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찔린 가시
1980년 8월 24일 / 마가복음 1장 14-15절(마 4:12-17)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사랑의 가시
7월에는 내내 교회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한다는 이유로 계엄사가 나를 불법 구금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발표되었다. 김대중이 광주의 폭동을 일으켰고 나라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을 5월 17일에 이미 체포하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터무니없는 억지가 세상을 장악했다.
7월 말에야 풀려나 다시 강단에 섰다. 불의에 항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항변하고 저항할 수 없었다. 아, 이 절망의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나 계신 것인지.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온 기독교인들이 몰려간다. 은혜를 받는다. 행복해 한다. 황흘경에 들어간다. 종교적 체험이란 것이 있다. 종교이므로 기독교에도 여러 이상 경험이 있을 수 있고 종교인이므로 그것을 바랄 수도 있다. 이런 행태는 일종의 소극적 도피행위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약한 인간들 아닌가.
그러나 악에 저항하는 성직자의 행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8월 6일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우리가 지목한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을 모시고 드린 기도회다. 그를 축복하고 도덕의 옷을 입힌다. TV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시간마다 그 장면을 반복하여 방영했다. 전국적, 국가적 지도자로 치켜세우고 우러르게 하는 추한 정치행위였다. 그러나 그들 성직자들은 지탄받지 않는다. 그들을 정치목사라 하지 않는다. 나같은 목사는 정치목사이고 저들은 신앙에 정진하는 거룩한 목사들이라 한다.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다. 목사들이 감지덕지로 참여한다. 전두환의 불의한 세력은 힘을 얻어 간다.
한국은 새 세대의 지도자가 필요하며 10ㆍ26의 난국을 피하지 않고 수습했기 때문에 자신이 국민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고 전두환은 당당히 말한다. 외신들은 “전두환 장군의 영도력을 한국민들은 폭넓게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의 발언은 우리에게 치욕적이었다. 우리 국민성이 들쥐와 같다는 것이다. 누가 지도자가 되건 그 지도자를 따라가게 될 것이고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현실을 보시고 계시는가?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길은 하나뿐이다. 둘이 아니다. 사잇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바르게 …… 그렇다! 바르게 가는 것뿐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갑자기 신비스런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열정적으로 소리도 질러보고 부흥회도 다녀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신앙이 오로지 나 자신과만 관련된 것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생겨난다. 나를 축복하고 내 안전을 보장해 주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예수에게서 보는 신앙, 구약성서의 여러 신앙의 선조들이 가졌던 신앙은 어떤 것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적선동 골목이나 미아리 고개 쪽을 가 보면 무슨 운명철학사 OOO, 거북이점, 여학사 OOO, 백운거사 OOO, OOO 작명소 등 수없이 많은 간판을 보게 된다. 또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고 하고 신통하게 들어맞는다고 감탄하는 경우도 많다. 우주에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점쟁이들은 그 신비스러운 원리를 풀어내는 마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년월일을 가지고 ‘갑을병정 …… 자축인묘’ 하는 ‘육십갑자’(六十甲子), 소위 육갑(六甲)을 짚어서 신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어떤 비밀을 보아낸다는 것이다. 혹은 거북이를 통해 …… 여하간 신통한 방법으로 과거를 알아 맞추고 또 미래를 내다 본다.
신의 세계에 숨어 있는 비밀을 알아내어 어떤 사람의 과거가 어땠고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사람의 운명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하여도 알아낼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신통하게 맞아 들어가면 일이 있을 때마다 마치 아편쟁이처럼 그 운명 풀이를 듣지 않고는 못견디게 된다. 특히 자신의 처지가 불안스럽고 또 떳떳치 못할 때 더욱 그런다. 실력이 든든해서 대학 입시에 자신이 있는 학생의 부모는 점쟁이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원서는 내놓았는데 과연 붙어 줄 것인지 불안스러워 견딜 수 없는 때 점쟁이를 찾는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붙게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붙는다는 예언에 희망을 두고 입시 때까지 겪어야 할 불안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이다.
