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리(表裏) 사이에 파고드는 파수꾼
1980년 8월 31일 / 아모스 5장 10-14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사랑의 가시
7월에는 내내 교회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한다는 이유로 계엄사가 나를 불법 구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발표되었다. 김대중이 광주의 폭동을 일으켰고 나라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을 5월 17일에 이미 체포하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터무니없는 억지가 세상을 장악했다.
7월 말에야 풀려나 다시 강단에 섰다. 불의에 항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항변하고 저항할 수 없었다. 아, 이 절망의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나 계신 것인지.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온 기독교인들이 몰려간다. 은혜를 받는다. 행복해 한다. 황흘경에 들어간다. 종교적 체험이란 것이 있다. 종교이므로 기독교에도 여러 이상 경험이 있을 수 있고 종교인이므로 그것을 바랄 수도 있다. 이런 행태는 일종의 소극적 도피행위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약한 인간들 아닌가.
그러나 악에 저항하는 성직자의 행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8월 6일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우리가 지목한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을 모시고 드린 기도회다. 그를 축복하고 도덕의 옷을 입힌다. TV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시간마다 그 장면을 반복하여 방영했다. 전국적, 국가적 지도자로 치켜세우고 우러르게 하는 추한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그들 성직자들은 지탄받지 않는다. 그들을 정치목사라 하지 않는다. 나같은 목사는 정치목사이고 저들은 신앙에 정진하는 거룩한 목사들이라 한다.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목사들이 감지덕지로 참여한다. 전두환의 불의한 세력은 힘을 얻어 간다.
한국은 새 세대의 지도자가 필요하며 10ㆍ26의 난국을 피하지 않고 수습했기 때문에 자신이 국민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고 전두환은 당당히 말한다. 외신들은 “전두환 장군의 영도력을 한국민들은 폭넓게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의 발언은 우리에게 치욕적이었다. 우리 국민성이 들쥐와 같다는 것이다. 누가 지도자가 되건 그 지도자를 따라가게 될 것이고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현실을 보시고 계시는가?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길은 하나뿐이다. 둘이 아니다. 사잇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바르게 …… 그렇다! 바르게 가는 것뿐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주변이 복잡하고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조용히 지내고 싶어진다. 선과 악이, 정의와 불의가 부딪쳐 싸우는 곳이 있으면 그곳을 피해가고 싶어진다. 하나님께 용기와 신앙을 구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의 안전을 구해야 할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 구약성서 본문을 그 시대적인 배경 같은 것을 전혀 모르고 읽는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5:21)라는 것은 종교 자체를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예배, 종교적 행사를 하나님은 싫어하시는 것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행사에 참예하는 사람들의 신앙하는 태도, 그들의 윤리와 도덕적인 의식을 문제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윤리적 책임과 도덕적인 관심 없이 살고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형식은 갖추고, 날마다의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활을 하다가도 종교의식에는 점잖게 참석하는 가식과 허위성을 힐책하는 말씀이다. 사실 평소의 생활이 옳지 못하였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무 거리낌없이 예식에 임하는 것은, 첫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르다 보면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들이 없을 수 없다. 그런 일을 크게 잘못된 것처럼 법석을 떨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면서도 부모 앞에서 태연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때 자식이 미워진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또 부모를 속이는 것이다.
누구라도 잘못이 없을 수 없다. 요컨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그 잘못을 뉘우치고 바르게 살 것을 거듭 다짐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아니면 겉치레로, 허위의식으로 아무 뉘우침이나 다짐도 없이 남에게 보이려고 예배에 참예하느냐 하는 차이가 중요하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행사다. 갖은 잘못된 짓을 하면서도 뻔뻔스럽게 구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 찬송가를 아무리 멋지게 불러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집어치우라 하신다는 것이다. 목사가 모든 것이 다 완전하여 여기 서서 예배를 집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성스러운 자리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성가대의 예를 들어 보자. 잘 연습된 노래를 불러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사람다운 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는 시끄러운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을 이처럼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예언자 아모스는 대단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여신도회 기도회가 있었다. 거기서 우리 교회는 “정치 교회다. 목사가 정치에 가담한다. 교회가 순수해야지 정치에 관심하는 것은 안 된다”라는 말들을 듣는다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아무개 목사는 정치 목사다. 정치에 간여한다’고 말할 때 권력을 옹호하고 권력 편에 서는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정치 권력에 추하게, 체통이고 뭐고 모두 버리고 그저 권력자라면 굽실굽실하며 받들어 모시는 목사에게는 정치 목사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 정치 권력을 비판하고 그래서 바른 사회, 올바른 나라를 세우겠다고 활동하는 목사에게 언제나 그런 딱지를 붙여 준다. 목사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정치 세계에 간여해서 이득을 보고 줄세하고 뭔가를 얻어내는 목사를 정치 목사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치 세계의 잘잘못을 가리고 그곳에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을 정치 목사라 한다면 성서 전체가 정치 성서요, 예언자는 정치 예언자요, 제사장은 정치 제사장이고, 예수는 오직 정치 그리스도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활, 현실 세계를 떠나 종교나 논한 성서, 예언자, 제사장, 예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모스도 그냥 어떤 추상적인 사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실, 특히 당시 지도자들을 똑바로 보면서, 또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똑바로 보면서 그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떠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없다. 그때의 사회 현실을 보^. 그때 유명한 벧엘 성소, 길갈 성소, 브엘세바 성소에서는 대집회가 날마다 열렸다. 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투어 그 일을 했다. 안식일이나 무슨 절기가 되면 의기양양 거기에 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 소리가 떠나갈 듯 울렸고, 비파소리 - 지금으로는 대관현악단이 연주를 하였다. 절기 때마다 찾아 큰 예배를 드렸다. 가장 종교적이고 깨끗하며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것처럼 행세했다. 아모스 시대의 모든 왕, 지도자들이 한 짓이다. 그럴싸하게 격식을 차려 하나님을 위하고, 정의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고, 가장 도덕적으로 보였다. 그뿐인가? 아침마다 희생 제물을 드렸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쳤고 감사 제물을 드렸다.
