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을 창조하는 성령이여 오소서! - 성령강림절
[요한1서 1:1-7]
이기영 목사
[슬라이드]
[설교 전문]
1.
온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강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의 사귐, 정의와 진리 그리고 참된 삶이 그리워지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귐을 창조하는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무겁고 침통하게 힘들어하며 보내는 데서 생기를 얻고 깨어나 보고 싶음이 간절합니다.
요한서신들과 요한복음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서로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두 문서가 언어와 신앙 내용에 있어서 상당히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에 저자가 같은 인물이라는 주장과 그에 동조하지 않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싸움의 상대는 요한1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에 대해서, 즉 세상을 대표하고 있는 유대인들, 또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반면에, 요한1서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거짓교사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불트만, 《요한서신》).
요한1서는 일반적 형식에 속하는 서두와 종결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문제들을 해설하는 한 편의 설교라고 합니다. 그 주요 목적은 참된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 가르치는 이단적 사상에 대항하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본 서신은 공동체를 파괴적으로 위협하는 이들 거짓 가르침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쓰인 것입니다.
2.
요한1서 1장 1-7절은 요한이 전해주는 메시지의 중심사상이라고 보입니다. 요한이 전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과 교제(사귐)를 가지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과 수평적 교제를 갖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은 수직적 교제의 역할을 또한 감당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면 또한 하나님은 코이노니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코이노니아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가페(agape)를 하향적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만 코이노니아는 주고받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을 나타내어 다시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과 코이노니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은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을 베풀도록 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보고 만지고 경험해 본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오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코이노니아란 성경의 기본 주제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원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성령이 그것을 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3.
위에서 언급했지만, 성경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두 종류의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아가페(agape)이고, 다른 하나는 필리아(philia)입니다. 아가페는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 즉 성령이 공급해 주시는 일방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필리아는 주관적이며 서로 호감을 갖고 주고받는 친구 간이나 부부 사이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자연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번역하면 ‘사랑하다’(to love)가 되는 아가포(agapo)란 동사가 19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란 단어 속에 깃들여 있는 한 가지 개념을 위해서는 샬롬(shalom), 야다(yada) 등의 히브리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해 줍니다. 요한복음(14:9, 17:3, 10-11)에서와 같이 요한1서(2:22-24)과 요한2서(1:9)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사귐은 동시에 아들과의 사귐이기도 하고 그리고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우리의 사귐”이라고 나타낸 점으로 보아,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란 문장은 이것이 단순히(세속적으로) 인간 존재들 간의 사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더불어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 주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불트만, 《요한서신》).
요한1서(1:4)에서 말하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과 함께 주어지는 구원, 즉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그 기쁨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저자와 독자 간에 성립된 사귐 가운데서 맛보는 구원이지만 그러나 그 기쁨은 아직 완성된 기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의 존재는 결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계명의 요구 아래 서 있기 때문에 항상 되어가는 존재, 즉 “걸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불트만, 《요한서신》).
코이노니아에 해당하는 순수한 우리 한국말 하나를 소개 사용하면 소 우리, 양 우리(요 10:16)와 같이 쓸 수 있고 인칭대명사로는 ‘나’의 복수형으로 쓸 수 있는 ‘우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즉 한 울(fold)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우리(we)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가 되면 그 우리는 누구것입니까? 바로 형제와 자매입니다. 그런데 형제와 자매가 교제로 나누지 않으면 진정한 형제요 자매가 될 수 있겠습니까?(예수원 편지)
“하나님은 빛이시라”(요1서 1:5), 이 문장은 4장 8절과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문장과 또한 요한복음(4:24)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문장과 마찬가지로 결코 하나님의 본질을 그 자체만 가지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문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사상과 영지주의에서도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 신적인 것의 영역들 등의 빛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선’의 개념을 ‘빛’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빛’은 일반적으로 구원 특히 종말론적 구원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4.
요한1서는 이원론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영지주의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우주론적 이원론에, 즉 빛과 어두움을 두 개의 상반된 세력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1서와 요한복음은 어두움이 신적인 세력에 대립되어 있는 우주적 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폐쇄성, 즉 모든 인간이 각 개인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어 버린 폐쇄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빛의 계시가 인간에게 어두움 속에 폐쇄되어 있는 상태에서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과 “빛 가운데 사는 것” 간에서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불트만, 《요한서신》).
분명히 저자는 요한복음에 사용된 자료와 연관성이 있는 ‘계시설교’의 자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장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1장 7절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단이 6절과 7절 상반절 및 중반절에 분명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 속에 살아간다면 그런 주장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의 특징입니다. “진리”와 “거짓”의 이원론은 “빛”과 “어두움”이란 이원론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이 인간 존재의 양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요한복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적인 의미인 인식을 통해 밝혀진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실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진리가 “우리 속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1:8, 2:4), 우리가 “진리로부터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2:1, 3:19, 요 18:37), “진리 속에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요2서 4), 진리를 “알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는(2:21, 요2서 1, 요한 8:32) 같은 의미이면서도 여러 가지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진리를 행하는 것”이 본질적이고 실재적인 행동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와 대립된 표현인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생의 허무성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만일 진리가 본질적인 실재를 나타낸다면, 거짓은 비본질적이며 비실재적인 것, 허무한 것, 즉 근본적으로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짓말은(요 8:44) 거짓말쟁이로서 “처음부터 살인자”인 마귀로부터 유래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또한 그 안에 계시된 생명(1:2)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2:22) 도리어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합니다(5:10).
