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36-38] 가이사의 제국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텍스트 버전], 이기영 목사

가이사의 제국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 18:36-38]

이기영 목사


1. 시작하는 말

요한복음 18:36-38의 말씀은 바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빌라도가 맞서는 장면입니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맞선 것인지도모릅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간단한 대화에서 몇 가지 요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의 왕국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로 맞섭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동부지역, 즉 로마의 속국 유대에서 빌라도의 손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로마를 처형지로 언급하지 않았고 빌라도의 이름을 들먹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내가 처형되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빌라도여, 네 군사들이 나를 감금하지만, 내 동료들은 나를 죽음에서 구하려고 당신들을 공격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의 로마제국은 불의한 폭력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나의 하나님 나라는 비폭력의 정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로마제국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유일하게 직접 언급한 내용은 예수의 비폭력과 빌라도의 폭력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폭력적인 억압이 두드러지는 로마제국과 예수의 비폭력 저항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뚜렷한 대조를 초대 그리스도교 역사 전개 과정에서 확인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는 빌라도에게 로마의 다스림은 의롭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은 의롭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그의 역작 《하나님과 제국》에서 다음의 질문을 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시대적 자각과 책임을 갖게 합니다. “고대 로마제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로마제국인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와 물질문명의 제국에 속해 살면서 그의 충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실제로 ‘이 세상’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을 지 지히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교 나리들의 휘두르는 오만한 폭력에 대해 지지하며 선동하고 있지 않는가? 제국과 문명의 폭력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2. 로마제국의 문화 이해

이제 우리는 주제의 본론에 대하여 생각하며, 2천 년 전의 고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래 로마는 오늘의 로마 시가 있는 곳에서 출발한 조그마한 도시국가였습니다. 그것이 이웃나라들을 정복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카르타고와의 숙명적인 포에니 전쟁에서 이겨 서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얻었으며, 다시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하고, 또 알프스 북쪽의 서부 유럽까지 병합하여 서남아시아로부터 현재의 영국에 이르는 거대한 지중해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인간중심적이고 현세주의적인 고대 그리스 문화는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오리엔트 문화와 융합하여 헬레니즘이라는 이름의 세계 문화로 등장하였습니다. 그 헬레니즘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로마 문화라는 이름으로 세계 문화가 되었습니다.

고대 물질문명이 그 전성기를 자랑하던 때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전성기였습니다. 그 전성기는 지중해 세계를 로마가 완전히 지배하게 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시대부터의 한 세기 간입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1세기에 이르는 기간입니다. 기원전과 기원후가 교차하는 시기로서, 예수가 사시다가 가신 전후 100년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 ‘팍스 로마나’의 전성기는 고대 물질문명의 전성기이며, 로마의 군국주의의 전성기였습니다. 본래 로마는 민주공화국이었는데, 지중해 세계의 패자가 되어 가면서 군국주의로 변모되었습니다. 군국주의가 로마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은 곧 폭력주의가 그 사회의 최상의 가치로 숭배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로마제국의 사회상과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박해, 순교

로마제국은 노예제도의 사회였습니다. 노예는 인간이면서도 인간 아닌 소와 말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인간의 비인간화의 가장 극단적인 것이 노예제입니다. 그러한 노예제가 인류역사상 가장 광범하게 존재했던 때가 로마제국의 시대였습니다. 다수의 노예와 그 노예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소수의 귀족 사이의 신분적 대립과 반목이 극심하였습니다. 로마공화국 말기와 제국 초기에 로마 곳곳에서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제국 안에는 절대 다수의 민중들이 있었는데,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들 광부와 전쟁포로 출신자들, 옥살이하는 자들, 각종 병자들, 약한 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의 물질문명과 폭력주의와 계급적 대립과 비인간화가 극도에 달했을 때, 잘못된 역사와 문화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에게 짓밟히고 있는 약소민족의 한 구석에서 무서운 비인간화의 원인을 파헤쳐 보자는 저항이었습니다.

로마문화의 가치체계 자체에 대한 선전포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선전포고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소수 무리의 낮은 소리 였으나 초대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사랑 진리와 평화 생명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7-8). 이것은 노예들, 곧 로마제국의 절대다수에 해당하는 민중과 함께 하는 연대의 기독론(Christology of solidarity)입니다.

