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앙 – 부활절
[누가복음 24장 1-12절]
이기영 목사
[슬라이드]
[설교 전문]
1. 만물이 부활하는 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에 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중요한가요? 그리고 부활신앙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을 믿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삶은 죽음도 감히 가두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당시의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부활사건은 계속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을 맞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시대의 어떤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읊었지만, 일제의 암흑 시대에도 봄은 어김없이 왔던 것처럼 오늘도 만물의 소생의 봄의 계절은 찾아옵니다.
겨울은 생명을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겨울은 추위대로 대지를 돌처럼 동결시켜서 싹들도 영원히 질식시켜 근절시켜 버리듯 완전히 내리누르고 가두어 버립니다. 만일 이 겨울이 오래 계속된다면 갇힌 생명들은 땅 속에 묻힌 채 그대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소생의 봄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봄은 땅에 갇힌 생명들을 불러 일으킵니다. 땅에 갇혔던 생명의 싹들이 굳은 흙덩이를 떠밀고 굳게 밀폐시킨 무덤을 막은 큰 돌을 떠밀고 나오는 어떤 역사적 사건처럼 만물을 소생시킵니다.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봄을 맞은 새싹의 순 끝은 한없이 부드럽게 싹 트고 꽃을 피웁니다. 땅에 갇힌 생명의 씨앗들은 봄을 만나기 위해 안간 힘을 다 쓴 결과도 있겠지만 어떤 신비한 위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안병무, 《생명을 살리는 신앙》, “오늘의 부활현장”, 19-28)
2. 부활의 의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도 생명을 가두지 못한다는 인류 역사와 결정적 사건을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부활은 봄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세계에 널리 퍼져서 무덤 속에 갇힌 수많은 혼들을 불러 일으켜 돌처럼 굳어진 자들의 숙명적인 삶, 구조적인 박해의 돌문을 열고 일어나게 합니다. 부활의 메시지가 봄의 태양이라면 그 소식을 들은 혼들은 봄의 새싹들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봄의 계절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횔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이 절망에서 소생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사선을 헤매는 자가 다시 소생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는다는 사실은 현존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부활은 옛 몸의 회복이 아니요, 옛 생명의 회생도 아닙니다. 옛사람의 죽음에서부터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완전한 죽음, 그 죽음에서부터 부활하는 또 다른 창조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의 부활사건, 예수의 부활하신 모습, 그 사건과 내용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개념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의 사건이며, 동시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1)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과거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서 죽고 장례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사건을 말합니다. 2) 현재적 성도의 부활 체험입니다. 예수의 부활 생명에 접하여 부활한 예수를 만날 때, 그 사람에게 또 다른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부활 생명을 그의 인격, 그의 영혼의 지성소에서 만나게 될 때, 전혀 생각지 못한 생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변화합니다. 옛 사람의 완전 죽음 함께 그리스도적인 새 생명이 나타납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날 때에는 반드시 인격의 변화가 오고 그의 인생이 변화합니다. 세계관에 변화가 오고 가치관에 변화가 오고 그의 인생이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현재적, 실존적 부활이라고 합니다. 3) 미래적이고 완성된 부활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이미 죽은 자, 산 자가 다 같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영광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종말론적인 부활, 이것은 예언적인 것이며 부활의 완성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그 몸, 그 신령한 몸으로 우리 모두가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요. 2천여 년 동안 우리 신앙인들이 믿어 온 유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 있는 부활, 이것이 현존하며 또한 종말에 있다는 것입니다.
찰스 알렌(Charles L. Allen)은 《하나님의 정신병학》(God’s Psychiatry)이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습니다. 첫째, 신체적 시력인데, 우리가 눈을 떴기에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고 여러 가지 생각도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정신적 시력입니다. 이성이 밝아야 하고,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입니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력으로 진리를 알게 됩니다. 셋째, 제3의 시력이 필요한데. 바로 영적 시력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만이 하나님을 볼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영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3. 부활의 역사적 증언들
누가복음 24장에 “연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희랍어로 ‘디아노이고’라 하는 이 단어를 다르게 번역 사용하였습니다. 31절에는 “눈이 밝아져”-눈을 열었다는 뜻이요, 32절에는 “성경을 풀어”-이것도 성경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또 45절에는 ‘디아노이고’를 직역하여 “마음을 열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여십니다. 주도권(initiative)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우리 눈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열어 주시고,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을 열어 주시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실 때에 성경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의심, 세속적인 욕망, 편견, 더디 믿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밝은 마음을 주시고 성경을 열어 주심으로 비로소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험의 재통합, 만남의 관계(encounter, confrontation)의 문제를 성경은 “뜨거워지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생각보다 먼저 가는 것입니다, 중생의 체험도, 생명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뜨겁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뜨거움의 신앙체험을 좀 소개하겠습니다. 사실 그는 신대륙 인디안들을 위한 선교에서 실패를 하고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1738년 5월 14일 새벽 5시 성경공부 시간에 베드로후서 1장 4절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는 이 말씀을 읽고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있던 중 그날 밤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역사적인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모임에서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웨슬리는 “그때 내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한 뜨거움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마음속의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웨슬리는 이 기쁨을 참을수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가 증거하였고, 그가 나가서 간증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령운동이 크게 번져 지금의 영국성공회로부터 감리교가 파생하게 되었고, 나아가 부패와 타락으로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한 영국을 도덕적, 영적 혁명으로 건져 내는 큰 역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다락방의 120문도의 성령강림의 뜨겁고 용기 있는 새 출발의 경험은 처음교회를 탄생시킨 것이고,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부활의 역사적 증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초기 교회는 바로 이 부활의 중거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죽음이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오늘에도 현존한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원래 증인이란 헬라어로 ‘마루투스’인데 영어로는 ‘마터’(martyr)라고 합니다. 