점쟁이의 점, 예언은 꼭 들어맞아 주어야 한다. 만약 번번이 맞지 않는다면 점쟁이 간판을 떼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동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학생, 특히 여대생들도 많이 오고 사회의 저명인사 부인들 심지어 내로라 하는 사람까지 찾아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사실상 이러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언조차도 점쟁이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다. 무엇인가를 신기하게 들어맞춰야 한다
성서에도 예언자라는 말이 있고 예언활동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자는 점쟁이처럼 우주의 신비를 알아낸다거나 우주의 원리를 남보다 앞서 알아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해 준다는 식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사실 성서의 에언자는 많은 경우 그 예언이 꼭 들어맞아 주기를 바라기보다 오히려 예언이 맞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예언을 한다. 또 실제로 들어맞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요나’라는 예언자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에 간다. 거기서 그는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을 호되게 예언한다. 그는 만 하루 동안 니느웨 성을 돌아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쳐댔다. 그런데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했고 임금도 용상에서 내려와 굵은 베옷으로 갈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했다. 40일이 지났는데도 니느웨 성은 멸망하지 않았다. 점쟁이의 점, 미래를 운명적으로, 도식적으로 예언하는 것과는 성격이 퍽다르다. 들어맞지 않기를 기대하는 예언이었다.
예언자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나비’(נָבִי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예언자라는 한자 뜻대로 “미리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는 ‘나비’라 하지 않았고 호제(חֹזֶה) 또는 로에(רֹאֶה)라고 불렀다. 이 말의 뜻은 “미리 말하는 자”가 아니라 그저 “보는 자”라는 뜻이다. 성서의 예언자란 “보는 자”이다.
무엇을 본다는 것인가?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일, 아무나 하고 있는 일을 보는 것이다. 세상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소리를 듣고, 역사의 현실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현실을 보아내는 냉철한 판단력이다. 그들에게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이 있었다. 잠이 덜 깬 것 같은 몽롱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예수는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고 첫 예언의 소리를 쏟아놓았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 역시 육갑(六甲)을 짚어 보고 우주적 신비를 꿰뚫어 보시고 하신 말씀일까? 하늘의 신비를 풀어내서 점쟁이처럼 말씀하신 것일까?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늙어 죽게 되었는데도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했다. “예수의 예언은 맞지 않는구나!”, “왜 온다던 때가 오지 않는가?”라고 실망했다. 그뿐 아니다. 그 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이 예수의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무효다. 그것은 이 말씀을 점쟁이의 예언 따위로 듣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전혀 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점술로 그러한 선언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았다. 그 시대를 보았다. 이 선언의 말씀은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시대의 형편을 각각 이렇게 적고 있다.
“요한이 잡힌 후에”(마가복음).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마태복음).
여기의 공통적인 상황은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였다는 것이다.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요한은 그 시대의 예언자였고 양심이었다. 잘못 가고 있는 시대에 저항하여 정의를 주장하고 모든 사람의 회개를 외치던 사람이었다. 종교에 새 기운을 불러 일으키려 했다. 타락한 종교를 회생시키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편중된 부를 함께 나누는 사랑의 정의를 주장했다. 정치적으로는 당시 왕이었던 헤롯의 적이었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부인을 취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횡포를 자행했다. 그는 함부로 백성을 짓밟는 헤롯에게 저항했다. 헤롯도 요한이 옳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요한을 살려 두지 않고 급기야 죽여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쉽다. 그러나 예수는 그 사건을 보고 더 이상 집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것이 예수가 길거리에 나서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4장 12절 이하에서 당시의 상황을 더 부연하고 있다. 백성들은 어둠에 앉아 있고 사람들은 죽음의 그늘진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백성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을 떳떳하게 내놓지 못하고 컴컴하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신을 숨겨 놓아야 했다는 뜻이다.