그리스도와 민중의 연대는 단순히 고난 받는 종의 형태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는 민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성육신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 그리스도의 이름이요 존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민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황제를 큐리오스와 소테르, 즉 주님과 하나님으로서, 주인이자 구원자로 숭배하였습니다. 황제숭배는 결국 제국의 모든 다양한 백성들을 그들의 민족성과 문화를 넘어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는 끈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특전을 얻어 황제숭배에 참여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유대인들은 대신 매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황제를 위해 희생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전면 거부한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로마제국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을 여러모로 박해하였습니까? 이미 언급한 대로 거대한 제국이 전통과 문화를 달리하는 여러 민족들을 결속시켜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통치 원리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황제숭배였습니다. 황제의 모양을 본뜬 황제 상을 만들어서 거기에 절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숭배자들에게는 카드가 부여되기도 하였습니다. 카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의 생활에 유익을 얻는 데 편리한 도구 역할을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사를 보면, ‘황제가 주님이다’(Caesar is Lord)고 고백해야만 했고,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됩니다. 과연 누가 전우주의 보좌에 오르고, 역사의 진로를 좌우할 권세를 지니고 있습니까? 황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예배와 황제의 숭배는 정면으로 충돌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절대로 말할 수 없는 한 가지는 ‘황제가 주님이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교적 가치관과 사상체계에서는 어떠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절한다는 것은 곧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황제숭배를 우상숭배로서 배척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그러한 태도를 잘 이해할 수 있지만, 2천 년 전의 로마인들은 그들의 그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 상에 절하면 만사오케이인데도 절대로 절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괴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때리고 감옥에 가두어도 황제 상에 절하지 않았고 드디어 죽음을 당해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2, 3세기 사람들은,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그리스도를 찾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불타는 확신에 잡혀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았다는 감격적인 사랑의 행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복리뿐만 아니라 눈길을 밖으로 돌려 이웃들의 필요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줍니다. 또한 전쟁, 기근, 지진 속에서 구제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웃사랑의 구체적 표현이 자비의 사역인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장례를 맡아 치러 주었던 일입니다. 2세기 후반부터 로마와 카르타고의 교회들은 자기들의 신자들을 위한 묘지들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것들 중에 하나가 로마 시의 남쪽 아피안 가도(Appian Way)에 소재한 카타콤(Catacomb)이었습니다.

눈여겨볼 부분은, 박해가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관객이 원형경기장에서 순교의 모습들을 지켜 보았습니다. “순교자”(Martyr)란 원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데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증인의 모습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개종과 회심의 결단을 내린 이교도들이 생겼습니다. 이상의 진술들에서 보듯이, 당시 로마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초대 그리스도교회는 무엇보다도 고결한 순교자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모습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의 스승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죽음의 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고 돌파하면서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자각은 예수의 죽음 안에서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자신들의 옛 삶도 죽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극한적 죽음 방식 중에서도 보여 준 진리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과 증언, 사랑의 용서, 진리에의 순명, 권력과 악마와의 타협이나 야합의 거절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거룩함을,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생명과 진리의 승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과 진리’에 접붙임 받아서 그들도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예수 닮기, 예수 살기’의 생명운동을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영웅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래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4세기에 박해 받는 소수의 입지에 있던 교회가 제국의 공식적 종교로서 제국의 권력에 참여하며 사회 전체를 위한 도덕적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섬기기 위해 교회는 그 교리를 정비하고 체제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국가권력 주변에는 가짜 위선의 교회 지도자들이 나타났고, 이러한 신앙의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그리스도의 삶에 영감을 받은 수도원운동이 나타나 교회갱신을 위해 이바지하였습니다. 동시에 야만족에의 선교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 역사가 말하고 있는 귀한 교훈들이고 신앙의 유산입니다.

