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10] 산 돌과 믿음의 공동체 – 가정의 달, 이기영 목사

산 돌과 믿음의 공동체 – 가정의 달

[베드로전서 2:1-10]

이기영 목사


[슬라이드]


산 돌과 믿음의 공동체: 영적 가정을 세우는 설계도 - 베드로전서가 제시하는 변함없는 영적 건축의 청사진

우리는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모퉁잇돌의 두 가지 얼굴: 구원의 돌, 파멸의 돌

위대한 건축가들의 숨겨진 반석

동양의 지혜와 성경적 진리의 만남 : 수신(개인의 신앙), 제가(영적 가정), 치국(사회를 향한 섬김), 평천하(하나님 나라의 확장)

행복의 두 가지 설계도: 압둘 라만 3세, 성 어거스틴

제가 : 영적 가정의 조건

관게적 자산의 힘: 퀴리 부부의 선택

가정 교육의 작동 원리(신명기 6:6-9): 쉐마

쉐마의 다차원적 적용 매트릭스

'가족'의 경계를 넓히다

24시간 동행하는 영적 가족의 삶

만인 제사장의 삶: 신령한 제사란 무엇인가?

완성된 영적 건축의 청사진

가정의 달, 당신의 집은 어떤 반석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까?


[설교 전문]


1. 베드로전서 해설


베드로전서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신약성서 문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루터는 베드로전ㆍ후서를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들과 함께 “우리가 마땅히 으뜸가는 책으로 간주해야 할 책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핵심이요 정수가 되는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1523년 이 서신을 주석하면서 이 서신이야말로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고상한 책들 중의 하나요 올바르고 순수한 복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서신은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즉 종말론적인 영광과 세례를 생각할 것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 서신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희망을 세례로. 세례 자체는 “산 희망”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 단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산돌에게로 나아가서(4절) 그들 스스로 산 돌이 되어 교회인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신령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5절). 6-8절은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을 동시에 제시하는 “모퉁잇돌”인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기능을 밝히기 위해 성서적인 전거를 끌어들입니다. 불복종하는 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현되었습니다(9-10).

5절에 그리스도는 “산 돌”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살게 하며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인 “하나님의 집”(4:17)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하나님의 성전이 기적적으로 건립될 것을 기대했으며, 이 성전은 믿음의 공동체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종말적인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기대는 원시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취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신령한 집”으로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다스려지는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집입니다(고전 3:16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사제”입니다. 기도, 찬양, 감사, 회개가 참된 제물이라는 제의의 정신화는 이미 구약에서 시작된 것이며 여기서도 시종일관 관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구하고 있는 “신령한 제물”이란 내면적이고 영적인 실재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선 존재를 바치는 것(롬 12:1, 빌 4:18, 히 13:15-16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굳건한 토대를 가집니다(고전 3:9-11). 믿음을 갖지 않고, “산돌”이 되어 “하나님의 집”에 접합되지 않은 자는 걸려 넘어지고 부끄러움을 당할것입니다. 그리스도가구원의 돌이 되느냐 아니면 파멸의 돌이 되느냐는 것은 오로지 말씀에 대해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W. 슈타게, 《베드로전서》,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1987).


2. 네 명의 대통령의 얼굴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의 러시모어 산에는 미국인이 존경하는 네 명의 대통령의 얼굴이 화강암 벽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아브라함 링컨의 얼굴입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큰 것으로, 워싱턴의 머리만 18m, 5층 건물 높이나 되며, 그 전체는 142m나 됩니다. 구름이 스쳐 가는 저들의 모습은 춘하추동 다른 인상을 줍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말씀을 자기 생의 이념과 지침으로 삼은 것입니다. 워싱턴은 미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자리에서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제퍼슨은 “미합중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서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링컨은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나 성경을 생의 교재로 삼고 그 가르침을 배워 그대로 실천하며 살려 하였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집무실 책상에 늘 성경을 두고 읽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고 연소자로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는 “어떤 방면에서 활동하든 그 생이 참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라”고 권했습니다. 확실히 러쉬모어 산상의 이 네 얼굴의 주인공은 “산 돌” 같은 모습의 사람들이며, 그들을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생의 용기와 힘을 줍니다.

베드로전서의 오늘 본문은 예수를 생명의 자원인 “산돌”이라 하고, 우리도 생명 있는 삶을 위해선 산 돌인 그에게 나아와 거룩한 집을 짓는 자로 자선을 맡기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의 모퉁이돌이기에, 누구나 이 돌을 기초로 의지하는 자는 결코 후회함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무시하여 버렸으나 하나님은 그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여, 그 위에 얼마든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전에는 이름도 없는 무명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천하고 무명한 자라 할지라도 산 돌인 예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때에, 그들은 귀한 왕 같은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실 러시모어 산정에 새겨진 네 명의 미국 대통령도 처음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생의 자원인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힘을 얻고 진리를 따라 꿋꿋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들이 살았던 때보다도 더 무섭고 힘든 세상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강인한 힘과 결의가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눈을 감으면 코를 떼어 간다며 정신 차릴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도 눈까지 후벼 가며 사람을 송두리째 없애려는 시대입니다.