서부영화 같은 것을 보면 이 장면과 비슷한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악한 무법자가 술집에 들어 온다. 왁자지껄 떠들고 술 마시며 한쪽에서는 주사위 노름판이 흥겹게 벌어지고 있다. 무법자가 거기 끼여들어 주사위를 던진다. 7이 나오면 모든 것을 쓸어 간다. 무섭게 생긴 그는 주사위를 던진다. 3이 나왔다. 그런데 혼자 “야! 7이다. 다 내 것이다”라고 하며 쓸어 간다. 다음 판에는 2가 나왔다. 그런데 또 7이라고 소리친다. 갑자기 옆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툭 치면서 “저게 몇이야?” 하고 묻는다. 그는 얼른 “7”이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그것이 7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서로 몸을 숨기며 노출되기를 꺼려 한다.
이것은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부연해 설명하기를 사람들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산다고 했다. 모두가 죽음이 그늘을 내려뜨린 곳에서 겨우 숨을 쉰다. 양심을 없애버리는 때, 아예 양심의 소재를 없애버리고 ‘예’와 ‘아니오’의 자유가 박탈된 곳이 예수의 시대였다.
여기에서 예수는 저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 항변을 보았다. 들리지 않는 시대의 울부짖음을 들었던 것이다. ‘왜 그것이 7이냐? 엄연히 3이 아니냐? 엄연히 2가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7이고 말고요’라고 하면서 그의 혼 속에서는 ‘아! 이 비리의 시대여!’ 라고 울부짖는 것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3을 7이라 할 수밖에 없고 2를 7이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약함을 비통해 하는 신음을 예수는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가시가 되어 예수의 눈을 찔렀다. 그들의 항변은 가시가 되어 예수의 눈을 찔렀다. 그들의 신음은 가시가 되어 예수의 눈을 찔렀다. 그의 눈은 한없이 아팠다. 그는 눈을 감을래야 감을 수가 없었다. 외면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로 시작한 자신의 생애가 비극적으로 끝맺게 될 것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훤히 예측할 수 있었지만 눈에 찔린 가시를 외면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냉철한 판단력을 스스로 속일 수는 없었다.
우리의 역사 전체가 사실은 부당한 역사요 불안스런 역사였다. 여진족이 쳐들어오면 그들에게 만세를 불러야 했다. 당나라가 쳐들어 오면 당에, 한나라가 오면 한에, 일본놈이 쳐들어 오면 친일파가 되어야 했다. 아니면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먼 산을 쳐다보아야만 살아 남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등장하는 세력에 ‘예’만을, 아니면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고 있다.
해방 이후 36년 역시 언제 한번 자유와 정의, 양심의 시대를 살아본 것 같지 않다. 실력이 모자란 입시생이나 그의 부모처럼 항상 불안스럽게만 살아 왔다. 항상 양심은 접어 놓고 살아야만 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겨 놓아야만 했다. 죽은 것처럼 그저 따라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오죽하면 자고 일어나서 서로 묻기를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였을까. 세계 어느 민족도 이 같은 비참한 인사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점쟁이를 찾아 간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든 기독교든, 그런 고등종교를 믿으면서 그것을 통하여 어떤 신비스런 세계에 도취해 보려고 한다. 그것을 통하여 내일을 보장받아 보려고 한다.
냉철한 판단력 따위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가? 그것보다는 차라리 극렬한 종교적 흥분 상태가 더욱 좋다. 정신을 차리면 눈에 가시가 박히게 되지 않는가?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그래서 광신주의에 스스로 빠지고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함으로써 현실을 잊는다.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동적으로 마지못해 조금씩 조금씩만 끌려 다닌다.
오늘과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은 무엇인가? 밖으로 내놓을 수는 없으나 마음으로 신음하고 울부짖고 항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역사를 보고 계시는 주님의 눈에 가시가 되게 해야 한다. 이 역사에 그가 또 한 번의 선언을 하도록 하자.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리고 예언자의 정신은 무엇인가? 성서의 정신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혼은 어디에 있는가? 보는 데 있다. 비록 보는 순간 이 눈에 가시가 찔린다 해도 그래서 내가 고통스럽다 해도 보아야 한다. 신음의 현장, 울부짖음의 현실, 항변의 몸부림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신앙생활이었고 구약성서의 선조들의 신앙이었다.
기독교의 혼을 살리자. 예언자의 정신을 살리자. 성서의 정신을 우리 몸에 지니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