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목사의 역사와 성서읽기 1] 새벽은 밤을 지낸 가슴에 온다 - 머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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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퍽 행복한 사람이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긍정적인 관심이면 더욱 그렇다. 나는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짧지만은 않은 사회생활을 한 셈이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있다. 또 은퇴하신 분들도 많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사람 부자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료들과 후배들이 분에 넘치게 많다. 더구나 그들 모두가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준다. 나는 이로 인하여 언제나 가슴 뿌듯하고 내심 자랑한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지난 해가 회갑이었다. 회갑이라면 옛날에는 늙었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회갑 나이를 늙은 나이라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육체도 건강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는 것도 전과 다름이 없다. 지난 총선거 때 386 바람이 불었다. 30세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이 386이란다. 선거 후에 “신 386”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30년대에 태어나 아직도 팔팔한 60대 나이의 사람을 이름한단다. 나는 분명히 “신 386” 세대다. 그렇다. 나의 정신도 생각도 젊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정신과 생각이 젊다는 스스로의 진단에 대해 “아니올시다”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게다. 그도 맞고 내 생각도 맞다!

하여간 늙지 않았는데 늙은 것을 공포하는 회갑 잔치, 그런 모임을 안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겠는가. 말을 꺼낸 후배들이 왜 없겠는가. 하도 펄펄 뛰니까 모두 포기했다.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짐을 덜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성과 실천사의 이종명 사장에 의해 우리 집이 가택수색을 당했다. 군사정권 시절처럼 영장도 없었고 사전 예고도 없었다. 내 아내의 입회는 허락되었던 모양이었다. 압수 물건은 나의 설교 원고였다. 이미 편집위원들이 생겼고 이 사장이 압수 임무를 맡았던 모양이다. 순순히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사실 잔치만이 아니라 회갑 기념으로 책을 내는 것도 사양했다. 그러니 출판 기념회를 가지려던 계획은 원천 취소되고 말았다. 절대로 안 하겠다 했다. 내놓을 만하지도 못하고 더구나 회갑과 연관한 출판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내가 늙었나? 막아냈다. 훗날 하자고 얼렀다. 출판 비용으로 몇 사람이 모은 돈을 가져왔다. 그것은 받았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냥 받은 것이 아니라 덥썩 받았다. 잔치는 안 하겠다 하면서도 축하금(?)은 받은 셈인가? 하여간 빚을 안게 되었다. 어떻게 갚나?

1967년 9월 수도교회 전도사로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문동환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셨다. 한국신학대학 교수가 본직이셨기 때문에 주일에만 나오셨다. 그래서 조력자를 구하셨다. 나를 오라 하셨는데 꽤나 망설였다. 선생님의 부르심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아직은 목회로 가겠노라 작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목회를 알아야 하고 목회 경험을 가져야 한다 하시기에 그 가르치심을 따르기로 했다. 단 3년만 있게 해 달라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6년 동안 수도교회에서 살았다. 3년은 내 예정이었고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71년에 부목사가 되고 1972년에 담임목사 일을 맡았다. 그리고 1982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로 나갔다.

수도교회는 몇몇 분의 가정이 중심이 된 교회였다. 최태섭 장로님 가정이 그 대표적 가정이다. 자연히 기업인, 회사원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사직동 산동네의 어려운 사람들도 적지 아니했다. 경제사회적으로 최상층과 최하 혹은 하상에 해당되는 분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적 성향을 말한다면 안정 지향적 여당 성향이라 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상당히 많은 대학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었다. 교회의 구성이 꽤나 다양했다. 만약 교인들을 의식하여 설교의 수위를 정하려 했다면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단한 갈등이 증폭될 때였다. 박정희의 3선 개헌 一 유신 선포 一 김대중 납치 一 계엄령 一 긴급조치 一 부마 사태 一 피살로 결말을 본 비극적 폭압정치 시대였다. 그리고 전두환의 김대중 사형 선고 一 5ㆍ17 학살 一 광주 민주화 운동 一 체육관 선거 一 대통령으로 이어진 강압적 살인정치 시대였다. 전태일의 분신 一 동일방직 사건 一 YH 여공들의 저항 一 정선, 사북 탄광사태로 이어지는 민중의 저항이 있던 때였다. 학생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확산되기도 했다. 교회의 성직자들 일부가 각성하여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고 사회정의 실현에 몸을 던지는 혁명적 변화도 이때에 생겼다.

나의 목회의 배경은 이러했다. 교회와 신자 그리고 악과의 투쟁이 서로 중복되거나 부딪침으로 나는 잠시도 편안할 수 없었다. 그 시대, 나는 갈등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나 자신이 갈등적 존재였다. 설교의 자리는 더욱 그러했다. 정의를 말해야 했다. 불의를 규탄해야 했다. 동시에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도 수행해야 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도 관리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어떻게 모두를 동시에 추진해 갈 수 있었겠는가.

