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2:15-19] 광야로 꾀어서 – 1980년 9월 7일, 김상근 목사

광야로 꾀어서

1980년 9월 7일 / 호세아 2장 15-19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사랑의 가시

7월에는 내내 교회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한다는 이유로 계엄사가 나를 불법 구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발표되었다. 김대중이 광주의 폭동을 일으켰고 나라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을 5월 17일에 이미 체포하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터무니없는 억지가 세상을 장악했다.

7월 말에야 풀려나 다시 강단에 섰다. 불의에 항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항변하고 저항할 수 없었다. 아, 이 절망의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나 계신 것인지.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온 기독교인들이 몰려간다. 은혜를 받는다. 행복해 한다. 황흘경에 들어간다. 종교적 체험이란 것이 있다. 종교이므로 기독교에도 여러 이상 경험이 있을 수 있고 종교인이므로 그것을 바랄 수도 있다. 이런 행태는 일종의 소극적 도피행위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약한 인간들 아닌가.

그러나 악에 저항하는 성직자의 행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8월 6일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우리가 지목한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을 모시고 드린 기도회다. 그를 축복하고 도덕의 옷을 입힌다. TV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시간마다 그 장면을 반복하여 방영했다. 전국적, 국가적 지도자로 치켜세우고 우러르게 하는 추한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그들 성직자들은 지탄받지 않는다. 그들을 정치목사라 하지 않는다. 나같은 목사는 정치목사이고 저들은 신앙에 정진하는 거룩한 목사들이라 한다.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목사들이 감지덕지로 참여한다. 전두환의 불의한 세력은 힘을 얻어 간다.

한국은 새 세대의 지도자가 필요하며 10ㆍ26의 난국을 피하지 않고 수습했기 때문에 자신이 국민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고 전두환은 당당히 말한다. 외신들은 “전두환 장군의 영도력을 한국민들은 폭넓게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의 발언은 우리에게 치욕적이었다. 우리 국민성이 들쥐와 같다는 것이다. 누가 지도자가 되건 그 지도자를 따라가게 될 것이고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현실을 보시고 계시는가?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길은 하나뿐이다. 둘이 아니다. 사잇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바르게 …… 그렇다! 바르게 가는 것뿐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여러분은 무슨 말씀을 듣기 원하는가? 여러분의 영혼 깊숙한 데서 솟아오르고 있는 기대는 무엇인가? 혹 고생 중에 있는 분은 “왜 이 고생을 하는 것이냐?” 하고, 혹 고난 중에 있는 분은 “왜 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하고, 또 우리 나라가 겪는 거듭되는 환난을 개탄하면서 “왜 이렇게 환난이 거듭되는 것이냐?” 하고 자문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의 고생이나 고난, 이 환난을 아시고나 계신 것이냐고 자문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서 말씀에 귀를 열어 보자.


[슬라이드]

광야로 꾀어서

역사가 다시 곤두박질친 1980년의 여름

절망을 마주한 두 가지 종교적 응답

근원적 질문 : 왜 고난은 반복되는가?

이집트를 나오자마자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한 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의문이자 불만이었다.

호세아의 대담한 해석: 하나님의 '속임수'

광야의 고난 없는 출애굽은 이집트의 타락한 가치관을 가나안에 그대로 이식하는 부질없는 일에 불과하다.

국가적 적용 : 1980년 대한민국이라는 '광야'

