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시라. 어떻게 우리의 형편에서 이 불씨, 이 은총을 의심없이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인가?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곧이어서 한 소리가 아래와 같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사 40:3-5).
우리가 사는 이 사막에 길을 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좌절과 불안으로, 깊은 패배감으로 사막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현실도 모름지기 사막이다. 생명이 살 수 없는 사막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이 사막에, 우리 가운데 길을 내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시고자 하신다.
사막이 된 우리의 마음에 길을 내라. 사막이 되어버린 이 역사의 현실에 길을 내야 한다. 광야에,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자 하시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 자신 안에, 이 사회에 골짜기가 있고 산과 언덕이 있고 비탈진 산골길이 있고 절벽이 있어서 하나님의 오심을 방해하고 있다.
산과 언덕이 있는가? 절벽이 있는가? 비탈진 산골길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에 방해가 되는 골짜기 - 우리를 좌절과 패배감으로 몰아 넣은 골짜기는 메워야 한다. 나에게서, 우리에게서, 이 사회에서 그 골짜기를 메워야 한다. 하나님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산과 언덕은 깎아 내려야 한다. 패배의 절벽은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어야 한다. 좌절의 산골길은 넓혀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 길을 닦을 것인가? 또, 우리보고 닦으라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미 닦을 힘이 없다. 우리는 무력해졌다. 이 길을 닦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할지 모른다. 오늘 우리에게서 패배감을 씻어낸다는 것, 좌절을 몰아낸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모두가 아직도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시켜서 벌써 길을 닦기 시작하셨다. 예언자는 이 사실을 보아 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 우리는 아직도 지쳐 있는 상태다. 우리는 아직도 좌절 속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포로다. 바빌론은 우리를 포로로 부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 당신에게 오시고자 모든 골짜기를 메우기 시작하셨다. 우리 사이에 오시기 위해 이미 산을 깎고 언덕을 깎아 내리기 시작하셨다. 이 사회에 오시기 위해 이미 절벽을 평지로 만들기 시작하셨다. 이 인류에게 오시기 위해 이미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막 같은 우리 속에, 이 사회에 길을 내신다. 거친 벌판에 길을 훤히 닦으신다. 이것으로 우리는 ‘얼음을 녹이는 불씨’를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처 투성이인 우리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은 상처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신다.
하나님은 2,000년 전에도 하늘과 베들레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골짜기를 메우셨다. 산과 언덕을 깎아 내리셨다. 하나님은 2,000년 전에도 하늘과 베들레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절벽을 평지로,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셨다. 그래서 기어코 하나님은 베들레헴 말 구유에 탄생하시고야 말았고 지치고 아픈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셨다. 모든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다. 성탄절은 바로 그것이다. 기쁨으로 그 날을 맞자. 춤추며 노래하며 그 날을 맞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