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할 수 있는 사람
1980년 9월 14일 / 마태복음 5장 4절 ; 요한복음 16장 20절(렘 8:18-23)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사랑의 가시
7월에는 내내 교회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한다는 이유로 계엄사가 나를 불법 구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발표되었다. 김대중이 광주의 폭동을 일으켰고 나라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을 5월 17일에 이미 체포하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터무니없는 억지가 세상을 장악했다.
7월 말에야 풀려나 다시 강단에 섰다. 불의에 항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항변하고 저항할 수 없었다. 아, 이 절망의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나 계신 것인지.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온 기독교인들이 몰려간다. 은혜를 받는다. 행복해 한다. 황흘경에 들어간다. 종교적 체험이란 것이 있다. 종교이므로 기독교에도 여러 이상 경험이 있을 수 있고 종교인이므로 그것을 바랄 수도 있다. 이런 행태는 일종의 소극적 도피행위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약한 인간들 아닌가.
그러나 악에 저항하는 성직자의 행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8월 6일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우리가 지목한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을 모시고 드린 기도회다. 그를 축복하고 도덕의 옷을 입힌다. TV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시간마다 그 장면을 반복하여 방영했다. 전국적, 국가적 지도자로 치켜세우고 우러르게 하는 추한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그들 성직자들은 지탄받지 않는다. 그들을 정치목사라 하지 않는다. 나같은 목사는 정치목사이고 저들은 신앙에 정진하는 거룩한 목사들이라 한다.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목사들이 감지덕지로 참여한다. 전두환의 불의한 세력은 힘을 얻어 간다.
한국은 새 세대의 지도자가 필요하며 10ㆍ26의 난국을 피하지 않고 수습했기 때문에 자신이 국민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고 전두환은 당당히 말한다. 외신들은 “전두환 장군의 영도력을 한국민들은 폭넓게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의 발언은 우리에게 치욕적이었다. 우리 국민성이 들쥐와 같다는 것이다. 누가 지도자가 되건 그 지도자를 따라가게 될 것이고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현실을 보시고 계시는가?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길은 하나뿐이다. 둘이 아니다. 사잇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바르게 …… 그렇다! 바르게 가는 것뿐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즐거움을 찾는다.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즐거움을 찾는다. 그것은 슬퍼할 수 있는 감각이 퇴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리에게 ‘슬퍼하는 사람, 애통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산상수훈, 소위 8복의 말씀은 어떻게 들리는가? 정말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고 믿어지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세 주일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가시가 박히게 하시고 우리의 목에 가시가 걸리게 하신다. 모든 것을 못 본 척, 못들은 척하고 넘어가버리면 편하겠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눈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본 것, 들은 것, 아는 것에 대하여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고뇌하게 하신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양심의 고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게 일하신다. 어느 구석에선가 이 고뇌의 병을 앓는 사람이 있게 하신다. 우리는 누구냐? 이 병을 앓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또 우리는 그 가시를 주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고 넉넉히 감당해 내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무겁고 괴로운 일임이 분명하다. 누가 이렇게 살겠다고 나서겠는가? 조용히 괴로움 없이 편안하게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특별히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의 모습이다. 인간에게는 부딪쳐 오는 고통을 피하고 또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갈등을 거부하려는 본능이 있다. 최소한 잊어버리기라도 하려고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다 그렇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한 뚜렷한 경향이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죄책감이라든지 사회적 죄에 대한 분노 또는 연대감 같은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쉽게 편하게 동풍이 불면 동쪽으로, 서풍이 불면 또 서쪽으로 가면 된다. 그저 즐겁게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편하자, 쉽게 살자고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엉뚱하고 놀라운 역설을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개역성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공동번역).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즐거워하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슬퍼하라.” 세상의 기준을 전폭적으로 거부한다. 모든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이런 말씀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한 성현의 말씀일 뿐 오늘날 유효한 말씀은 이미 아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이 말씀은 세상 사람, 심지어 그리스도인에 의해서까지 무효 선고를 받은 것이다. 누가 이 말씀에 동의할 것인가? 교회도 슬퍼하지 않으려고 나오고, 예수 믿는 것, 종교를 갖는 것도 애통하지 않으려고 하는 짓인데 슬퍼하고 애통하라니? 그것이 아무리 성서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따위 말씀은 ‘무효’라고 선언해 버리고 만 지 오래다. 그런 말씀은 성서에 그런 말씀이 있다고 알고 있는 정도로 족한 것이지 오늘날은 가치없는 말씀이 되어버렸다. 여러분은 과연 애통하고 슬퍼하는 자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는가? 아마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무효 선언을 받은 이 말씀은 과연 어떤 것인가? 복 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인가? 그저 애통해 하거나 괜히 정신질환자처럼 항상 슬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애통”해 한다는 낱말이 갖고 있는 의미는 첫째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가 알아 듣게 풀어쓰면 ‘자기의 죄나 타인의 고통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된다. 자기의 잘못을 애통해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장 초보적인 일 같지만 사실상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의 잘못을 애통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죄가 크건 작건 그것을 괴로워한다. 그까짓 것 생각 안 하고 넘어가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누가 세상 살면서 죄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겠느냐, 모두 그렇고 그렇게 사는 것 아니겠느냐고 자기를 위로해 보아도 그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죄책에 사로 잡히고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또렷하게 넘어갈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은 괴롭다. 하지만 이렇게 애통해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용납하시고 사랑하신다.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있는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보자. 성전에서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가 똑같이 기도하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은 매우 거만스럽게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자기가 선하고 온전하게 산 것을 기도하면서 자랑처럼 늘어 놓았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 후에 예수는 이렇게 교훈하신다.