개인적 적용: 황금을 단련하는 불

아골 골짜기, 희망의 문으로 바뀌다

한숨 쉬지 말고, 훈련으로 받아들이라


[설교 전문]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부딪힐 때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병이 들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사업이 안 되고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더구나 무언가 잘될 것 같다가 그만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 어떤 희망에 들떠 있다가 그것이 무산되어 버리는 경우, 하나님도 무심하시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돌보신다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가야지 꼬이고 틀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똑같이 그리스도인 가정이고 그 부모들이 모두 독실하게 살려고 하는데 어떤 가정은 아이들도 모두 착실히 자라서 성공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가정은 잘 자라던 아이들이 곁길로 가고 집안을 시끄럽게 만든다. 그래서 그 집안 식구 모두가 몇 년 동안 커다란 고통을 겪고서야 겨우 진정이 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좀 순탄히 가도록 왜 못 하시는 것일까? 왜 믿는 가정에 이 같은 고통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 같은 생각은 개인뿐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나 국가나 인류사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뭐 좀 잘 되려나 하는 기대를 갖게 되는가 싶은데 또다시 역사는 곤두박질하여 버리고 만다. 그래서 긴 고난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고 또다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쉬쉬하며 살아가게 되는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어떤 세상이 되었는가? 애매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죄없는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있다. 다시 매맞고 옥에 갇히며 대학 교수들이 쫓겨나고 학생들이 다시 제적되었다. 다시 쉬쉬하며 앞뒤를 살펴 조용조용 말하게 되었다. 택시를 타면 운전수 눈치를 살펴야 하고 다방에 앉으면 뒷 사람이 혹시 고발하지 않겠나 조심하게 되었다. 그 뒷 사람이라는 사람도 아마 조심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또다시 이렇게 되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의문이 있었다. 자기의 선조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탈출한 다음,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방황하게 된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광야 40년 동안의 고난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낮에는 광야에서 뙤약볕을 견뎌야 했고, 밤에는 추위에 떨어야 했다. 물이 없어서 받은 고통은 얼마나 컸겠으며, 고기 한번 못 먹고 몇 년씩 지날 때의 어려움은 얼마나 컸겠는가? 소소한 이야기 같지만 그 동안 빨래는 어떻게 했고 매일 밤 잠자리는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오죽하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도와주기를 기도했겠는가?

우리가 6 • 25 사변 때 불과 3개월 동안 봇짐을 싸매고 이리저리 피난을 다닐 때 그 괴로움은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을 만큼 큰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3개월이 아니고 40년이었으니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왜 그렇게 내버려 두신 것일까? 왜 이집트를 나오자마자 바로 가나안에 도착하도록 안 하셨는가?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언제나 의문이요 또 불만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에 대한 예언자들의 해석도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호세아는 매우 대담한 해석을 하고 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달콤한 말로 꾀어서 광야로 이끌어 내오신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출애굽 사건이란 달콤한 말로 꾀어내는 하나님의 꼬임에 빠져 이스라엘 사람이 광야로 나오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제 나는 그를 꾀어”(2:16).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의 생활을 싫어했다. 불평과 불만이 컸다. 언제나 이집트를 떠나 온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바로 왕 밑에 있었던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과거를 그리워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꾀어내셨다. 그 고통스런 광야 생활이 시작될 것인데 하나님은 마치 그야말로 가나안 복지가 눈앞에 금방이라도 전개되는 양 그들을 꾀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임수다.

호세아의 이 예언을 중심하여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고통을 받고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통과 고난 가운데로 끌어 내셨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병을 앓는 것이나,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것이나 또 심지어 감옥에 가는 것이나 혹은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광야의 생활이라 한다면 그 광야의 생활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신 것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똑같이, 어떻게 하여 우리가 또다시 기막힌 역사의 현실에 던져지게 되었는가? 금방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될 것 같더니만 그것은 과연 하나님의 속임수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오늘의 현실로 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해석이 호세아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광야로 꾀어내신 것일까? 그것은 광야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거기에서만이 파멸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희망의 문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16, 17절).

이스라엘이 만약 이집트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영영 바알을 섬기는 신자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바알의 신자들에게는 옳다고 하는 것이 중요치 않다. 양斗을 따라 자유스럽게 산다는 것이 중요치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많이 생산하고 부홍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어떻게든지 안정되고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가치다. 15절 말씀처럼 “바알 축제일만 되면 내 생각은 하지도 않고 바알에게 향을 태워 올리며 귀걸이, 목걸이로 몸을 단장하고 정부들을 따라 나서게” 되어 버린다. 이것은 산 것 같으나 죽어가는 것이고, 잘된 것 같으나 인간의 삶으로서는 파멸의 경지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릴 찰나에 있었던 것이 이스라엘의 형편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꾀어내서는 고난 속에 몰아 넣으셨다.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훈련하시고 교육하신다는 것이 호세아의 출애굽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이 고난의 훈련을 통해서만이, 광야를 거쳐야만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다운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있겠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내신 것이다. 광야는 그렇기 때문에 좌절과 절망의 땅이 아니라 17절 말씀처럼 “희망의 문”이다.