순교자란 것입니다, 증인은 순교적 자세로 증거하게 됩니다.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교자만이 진실한 의미에서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그들은 목격자이고, 진실해야 하고, 정확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의 절기에 다시 성경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 귀한 경험의 순간, 모든 정욕은 물러가고, 감정이 순화되어 모든 지혜가 바로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보게 되고, 나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사명의 길도 깨닫게 됩니다. 절망의 원인은 정치나 경제, 외적인 세계에 있기보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 만나는 그 뜨거운 체험이 없기 때문에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로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예수 부활은 절망 속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새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 부활은 슬픔과 눈물과 한숨에서 기쁨과 줄거운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 부활은 불안과 공포의 무덤에서 일어나 새 생명과 산 용기와 새 꿈을 주셨습니다.
4. 죽임의 현장에서 새 역사를 이룩하는 부활
알버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예수전》에서 이렇게 그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한 청년이 단신으로 굴러오는 역사의 바퀴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바퀴는 그대로 굴러서 이 청년을 그대로 압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압살된 그 시체는 그 바퀴에 그대로 붙어서 돌아갔는데 그것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굴러가던 바퀴를 정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굴러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한 역사적 사실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조그마한 사건을 발단으로 마침내 로마가 굴복하고 역사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린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떻게 이런 인이 있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 것은 아니며 예수의 죽음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죽음은 불법자들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신했다는 데만 강조점을 두었는데 물론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불법자들의 손에 죽음으로서 바로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 죽은 그 죽음을 대신하고 그 죽음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 말 못한 채, 억울함, 배신, 수치, 모욕, 절망, 그 가난함, 그 울음, 그 고통을 안은 채 깔려 죽은 저들을 살려 일으킨 첫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이것은 죽이는 것을 최후의 무기로 협박한 권력자들에게서, 인간을 공포에서 해방했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불법자들의 손에 죽은 것처럼 그의 부활도 바로 불의한 자들에게 깔려 죽은 자들을 해방하는 사건이고 새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부활사건의 현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인데, 바로 어떤 물리적인, 폭력적인 힘을 최고 지상으로 알고 죽음으로 협박하면서 불법으로 구조적인 악법으로 순수한 민중을 억누르는 삶의 상황, 삶의 현장에서 찾아야 할 것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4ㆍ19 혁명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해 추악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 부정선거에 대해 무흠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것을, 우리 민족의 저항사에서 역사적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이후,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거의 1년간 지속된 거족적인 항일 민족 독립운동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ㆍ1운동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여 총칼의 무단통치를 강행한 지 9년 만에 일어난 민족적 거사로서, 한국의 민족, 민중운동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법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손에 죽은 듯한 민중들이 죽음과 대결하면서 그 위협 아래에서도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이만열, “3ㆍ1 운동과 한국기독교”,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2014, 335-355 참조).
그러한 의미에서 이 4ㆍ19 혁명, 3ㆍ1 운동 사건은 불법자들의 손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불법과 불의의 현장에서 억울한 혼들이 아벨의 피가 땅에 묻히듯이, 그대로 깔려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죽은 듯했다가도 땅의 들풀들이 밟혀도 또 솟아 살아나듯이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진리와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저들 속에 살아서 역사화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또한 역사의 예수는 눌린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셨습니다. 부활사건은 죽음까지도 그 뜻을 단절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임을 믿게 됩니다.이리하여 오늘의 세계, 지구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눌린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 소외, 부자유,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게 하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는 삶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된 삶에서 오늘의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5.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부활이야기
1) 톨스토이의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상류게급의 청년으로서 지식인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으로 별다르지 않는 일상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류층에 속하는 카츄사라는 소녀를 범했습니다. 카츄사는 그 뒤로 집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창녀가 되고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네흘류도프는 그 여인을 범하고 물건 값을 치르듯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할 일을 다 한 듯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외에 계속 많은 여인과의 관계를 당연한 일처럼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의하면 그 외에도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계기로 그 자신의 삶이 무엇인가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어느 날 “나를 속박하고 나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허위를 없애야겠다”고 합니다. 그는 단호히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습니다. “카츄사에게 나는 악당이다. 그녀에게 죄를 졌으니, 그녀의 죄를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하자. 그렇다. 그녀를 만나서 사과하자. 그렇다. 어린애가 하듯이 빌자. 필요하다면 결혼도 하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어렸을 때 하던 것처럼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눈을 위로 치뜨고 이렇게 말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가르쳐 주소서. 나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이렇게 비는 동안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살고 있던 ‘신’은 그의 의식 속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용기와 삶의 기쁨만이 아니라, 선의 위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모두 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취합니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말하는 부활입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인생론》에서 인간에게는 동물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이 있는데, 그 동물적인 내가 지배할 때는 결국 죽게 되고, 이성적인 내가 동물적인 나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하고 이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바로 갱생, 즉 부활이라고 진술합니다.