시대의 문제는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곤 했다.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었다. 신학이 말하는 컨텍스트(context)다. 나는 이것을 가슴에 담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말씀을 기다린다. 텍스트(text)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말씀이 들린다.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컨텍스트가 나를 주춤거리게 한다. “교인”이다. 텍스트를 날 것으로 받게 해야 할 교인도 있고, 익혀서 주어야 할 교인도 있다. 자기의 삶의 현장이 너무 고달파 컨텍스트를 근본적으로 달리하고 있는 교인도 있다. 그리고 정보 형사, 기관원의 귀와 노트도 있다. 그들을 통해 설교는 정보가 되어 위로 위로 올라간다. 모두가 컨텍스트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텍스트를 먼저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우리에게 온다. 그 말씀을 받아 컨텍스트에 설교하고 우리는 복종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교실에서 배운 대로 할 수가 없었다. 컨텍스트는 예리하고 급했다. 숨이 찼다. 하나님께 나아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하나님!” “오, 하나님이시여!” 환희의 운율이 아니다. 내쉬는 숨으로 나오는 신음이었다. 시편의 탄식시를 그래서 즐겨 읽었다. 그리고 찬양시를 내 영혼에 채우곤 했다. 나는 지금도 컨텍스트→텍스트→설교로 이어지는 것이 더 나은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텍스트를 중하게 자리매김하는 데 대하여는 이의가 없다. 그러니 자칫 컨텍스트를 불고하게 된다. 물음이 없는 답이거나 물음 一 문제와는 관계없는 엉뚱한 답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종교를 공허하게 하고 존재를 추상화시킨다. 하여간 나는 컨텍스트, 우리의 문제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지금 우리를 싸고 있고 우리에게 도전해 오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가?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첫걸음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다양하다.

편집위원들이 압수(?)한 내 설교 원고를 검토했다. 결론은 역사와 성서라는 주제에 맞는 것만 골라 출판해 보자는 것이었다 한다. 이를 밝히는 것은 매양 사회적 설교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변명을 하고자 함이다. 목회자가 어찌 한 유형의 설교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출발은 다양해도 결론은 같은 데 도달했었다. 역사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主)이시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그는 창조의 주다. 역사 一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만 하나님과 관계가 이루어지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이다. 이것이 나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그것을 고백한다면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할 수 있게된다. 이것이 신앙이다. 십자가이고 부활신앙이다. 이것이 경건이다.

나는 주일 설교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때 설교 준비에 꼬박 사흘 이상의 시간을 쓰곤 했다. 목요일 밤에 시작하면 주일 새벽에야 끝낼 수 있었다. 20분 설교니 원고를 길게 쓰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치고 줄이고 또 다듬었다. 말투를 수려하게 하고자 함은 전혀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옹골지게 전하고 싶었다. 20분 설교로는 모두 담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문동환 목사님도 그렇게 하셨다. 한 주제로 세 주일 내지 네 주일을 이어서 설교했다. 하여간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들 수가 없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쏟아 설교했다. 손에 쥐가 나기도 했다. 강대상을 부여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지 공중에 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여름철에는 땀을 옷에서 짜낼 만큼 힘을 썼다. 항상 긴장했고 항상 최선을 다했다. 거드름을 필 여유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 이렇게 활자화된 원고를 읽게 되었지만 되살아나는 그때 그 날의 긴장을 억제하지 못한다. 나는 나의 지난날의 설교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정을 가진다. 언젠가 내 설교를 내놓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설교가 훌륭하다 해서가 아니다. 그 시대를 이렇게 살았노라, 그 시대의 성직자, 목회자가 이렇게 고뇌했었노라, 이런 것을 증언하고 싶었다. 혹 너무 가볍게 하는 설교를 듣게 되면 나는 홍분을 가누지 못하게 된다. 만담이나 교리, 교훈 일변도의 설교를 듣게 되면 하루 종일 우울해진다. 교양강좌 같은 설교도 답답함을 일으킨다. 설교는 그게 아닌데. 언젠가 감히! 감히! 감히! 내 설교를 공개하리라 했었다. 그 설교의 상황과 설교를 위한 신학적 추적을 더듬어 회상해 내고 그것을 함께 덧붙여 설교 실습의 틀로 내놓아야겠거니 벼르고 있었다. 이렇게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따라서 은퇴 직후를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 그때가 되면 내놓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와주는 사람도 다그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돈을 모아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원고를 빼앗겨 출판이 이루어지게 되는 공사는 나에게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퍽 고맙다. 나의 동료들인 편집위원들과 출판위원들게 감사를 드린다. 실무력을 보탠 이정희, 이경호, 전광희 …… 목사들 그리고 특히 이종명 사장에게 감사한다. 또한 감사를 하자면 수도교회 교인들에게 해야 한다. 이 설교를 들어 주었으니 그들의 인내가 놀랍기만 하다. 그때의 수도교회 교인들에게 이 책을 일일이 증정하고 싶다. 감사의 뜻이다.

나는 지금껏 내 아내를 공석에서 치켜세운 적이 없다.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되기까지는 …… ” 이런 말을 낸 일이 없다. 이번에도 아니 하겠다. 이것이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나는 안 한다. 그러나 가슴 깊이에 있는 진실한 말을 ……. 고만두자.

부족한 종을 들어 말씀하신 하나님!
당신의 이끄심과 도우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용기와 힘을 주시어 시대를 열어 가신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은 역사의 주이십니다.
당신은 삶의 근거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갑시다”(빌 3:16).

내가 좌우명처럼 여기는 성서 말씀을 공개하고 이 글을 마감한다.

2000년 5월 31일
최태섭 장로님 2주기 추도식에 다녀와서
김상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