하나님의 빛인 것과 같이 또한 사랑이며(4:8, 16), “서로 사랑한다”(4:7-8)는 근거가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데 있습니다. “서로 간의 사귐”도 “서로 사랑합시다”(4:7)라는 명령형이 형제들에게 주어졌다면, 사람들은 “서로 간의 사귐”을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한 것 같이 신자들 상호 간의 형제적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5.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깨닫고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귐이 깨진 이 세상 한가운데서 사귐을 창조하는 것, 곧 화해의 사절이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악령이나 성령은 영이기에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역할과 결과는 알 수 있습니다. 악령은 대립시키고 분열시키는 힘(power of separation)을 말하면, 성령은 화해시키는 힘(power of reconciliation)을 뜻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는 이제 기적신앙과 기복신앙을 과감히 청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자기를 변화시키고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이기적이고 아전인수격인 기복신앙은 결코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물론 사회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전부 아니면 전무’의 도박이며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비약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안을 놓고서 하나님과 구차한 거래를 하려 들지 않습니다. 신앙은 파트타임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 존재, 전 삶을 걸고 하나님과 빅딜(Big Deal)을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몽땅 얻는 것입니다. 죽어아먄 산다는 ‘사즉생’의 용기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참 생명의 길, 참 신앙의 길입니다. 다음은 뉴욕 대학교 부속병원 재활센터 벽에 붙어 있는 〈축복의 기도〉라는 글입니다. 축복받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만 합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 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65-66).
6.
알렉산더 대왕이 사로잡은 해적에게 물었습니다. “바닷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해적이 대답했습니다. “온 세상을 괴롭히는 당신의 의도와 똑 같습니다. 다만 나는 작은 배를 가지고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같은 일을 함대를 거느리고 하기 때문에 제왕이라고 불릴 따름입니다.” 어거스틴(354-430)의 《신국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가 정의를 잃어버리면 노략질하는 해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인데, 어거스틴은 이 이야기를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가였던 키케로(기원전 106-43)의 《국가론》에서 빌려 왔습니다. 이 일화 외에도 《신국론》에는 키케로의 저작에서 가져온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어거스틴과 키케로는 공통점이 많은데, 두 사람 모두 국난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을 지키려고 분투하다가 정적 안토니우스가 보낸 군사들의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그의 머리가 로마 광장에 내 걸림으로써 공화정은 막을 내렸습니다. 어거스틴 시대에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었고 서고트족이 로마를 짓밟았으며 반달족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고, 얼마 뒤 로마제국은 멸망했습니다.
키케로는 어거스틴 철학의 스승이었습니다. 키케로의 저작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키케로는 내 생각을 확 바꿔 놓았습니다. 나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센 정렬로 불멸의 지혜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키케로는 어거스틴의 마음에 ‘지혜에 대한 사랑’의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 전에 그는 먼저 키케로의 철학으로 회심했습니다. 그리스 철학과 역사에 정통했던 키케로는 그리스 문헌들을 라틴어로 각색했습니다. 《국가론》만 해도 플라톤의 〈국가〉를 로마의 정치상황에 맞춰 다시 쓴 것이었습니다. 키케로는 국가란 인민의 것이며, 인민의 안녕, 복지야말로 공화국의 본령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키케로가 그리스 사상을 공화주의 언어로 번역했듯이 어거스틴은 앞의 시대사상을 신의 정의에 비추어 다시 짰습니다. 그렇게 재구성한 사상으로 그는 당대 로마를 비판했습니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떼와 같습니다.” 이 어거스틴의 말은 시대를 넘어서 꼭 깊이 기억해야 할 명언입니다. 최근 한국 개신교와 천주교를 비롯하여 원불교 등 종교계와 서울시민과 전국 곳곳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촛불시위로 정의와 진실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 정치사회 상황에서 선인들의 가르침이 어느 때보다 그리워집니다.
430년 8월 뜨거운 태양 아래서 76살의 어거스틴은 열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가 병상에서 움직릴 수도 없었을 때, 한 신자가 아픈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받기를 간청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다고 속삭였습니다. 그러자 신자는 꿈에 “어거스틴 주교 앞으로 가라. 그가 안수하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어거스틴은 아픈 사람의 손을 잡았는데 그의 병이 바로 나았습니다. 이 전해 오는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간절한 마음의 치유하는 힘 아닐까요. 지금 간절함으로 어거스틴의 후예들이 어두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사귐(코이노니아)을 창조하는 성령이여 오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