2) 도스토예프스키의 부활은 그의 저서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를 통해 보여 줍니다. 그는 8년 징역으로 시베리아 유배를 가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자수를 권한 소냐도 그리로 가서 그림자처럼 그를 돌보았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심히 앓고 난 다음 그의 고민을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는 대상도 없고 목적도 없는 불안, 미래에서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 끊임없는 희생,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이다. 또 새 생활을 출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나!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이미 감옥 속에 있으면서도 내적인 자유인이 된 그는 자기의 과거 행위를 다시 한번 속속들이 음미하고 숙고해 보았으나, “나의 양심은 태연하다. 물론 형법상의 범죄는 저질렀다. 그러면 법률조항에 비추어 보아서 내 목을 자르면 청산될 게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는 바로 자수했다는 그 점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절 기간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휩쓰는 전염병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파고드는 일종의 새 미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생물은 이성과 의지의 소유자입니다. 그 병에 걸리기만 하면 모두 절대자로 자부하게 되고 결국 서로 물고 뜯어서 죽입니다. 여기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인간의 교만이 결국 어디로 갈 것인지, 이성이라는 인간의 운명이 어디로 갈 것인지, 자기를 포함한 인간절대주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내다보았습니다. 양심의 소리, 윤리적인 갱생, 초인적인 명상, 그런 것들에서 그는 새 희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활의 경험을 합니다. 그는 맑게 갠 어느 날 어느 새벽, 통나무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광막한 넓은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높은 강가로부터 주위의 경치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먼 저쪽 강 건너에서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려왔습니다. 거기에는 햇빛이 활짝 퍼붓는 끝없는 초원 위에 유목민의 천막이 아득히 점을 이루며 까맣게 보였습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는 판이한 전혀 다른 인간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세상이 아닌 저쪽의 새 세계를 봅니다. 그는 이 세계를 표현하기를 “거기서는 시간조차 걸음을 멈추고 흡사 아브라함과 그의 가축 무리의 시대가 아직 사라지지 않을 성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소냐가 와서 말없이 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처음 굳게 잡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말할 수 없는 감격!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들은 둘이 다 창백하고 수척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든 창백한 얼굴에는 새 삶을 향하는, 다가오는 미래의 다시 남, 완전한 부활의 서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두 사람은 마음은 서로 삶의 끊임없는 샘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다리자 참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7년의 세월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까지 얼마나 어려운 고통과 한없는 행복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했습니다(안병무, 《생명을 살리는 신앙》, “부활신앙”, 53-60 참조).
6.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부활 이해
여기서 두 사람의 부활은 전혀 다르게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톨스토이에게 부활이란 내 윤리적 죄를 청산하고 희생적인 삶에 들어가는 이성적 윤리생활을 하는 ‘본래의 나’로서의 회귀라고 보았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좀 다르게 부활 이해를 하였습니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은 절대로 내게서 내 가능성의 실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저 피안의 마을, 시간이 정지된 참 자유하는, 이쪽의 생과는 전혀 다른 저쪽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활은 막혔던 너와의 담, 내 얼음장 같은 마음이 녹고 사이에 막힌 담이 툭 트여서 너와 내가 일치를 경험하는, 죽은 관계가 열림으로써 오는 새 삶! 그것은 지평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타협함으로써가 아니라, 너와 내가 지평선 넘어 저쪽 한 점에서 다시 만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저쪽에서 다시 만나는 그 지점,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상태를 그는 설명해서 ‘7년이 7일로, 기다림이 곧 기쁨으로’ 되는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는 일찍이 소냐가 주었으나 눈여겨보지도 않던 《성서》를 처음으로 손에 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 “이젠 이미 그녀의 확신은 동시에 나의 확신이 아니냐? 적어도 그녀의 강점, 그녀의 의욕이 곧 내 확신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는 사랑, 사랑 안에서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너와 나, 주관과 객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로 통일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바울이 말한 “그때에는 서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이 희미했으나, 또는 부분적으로 밖에 몰랐으나, 그러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 같다”(고전 13:12)고 한 바로 그 현실입니다.
7. 나가는 말
부활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는 신비에 싸여 있고, 앞으로 많은 논의 점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부활을 앞두고 한 대화가 나옵니다.
이 “나”를 “사랑”으로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마지막 날 부활하는 것 말고, 지금 사랑하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죽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부활은 사랑하며 더불어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희망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바울은 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으로 살며, 부활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