3.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교훈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하여 자신을 바로 수양하고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나라도 잘 통치하고 천하가 평화롭다고 믿고 살아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일반적인 일상 생활에서 그 진리는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인격이나 자기 가정 하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에게 다른 기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결코 출가나 혹은 홀로 살거나 가정을 이루고도 인류의 복지를 위해, 자신이나 가족이 희생되는 특출한 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은 세상이 감당 못 할 축복받은 특별한 생이기에 일반의 생과는 구별됩니다.

오늘과 같은 지구촌의 좁아진 세상에서 세계나 나라가 잘되지 않고는 한 가정이나 개인이 행복하기 어려운 의미에서 “평천하치국제가수신” 같이 우선순위가 거꾸로 된 것도 알고 있기에 그런 문제는 별도로 생각합니다. 특히 가정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사람은 비록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 가족들을 더 괴롭히는 경우가 많습니댜 심지어 신앙을 가진 성인이 되어서도 철저하고 진지하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나 성경의 가르침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 불성실한 인격이나 생활자세가 그대로라면 그가 이룬 가정과 그 가족들의 불행은 더 심각해집니다.

“수신제가”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가지며 하나님 말씀을 듣고 공부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 예수를 닮고 그의 가르침으로 깨우치고 변하며 당장에는 다 그리 못할지라도 조금이나마 변하고 새롭게 되어 더 나은 생을 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에서든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더할수록 그의 인격, 언동, 책임감이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무익하고 해독이나 끼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동감하는 것입니다.

중세기 스페인의 사라센 제국의 황제 압둘 라멘 3세의 고백은 오늘날도 우리 모든 사람에게 생생한 교훈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는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큰 사라센 제국을 49년이나 통치했습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3억 4천만 달러의 연수입에 강력한 육해군을 통솔하고 3천3백여 명의 왕후처첩을 거느리고 6백여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가 숨질 때의 고백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린 날은 14일간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행복했다는 14일이 무엇 때문이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란 그 많은 돈에도, 여자에도, 지위와 권리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댜 진정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그 영혼은 참 평화를가질 수 없다던 어거스틴의 참회록의 고백은 다시금 행복과 평화와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4. 가정의 달에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가정과 가족이 하나님의 사랑하고 아끼는 가정과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활기 넘치는 우리의 가정이 되고 서로 염려하고 사랑하여 지치고 피곤할 때 위로와 안식처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공동체도 그런 가정과 같은 믿음의 공동체, 가족과 같은 믿음의 일원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가정이나 가족의 개념은 혈통이나 기독교 연고를 넘어 세상의 어렵고 외로운 사람들까지도 다 품어 안는 폭넓은 가정과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산 돌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믿음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아직 살아 활동할 때 다음 같이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천국에 있을 수 있는 그 능력 안에서 천국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분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분이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분이 도우시는 것처럼 돕고, 그분이 주시는 것처럼 주고, 그분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고, 그분이 구하는 것처럼 구하고, 24시간 그분과 함께 있으며, 빈궁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분을, 어루만지며 사는 것입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다 잊은 상태지만 신학교 시절 한 교수의 간곡한 권고로 읽은 책 《퀴리부인》을 회상해 봅니다. 메리 퀴리는 1903년에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남편과 사별 후 1911년에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저들 부부 과학자는 파리 소르본 대학의 리프만 교수 연구실에서 1894년에 만나 결혼하여 과학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더 큰 소득은 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부부가 된 사실입니다. 한번은 부인의 생일에 남편이 값비싼 가죽 옷을 선물로 사왔습니다. 저들 월급으로는 과분했고 저들은 과학 실험을 위해 한 푼이라도 저축하자고 약속한 터 입니다. 부인은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남편은 실망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행복해 할 모습을 상상하며 샀으니 꼭 받아 주오.”

“당신 마음은 고마우나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적인 것이요. 당신이 내 곁에만 있다면 무엇도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아요.”


풍족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격려와 사랑으로 과학의 풍부한 꿈을 이루어 갔습니다. 훗날 메리는 가죽옷 선물을 받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 귀중한 선물은 모든 시름을 잊게 할 만큼 나를 감동시켰지요. 하지만 선물보다 남편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했어요.”

어찌 큰 선물을 싫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퀴리 부인의 고백은 저들 부부를 더 행복하게 했습니다. 이런 마음과 마음, 정신적인 결합은 그들 간의 사별의 경우에서지만 노벨상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창출하는 생을 살게 한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부부의 이런 정신적인 화합과 협력은 실로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신명기 6:6-9는 쉐마 교육의 가장 중심적인 현장이 가정임을 보여 줍니다. 자녀 세대에게 쉐마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존립 자체를 확보하는 관건이 됩니다. 먼저 부모세대가 계명들을 심장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속 깊이에서의 감동을 일으킵니다. 자녀세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집안에서, 누웠을 때, 일어날 때든지 변함없이 사랑의 하나님을 강론합니다. 길을 갈 때, 문설주와 바깥문을 통과하여 사회생활을 할 때도 쉐마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의 심장에 새겨 주어야 합니다. 손목의 표와 미간의 표로 부착시킨다 함은, 손은 행동의 중추며 미간(두 눈 사이)은 판단과 사유행위의 중추기관입니다. 쉐마의 교육은 제2의 본성으로 만들 만큼 내면적으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우리 몸의 일부와 가옥의 일부가 되고, 거주지, 도시 안에 부착되고 유지돼야 합니다. 5월 가정의 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