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누릴 수 있을까? - 부활절
[고린도전서 15:1-8, 16-18]
이기영 목사
[슬라이드]
[설교 전문]
부활절은,
어두움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죽음 역시 생명의 한 과정일 뿐이므로
결국에는 빛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빛과 어두움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겨울과 봄의 싸움이라든지
얼음과 태양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에 대항해서 싸우는 죄인들,
더 나은 표현을 들자면,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의 싸움입니다.
성금요일,
그 싸움에서 하나님은 패자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자가 되심으로,
아니 스스로 패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심으로
부활절에 승리하셨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부활의 승리, 평화
우리는 매년 교회력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가장 큰 의미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화목의 죽음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 사도 바울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사도들의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세계 속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스스로 정복할 수 없는 개인 악과 집단 악-그 거대한 심연 같은 죄악과 그 죄악의 열매로서의 사망-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죄 없는 인격으로서 모든 인간의 더러움과 부끄러움과 죄악 등을 대신 짊어지고 그 몸으로 속죄 제물 삼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스스로 택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난의 종’의 자발적 대속적 죽음입니다. 만인의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짐에 눌리어 하나님에게까지 버려진 절대 고독까지도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티끌만한 증오도 원망도 복수심도 후회도 없이 자기를 죽이는 살인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빌며 사랑으로 화신으로 마감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것은 만인대속의 대업을 죽음으로 나타낸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아멘’으로 나타난 것이 그의 부활입니다. 그는 죄를 짊어짐으로 죄를 정복했으며 죽음을 당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었습니다.
2. 부활은 믿는 자들의 역사적 증거입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래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을 체험한 자들은 오직 예루살렘의 그의 무덤을 찾아간 충성스러운 여인들과 도주한 갈릴리의 제자들뿐입니다. 그후에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세상의 주님과 구주라고 공공연히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비교적으로 확실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놀랍게도 이 증거는 충분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의 빈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그의 부활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 여인들과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확신뿐입니다.
예수의 죽음 후에 분명히 대단히 많은 그의 남녀 제자들의 그의 현현을 접하였으며, 이 현현은 예수를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 보게끔 하였습니다. 특히 누가는 과학적 소양이 있는 의학자로서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눅 1:3) 뒤 복음을 저술했으니 그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말한 부활 기록은 부활의 최초 전승으로서 하르낙(Harnack)의 연대표에 의하면 기원후 53년에 쓴 것으로 최고(最古)의 부활 기록입니다. 이 부활 전승의 기록은 바울이 회개한 후 1, 2년 내에 된 일로서, 이 기록을 고린도에 보낼 때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도한 게바, 열두 제자, 그리고 500명의 형제에게 한 번 출현했고, 이들 중 태반이나 아직도 살아 있다 하였으니, 그러면 자기 이외에 적어도 250여 명의 현존한 목격자를 열거하면서 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보도는 특별히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경험의한 인격적인 보도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주님을 “보았다”(고전 9:1).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내적인 경험입니다. 이 현현은 기대 밖에 그리고 완전히 그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게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요,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핍박하도록 위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후에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붙들렸다”(빌 3:12)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경험이 그를 완전히 회심시켰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목숨 걸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내가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에 내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고집하던 도마도 “내 주 내 하나님!” 하고 부활하신 주 앞에 그의 부활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진실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3. 빈 무덤과 현현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은 ‘무덤이 비었다’는 ‘빈 무덤 이야기’와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현현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관련시켜야 합니다.
부활 이야기는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 ‘아직도 캄캄한’ 미명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견은 어둡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확실히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어두움은 온 세계를 덮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은 것은 예수가 운명하고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때였습니다. 죽은 시체라도 찾으러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을 보고 시체마저 누가 훔쳐갔다고 여겼기에 절망 속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주로, 메시아로 믿고 그가 하늘의 권세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로마와 원수나라들에 대한 원한을 풀어 줄 것을 기대했으나 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무님에 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절망 속에 눈물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리고 천사의 음성을 들은 것은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리라”(마 28:7)고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무서워 떠는 여인들에게 예수는 친히 “무서워말라”며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리라 전하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빈 무덤에 놀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저들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예수는 이런 저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부활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택한 소수의 증언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깊이 유념할 것은 부활한 예수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알아보도록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잃고 슬퍼하며 그를 찾던 하나님의 택한 증언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가 부활한 그때에도 그는 로마인이나 헬라인, 유대인들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문을 잠그고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바닷가에 나타나 물을 마시고 생선을 먹었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떤 모습의 예수인지에 대해선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는 택함 받은 소수의 제자들, 비록 저들이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실망 가운데 있었으나 그들에게 나타나 보였다는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역사적 사건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우리 삶의 한 방도로, 신앙의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 증언을 그렇게 받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발견하며 비로소 흘린 눈물은 기쁨으로 변하며 생은 새롭고 의미 있게 됩니다.