진정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정권에 눈이 어두워 사람을 죽이고 가두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백성을 괴롭힐 수 있겠으며 거짓을 행할 수 있겠는가? 엉큼한 짓을 하겠는가? 진심으로 국민을 위하고 정의를 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을 보라. 실상 그들은 서로 정치 권력을 잡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옥에 쳐넣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 갖은 짓을 다했다. 아모스가 등장했을 때는 여로보암 2세 때였다. 여로보암 2세의 다음 왕은 아들 즈가리아이고, 그 다음 왕은 ‘살룸’인데 살룸은 즈가리아가 왕이 된 지 6개월 만에 군대를 끌고 들어가 즈가리아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왕이 므나헴인데 그는 또 어떻게 왕이 되었나? 살룸이 왕이 된 지 불과 1개월 만에 또 역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이다. 그는 또 왕이 된 후 자기를 반대했던 “다부아”라는 성을 완전 포위하고 그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여 보복했다.
“므나헴은 …… 다부아 성을 쳐 그 안에 살던 사람을 모두 죽이고 …… 온 지역을 쳤다. 심지어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가르기까지 했다”(왕상 15:16).
그는 또 주변 국가의 미움을 사서 국제적으로 곤경에 처했다. 그럴 때 그는 부자들로부터 성금을 받아서 매수공작을 펴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럭저럭 어렵게 10년을 통치하다가 죽었다. 그 다음 왕이 아들 브가히야이고 다음이 베가인데 베가는 브가히야의 경호원이었다. 브가히야가 즉위한 지 1년 만에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리고 또 5년 만에 호세아가 베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 호세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다. 결국 아모스는 14년 동안에 6번이나 왕위 찬탈 사건을 겪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거룩한 척했고, 사심이 없는 척했고, 가장 신앙심이 두터운 것처럼 했다. 자연히 나라가 위태롭고 시대가 어렵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때 기독교가 그것은 정치인들의 일이니 우리는 신앙생활이나 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7 그럴 수 없다. 또 1년이 멀다 하고 정권이 뒤집히려 할 때마다 잽싸게 뛰어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종교인이 할 일일까? 아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그 시대에 바른 심지를 세워야 한다.
그럴 때 으레 일어나는 것이지만 지도자들은 거짓되고 허위에 찬 생활을 한다. 그들은 몰래 ‘겨울 궁 여름 궁을, 상아로 지은 궁’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서 술을 따르고 기생들을 끼고 놀아나고 있었다.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면서, 또 제물을 드리면서도 매점해 놓은 곡식을 팔 생각, 저울을 속이고, 돈으로 사람을 매수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재판을 억울하게 하고 언론을 조작한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을 여지없이 짓밟는다. 본문 5장 7절을 보자.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자들을 미워하고(=바른 재판을 못하게 하는 것),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아(=바른 언론을 탄압하는 것), 너희가 힘없는 자들을 마구 짓밟고”(=정치적 탄압을 마구 행사한다).
백성들은 그 위선을 모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 공법과 정의, 공의와 사랑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역성서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홀릴지로다”로, 공동번역 성서도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라”고 명령적 요구로 번역하고 있으나, 어떤 학자의 사역을 보았더니 “공의는 물처럼 쏟아버리고 정의는 냇물처럼 흘러가게 하니”라고 번역해 놓았다. 이 사역을 채용한다면 그들은 겉으로는 정의를 세우고 공의를 세우는 것 같으나 사실은 공의와 정의를 더러운 물 버리듯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의 표리(表襄)가 같지 않을 때, 그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허위의식, 위선, 속임수가 가득 찰 때 그것이 정치적인 일이고, 정치인들의 일이니 그것은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나님은 먼산을 쳐다 보셨던가? 그것은 정치적 문제니 종교인은 그저 종교나 믿자고 했던가?
아모스에게서 보는 신앙인의 모습은 표리의 사이에 파고드는 파수꾼이었다. 그는 이 모든 허위의식, 거짓, 속임수, 위선을 몰아내고 안팎이 같은 사람, 안팎이 같은 세계를 만드는 파수꾼이었다. 이 파수꾼이 파수를 잘못 보면, 그래서 표리가 영 달라져 버리면 그것은 멸망을 가져 온다.
오늘도 허위의식과 거짓과 속임수와 위선의 술수가 우리 자신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 네 찬양을 받으마, 네 번제를 받으마. 네 예물을 받으마’ 라고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허위를 벗자. 거짓을 버리자. 위선의 껍질을 내던져 버리자. 이 외침은 우리 목에 가시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시가 되어야 한다. 가시가 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더 큰 화가 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시다. 죽지 않게 하는 사랑의 가시다.
나아가서 오늘 이 사회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 같으나 권력을 탐하는 허위에 대하여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공의를 행하는 것 같으나 거짓을 꾸미고 있는 표리의 사이에 파고드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있고 공평을 행하는 척하면서 속임과 술수를 자행하는 현장에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가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신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회가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