출애굽할 때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쁨을 가졌고 희망(vision)을 가졌다면 그것은 반드시 광아의 고난을 통하여 다시 닦아지고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기쁨과 희망, 비전은 하나의 신기루로 끝나고 만다. 금방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것 같다. 그러나 가나안에 가서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를 건설하게 되려면 그들은 반드시 광아의 고난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집트에서 몸에 익혔던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 베드로전서도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벧전 1:6-7).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 거기서 닦은 훈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호세아가 예언활동을 하고 있는 그 시대에 와서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바알을 섬기게 되었다. 찬란하고 풍요한 가나안의 문화에 홀려서 정의도 버리고 진실도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다시 광야로 끌어내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거기서 당신의 진실한 사랑을 속삭여 주시려고 하신다. 못된 자식에게 사랑의 회초리를 때리는 부모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훈련시키려 하신다고 그는 외치고 있다.

우리의 개인적 삶에서도 시련은 우리를 순수하게 하는 것이다. 금도 불로 단련되어 정금을 해야 귀하게 된다.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고난을 - 그것이 병이거나 갈등이거나 좌절이거나 시험에 빠지는 일이거나 - 광야의 시련으로 받는 때, 그래서 그 시련을 통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훈련하는 때 그들은 비로소 거기 고난의 자리에서 영원한 “희망의 문”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특히 최근 우리가 다시 고난의 역사로 떨어지게 된 이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몸부림을 쳐보아도 숨을 틀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현실을 해석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사님, 하나님은 정말 계신 겁니까?”라고 묻는 어느 시골 집사님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정녕 정의의 편이신가? 하나님은 지금 무엇하고 계신가? 이 역사가 다시 곤두박질하는 것은무엇인가?’라는 숱한 회의에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닐 것이다. 역사를 같이 염려하고 이 나라를 깊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다. 자유를 그리워하고 정의와 진실을 소중히 여기려는 모든 사람이 같이 갖게 되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광야로 꾀어 내신 하나님의 경륜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국가적인 역사현실을 해석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이 나라의 현실은 무엇인가? 참다운 자유민주주의로 가기 위하여는 10ㆍ26 사태 이후의 기대와 희망에 흥분하고 거기에 도취하여 있어서만은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꾀어 광야로 끌어 내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부자유가 무엇인지, 부정의가 무엇인지, 반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거짓말이 무엇인지, 탄압이 무엇인지 - 그것들을 철저히 배격할 수 있도록 여기 광야에서 철저히 훈련되어야 할 것이다. 오랜 동안 비겁하게 살아왔던 습성을 여기서 고쳐야 한다. 독재에 길들여진 우리의 습성을 고쳐야만 한다. 그래야 자유민주주의로 갈 수 있다. 우리가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은 그렇기 때문에 좌절이 아니라 ‘희망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물겹게 느끼게 된다. 가시로 찌르시나 그것은 사랑의 가시다.

광아의 고난 없는 출애굽은 이집트의 문화와 가치관을 그대로 가나안 땅에 이식하는 부질없는 일에 불과하다. 그들은 광야의 고난을 통하여 이집트의 모든 것을 철저히 내던져야만 했다. 약속된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의 고난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것은 부활의 축복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광야를 거쳐서야만 가능한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속여서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 세계로부터 끌어내어 물도 없고 빵도 없고 고기도 없는 황량한 사막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이스라엘을 연단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광야로 끌어 내셨다. 여기에서 ‘희망의 문’을 찾자. 이제 여 러분,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은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한 것이다.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연단하시려는 것이다. 일이 꼬이고 무엇인가 안 되어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을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라. 왜 여기 이렇게 떨어져 버렸는가 한숨 쉬지 말고 거기가 ‘희망의 관문’이 되도록 고난을 극복하자. 우리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깊고 깊은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