4. 새 교회상

정리를 해 보자면, 로마제국과 그리스도교의 싸움은 실은 제국과 종교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물질문명의 폭력주의와 사랑의 새 가치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숫자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힘없고, 사회적으로 미천하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른바 토인비의 표현대로 “내적 프롤레타리아트”(Internal Proletariat)로서, 로마제국을 향해 싸울 수 없었지만 사랑의 새 가치관이 승부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이 예수의 말씀은 물질적 폭력주의적인 로마문명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진실로 사랑은 승리입니다. 그리스ㆍ로마의 에로스적인 문명에 대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아가페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워싱턴에는 이 시대의 영적 스승 골든 코스비(Gordon Cosby) 목사가 이끄는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무엇보다 ‘외적인 사랑 나눔’(The Outward Journer)으로, 일년 예산이 1천만 불인데 75개의 독립 전문사역을 하고 있는 워싱턴의 빈민지역에서 참다운 섬김의 목회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정식 교인의 숫자는 60년 가까이 오는 역사에 120명을 넘어 본 일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 교회의 교인이 되려면 각자가 자기 전문사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빈민지역의 버려진 아파트를 개조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돕습니다. 그 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와 자립갱생을 돕는 알코올과 마약치료 센터가 있고, 직업전문학교를 열어 매년 평균 1천여 명이 직업을 찾도록 하고 있습니다. 무숙자들을 위한 노인 아파트와 죽음의 길을 돌봐주는 호스피스를 운영합니다. 워싱턴에서 빈민지역으로 손꼽히는 아담스 몰간 지역 한복판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동상이 있고 바로 그 주변으로 이런 돌봄 사역의 센터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스비 목사는 하루도 몰간타운을 떠나지 않습니다. 매일 오전 12시에 있는 기도회 때문입니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한사람의 무숙자가 찾아와도 그 시간 그와 함께 말씀을 목상하고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벌써 90을 넘어선 코스비 목사의 목회철학은 ‘헌신의 소명과 내적 경건, 외적 경건’(Call to Commitment and Journey Inward, Journey Outward)입니다. 바로 이 어른에게 영향을 받고 그 유명한 헨리 나우웬 교수가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토론토 근교의 정신박약자와 신체장애자 시설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의 직원으로 장애인 선교에 생명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 산하 ‘섬김의 사역자학교’(the Servant Leadership School)에는 전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와서 공부를 합니다.

골든 코스비 목사는 “2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진실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Being an Authentic Self)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줍니다. 오늘날 미국교계에 깊은 영성으로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 그 어른이 ‘진실된 존재’가 되는 것이 오늘날 크리스천의 과제라고 정리해 줍니다.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 앞에 진실된 존재가 되지 못하고는 우리는 아무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코스비 목사는 그 교회의 명성과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가 되려고 한다”(Committed to Smallness)라고 정리합니댜 교회 확장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목적이기에 교인수가 120명이 넘어서면 그 교인들 가운데 소그룹을 떼어 따로 예배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5. 나가며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된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실된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 이는 곧 자기존재의 성숙한 인격의 열매, 즉 사랑과 정의, 진리와 평화를 만들어 가는 헌신의 사역을 하는 책임적 존재로서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제국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는 역사에서 많은 논의와 싸움을 해 왔고 앞으로도 풀어 가야 할 큰 과제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제국은 군국주의와 폭력주의로 노예제의 비인간화를 제도적으로 정당화하였습니다. 있는 자와 부한 자가 없는 자와 가난한 자를 누르고 착취하고 업신여기고 짓밟는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그 폭력주의와 비인간화에 반항하여 평화와 사랑의 새 가치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현대에도 현대의 폭력주의와 비인간화의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운동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몫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21세기 로마제국으로 떠오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아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지는 절실한 깨달음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교회는 제국의 폭력을 정상적인 제도로 보는 현 세계 질서를 대신해 갈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 용서와 평화의 질서를 새롭게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의 ‘당신들의 로마제국은 불의한 폭력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나의 하나님의 나라는 비폭력의 정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 역사 지평에 내려온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는 하늘에서 이 땅 우리 삶의 한복판에 온 것입니다. 이 땅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 특히 배고프고 억압받으며 비인간화된 비리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 복판에 내려온 하나님 나라이기에, 그 나라는 개인의 삶이나 영혼만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정치ㆍ경제적인 사회제도나 그 어떤 단체나 국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과 주권, 그의 의로운 정의와 평화가 그 속에 역사해야 합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사랑, 진리와 평화, 생명이 빛처럼 강물처럼 유통되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자연계를 넘어 초자연계를 포함하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세계와 선교」 제212호. 2012. 9. 1)


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직관적으로 묵상하시려면 [이미지로 보는 설교] “가이사의 제국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