“잘 들어라.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눅 18:14).
그가 무슨 죄를 고백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의 양심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죄를 의식하고 있었다. 파렴치하지 않다. 이같은 현대인이 없는 것 아닌가?
또 시편 51편을 보자. 다윗의 시인데 남의 여자를 빼앗고 그에 대한 뉘우침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내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시 51:1-3).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는 약한 인간이요 과오와 죄 많은 인간임을 자인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약한 사람, 허물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 과오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이다. 큰 과오나 죄를 저질러 놓고도 슬퍼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행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들이 있는 단체나 사회는 평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란 이스라엘의 죄를 슬퍼하는 자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죄란 말하자면 이웃의 죄요 사회의 죄다. 이 사회 안에 있는 죄를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은 있더라도 사회의 죄를 애통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법이다. 피하기가 더 쉽다. 핑계대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 불의나 다른 사람의 죄라는 거야말로 생각 안 하려면 얼마든지 안할 수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과외의 일이다. ‘내 본업도 아니요 그런 일 아니더라도 나 자신의 문제가 많지 않느냐, 내 고민이 많지 않느냐, 바쁘지 않느냐’ 라고 피해갈 수 있다. 나만 깨끗하면 될 것 아니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는데 내 일도 못한 주제에, 아니 가정일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사회의 죄를 슬퍼하고 애통해 한다는 말이냐? 또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를 구태여 나누어 갖고 나누어 짊어진다는 것이 오늘의 사회에서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를 생각하고 염려할 여유가 없다. 어느 시골 사람이 어머니와 함께 가고 있는 학생에게 길을 물었다. 그 학생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설명해 주었다. 다시 길을 걸으면서 그 어머니가 핀잔을 준다. 모른다고 해 버리면 그만이지 쓸데없이 그런 짓은 왜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자, 애통해 하는 자는 과연 불행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부끄러운 일들, 거리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들, 권력자의 폭력들, 무고한 사람을 압박하는 일들, 거짓말들 …… 이런 일 때문에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한 자의 횡포와 압박 때문에 고통하는 그 고통을 내일처럼 나누어 갖고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만일 용서해 주지 않으시려거든 당신께서 손수 쓰신 기록에서 제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출 32:32).
이렇게 슬퍼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양심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눅 6:25)는 누가복음의 기록을 바꾸어 말하면 ‘그 시대를 위하여 애통하는 양심의 사람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라 할 수 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시대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고 울었던 사람이다. 구약성서 본문의 앞 부분부터 발췌하여 읽어 보자.
“넘어졌다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더냐? 떠나 갔다가 돌아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더냐? 그런데 이 백성은 나를 배반하고 돌아 오지 않으려고 버티니, 될 말이냐? …… 아무리 귀를 씻고 들어 보아도 당연히 할 말을 하는 놈은 하나도 없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던가!’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자도 하나 없다. …… 보아라, 거짓 선비의 붓끝에서 법이 조작되었다. …… 위 아래 할 것 없이 남을 뜯어 먹는 것들, …… 그렇듯이 역겨운 짓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얼굴에 쇠가죽을 쓴 것들, 창피한 줄이나 알면 괜찮지! …… 잘만 되려니 하고 바랐더니, 좋은 일은 끝내 오지 않는구나. 나아질 때를 기다렸더니, 이 무서운 소식이 웬 말이냐?”(렘 8:4-15).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 이 같은 나라의 현실을 보고 듣고 경험한 예레미야의 태도를 보자.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백성은 영영 살아날 길이 막혔습니다. 가슴은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습니다. …… 여름도 지나고 추수도 끝났건만 우리는 이제 살아 나갈 길이 없습니다. 내 딸 내 백성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전들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앞이 캄캄하고 마음은 떨립니다. ……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렘 8:18-23).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애통해 하고 슬퍼했다. 이스라엘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불의와 거짓을 애통해 했다.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얼마나 슬퍼하는 것인가? 애통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 그런 사람은 불행한가? 과연 불행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 이상 행복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애통해 하지 않고 슬퍼할 수 없는가? 그것은 우리의 양심이 화인(火印)을 맞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속삭이는 유혹은, 위협하는 폭력은 사탄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불인두로 우리의 양심을 지져 놓는다. ‘어디 죄 지은 게 너뿐이냐? 그게 뭐 큰 죄냐? 어쩔 수 없었지 않느냐?’ 이렇게 유혹한다. ‘세상의 죄 -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런 것 아니더라도 바쁘고 할 일 많다. 네가 상관할 일이냐? 네가 뭐라고……’ 이런 생각, 이런 논리는 우리 양심을 무디게 하는 사탄의 화인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를 아파하게 되어 있고 사회의 죄악을 슬퍼하게 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아파하는 감각이 있다. 그런 사람이 건전한 사람이다. 아파해야 할 것을 아파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다. 도덕적인 의식이나 종교적인 감성이 정상적이어야 건전한 사람이다. 아파하고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병든 사람이다. 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병든 것이다. 사회의 불의를 슬퍼하지 않는 사람도 병든 사람이다. 나병환자는 꼬집어도 아프지 않다고 한다. 뜨거운 물을 쏟으면 뜨겁다고 느껴야 하고 못에 찔리면 통증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자다.
우리에게 괴롭지만 죄가 깨달아지고 있다면, 그래서 가시처럼 목구멍을 괴롭히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시다. 저 세리처럼, 다윗처럼 애통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
또 우리가 괴롭지만 이 사회의 불의와 불법, 죄가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다면, 그래서 가시처럼 우리 눈을 아프게 하고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시다. 오늘의 현실 때문에 예레미야처럼, 모세처럼 애통해 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실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0절을 경청하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 16:20).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