4. 부활신앙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 우리의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고전 15:17). 사도들은 부활을 그리스도교의 터전으로 잡고 이를 증거하기 위하여 사도를 택정하였으며(행 1:22), 사도 바울도 ‘예수의 십자가와 그 몸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온 초대교도들이 외친 것 또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을 우리가 다 증거하노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의기충천하여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도 삼고 구주로 삼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죄를 사하여 주고자 하셨다”(행 5:30)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부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는 “주시오 그리스도시며”(행 2:36), “생명의 주”(행 3:15)요, “구원의 유일한 이름이시라”(행 4:12)고 베드로는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도 또한 이 부활로 말미암아 최후의 입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반드시 승리함을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만약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셨다면 이 세상은 죄악과 저주, 거짓과 절망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계속 진리를 외치고,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생명의 존엄을 일깨워 온 것은 부활신앙을 가진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거짓에 대한 진리, 불의에 대한 정의, 미움에 대한 사랑,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부활신앙의 승리를 실천할 때 참 평화의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가 부활의 내면적 실재에 관해 좀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는데, 최소한 부활절에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살아갈 능력, 사랑할 은총, 존재할 용기를 위한 능력을 가져다주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를 부인했고 배반했으며, 포기했고 오해했지만, 예수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는 그 자체에 의해 열린 해방(멸망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인간과 탄식하는 피조물의 해방)의 역사의 지평 안에서 하나의 의미심장한 진술입니다.
5. 부활의 전망과 자연적 전망에서 본 부활
그들은 또한 종말에 있을 신자들의 부활도 선포했습니다. 그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에도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삶의 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권세에 정복당했습니다. 종말에는 영원한 생명체로서 영의 몸 영광의 몸 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부활한 예수가 삶과 죽음의 주가 되었습니다(마 28:18).
예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봄 축제와 함께 경축해 왔습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유럽에서 ‘부활절’을 말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경험을 여름의 시작과 함께 경축해왔습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오순절’을 말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날의 아침, 한해의 봄, 그리고 생명의 출생에서 자연적인 유비를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자연의 재탄생에 대한 기쁨과 이에 대한 피조물의 줄거움이 경축되었습니다. 아침, 봄 그리고 탄생은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자연스러운 리듬에서 벗어나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만물이 영원한 생명으로 새로이 창조됨으로써, 사멸할 온 자연이 구원될 것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부활신앙은 평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게오로그 피히터는 《유토피아의 용기》에서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 세 가지를 지적하기를 현대인은 유토피아를 그리다가 원자탄을 만들었고, 현대인은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져 인구 폭발 현상이 일어나 가난한 나라는 더욱 빈곤해졌고, 현대인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활은 편리해졌으나 환경오염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대의 위기를 핵전쟁, 빈곤의 갈등, 환경오염으로, 이 세 가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평화”라 했습니다.
참 평화는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지난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ㆍ영적으로 인간답게 숨 쉬고 살 수 있을 때 바로 그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평화는 인간이 진정 참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하고, 이 지구상의 생명이 자라고 인류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평화는 정의의 실현인 것입니다. 정의란 인간 서로가 올바른 관계에 서서 의롭게 사이좋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平和’라는 한자 두 글자를 보아도 ‘벼’ 즉 밥이 모든 입에 골고루 들어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빈자들의 어머니로 평생을 살다가 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은 왜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기자에게 “우리가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어떻게 하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데레사는 “우리가 서로 나눔으로써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평화도 ‘의로운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러한 평화를 이루어 가는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평화의 구주가 되십니다. 사도들이 로마에서 예수를 전할 때, ‘평화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겨레는 역사의 올바른 선도자, 양심의 구심점, 희망의 밝은 빛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 갈구를 채워 줄 역사의 근본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변혁의 누룩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승리를 믿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존재한다면, 우리의 활동무대는 교회이며 동시에 세상입니다. 갈수록 물질과 향락이 지배하는 세상에 복음적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우리 스스로가 복음적 부활신앙의 삶을 살고 세상에 나아가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부활신앙의 확신을 갖고 구원의 선포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부활신앙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승리와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7. ‘남북교회와 민족도 하나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수많은 상념과 고뇌로 격동하던 기나긴 어둠과 죽음의 밤도 주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이 말이 어찌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말이겠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당신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임을 믿는 남과 북의 교회와 민족에게 힘을 주소서. 대립과 갈등으로 아직도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동족끼리 더 미워하며 지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고 숙명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픕니다. 이 죽음과 같은 분단의 세월을 걷어 내시고 이 땅의 평화의 통일, 부활의 승리를 이룩하여 주소서. 이 민족에게 아픔과 고뇌의 시련을 주심은 대속하는 고난의 종을 일으키고자 하심의 섭리라도 있으시다면 우라 남과 북의 교회가 먼저 자각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하소서. 어둠의 역사를 대속할 고난의 종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한반도의 통일을 통한 평화는 동북아 평화의 길이며, 나아가 세계세의 평화를 위한 길이며, 주님께서 걸어가시는 평화의 길입니다. 우리 남과 북의 교회와 민족이 이루는 평화의 길을 볼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오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의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본을 보일 수 있게 하소서. 이 일이 결코 꿈이 아니기를 믿고 기도드립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님, 우리와 진정 함께 하소서. 부활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서한국」 2013년 5-6월호, 통권 2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