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이 많은 사람과 예수 따름의 고민 [텍스트 버전]
[마가복음 10:17-22, 46-52]
이기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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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생태공동체운동본부가 주관하는 2013년 제3차 생태기행(7월 18-19일)을 강원도 태백지역으로 다녀왔습니다. 내겐 처음이어서 생소한 기행이었으나 상당한 기대감 속에서 이루어진 체험 기행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방문한 몇 곳을 소개합니다. 먼저, 사북탄광은 눈물 어린 석탄 광부들의 애환의 역사를 보듬어 가는 삶의 희망을 선사하는 곳이며, 탄광 근로자와 지역주민이 주축이 되어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석탄 역사의 체험장이었습니다.
둘째,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 서해로 흐르는 한강,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 세 강의 근원이 이곳 삼수령에 있습니다. 삼수령은 대륙과 연결된 백두대간 위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를 방문하였습니다. 둘레가 약 20m이고, 깊이는 알 수 없으며, 사계절 9°C의 지하수가 하루2,000-3,000t씩 석회 암반을 뚫고 솟아 폭포를 이루며 쏟아집니다. 과연 생명의 강이라는 실감을 갖게 하는 체험장이었습니다.
셋째, 대천덕 신부가 1965년에 설립했다는 예수원(Jesus Abbey) 수도공동체였습니다. 예수원의 기본 일과는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성 베네딕트 수사장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하루 세 차례 예배와 노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의 영향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령운동, 새로운 형태의 개신교 수도원 운동, 중보기도, 토지 정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교회의 눈을 열고 귀를 여는 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놀라운 하나님의 대안인 ‘희년의 토지 정의’가 있는데, 이는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이웃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1%의 사람들이 57%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2006년 행자부 발표)에서, 땅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앉아서 부자가 되는 반면에 우리 가까이 있는 대다수 국민은 자신의 소득만으로는 편하게 살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토지 불로소득으로 앉아서 부자가 되는 세상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으며, 근로 의욕은 꺾이고 한탕주의와 기회주의가 만연하게 됩니다. 반면에 막대한 토지불로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쾌락과 향락을 즐기면서 사회는 점점 병들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집 문제 때문에 결혼도 못 하고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합니다. 또한 빈부의 격차와 가난의 대물림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이처럼 토지문제는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의 희년을 준수하면 빈부양극화가 사라집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는 빚이 탕감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땅과 집과 몸을 회복합니다. 따라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문제로 인해 한시적으로 가난하게 될 수는 있어도 가난이 계속 대물림되지는 않습니다. 희년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쁨의 해입니다. 이러한 희년은 현대에도 채무 탕감과 빈민 소액 대부(마이크로 크레디트),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토지가치세제(Land Value Taxation), 주거권 보장 등으로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습니다(희년함께 - Jubilee & Land Jus tice Association- 헨리조지센터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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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인 마가복음 10:17-22의 말씀에서 마가는 ‘재물이 많은 사람’으로, 마태(마 19:16-22)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그리고 누가(눅 18:18-30)는 ‘부자 관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화두는, ‘우리는 과연 우리의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의 인생 여정의 주제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신앙공동체에는 은행예금이 많고 소유한 토지도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유함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는 단순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세상의 거짓 안전을 돌파하며, 값비싼 제자도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사실 정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 부자가 하지 못했던 일, 곧 예수를 완전히 따르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긴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부자이야기는 선진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한국교회도 이 범주에 듭니다) 직접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안락하게 살고 있으며 교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부자처럼 우리 기운데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서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부자처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며 이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어떤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아무런 관심도 없이 무시해 버리기도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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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자는 예수의 여행을 방해했습니다. 예수에게 주목을 받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예수에게 아첨하는 말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질문을 했으며, 혹은 적어도 질문을) 서툴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대답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곧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런 계명들, 특히 첫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정말로 귀한 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계명들에 새로 “남을 속이지 말라”는 계명을 덧붙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비록 그 부자는 자신이 그 모든 계명을 잘 지켰다고 주장했지만, 예수의 새로운 계명이 탐욕,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 경제적 불의에 대한 연루를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많은 재산이 이 계명을 어긴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부자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예수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스럽게”(공동번역은 “대견해 하시며”)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부자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겼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에 대해 연민을 느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가르쳤던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처럼 연민의 마음으로, 예수는 성서에서 가장 위대한 초대 가운데 하나, 곧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아서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과 예수 따름의 고민’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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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본문 몇 절 뒤에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와 예수의 만남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예수를 불렀고, 예수는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예수가 그를 불러 오라고 하자 그 맹인은 즉시 겉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거지였기 때문에 그의 겉옷에는 구걸해서 얻은 동전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초대를 받고 그는 겉옷과 함께 그 모든 동전들을 버리고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돈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 보고 예수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맹인은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대신에,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1-52)라고 말씀했습니다. 시력을 회복한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이처럼 대조가 되는 두 이야기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상반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대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며 얻을 것만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초대를 즉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에게만 전념하여 그의 길을 따르는 데 열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거의 선진국 수준의 경우는 그 부자와 같이 우리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이라는 악령에 사로집혀 있으며, 소비주의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재산은 우리의 생활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통제하여, 무의식적으로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 잘못된 질문을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통제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입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이 눈이 멀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는 결코 간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를 결코 보지 못하며, 또한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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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아시시의 희망이며 자랑인 성 프란시스코는 가난한 생활과 제자로서의 삶을 위해, 아버지의 사업과 재산을 포기했습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 역시 부유한 설교자의 아들이었지만, 민권투쟁과 경제적 정의, 평화를 위한 투쟁을 통해 예수를 따르려고, 자신의 경제적 특권과 학자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영성 생활에 관해 많은 책을 쓴 헨리 나우웬 신부 역시 예일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의 종신 교수직을 포기하고 남아메리카에서 일했으며, 마지막으로는 ‘라르슈 새벽공동체’에 들어가 10년 동안 장애인들을 섬기는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초대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씨름할 때, 부자건 가난하건 우리를 향한 예수의 태도에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는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에서 드러나듯이,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요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줄 작정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분명히 예수는 그 맹인의 신앙을 보고 기뻐했으며, 그가 치유 받고 제자가 된 것에 기뻐했습니다. 똑같이 그 부자가 고민하면서 울상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는 거절의 아픔을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얼마나 많이 우리는 예수를 떠나갑니까? 얼마나 많이 우리는 계속해서 그의 초대를 거절하고 대신에 우리의 소유물에 집착합니까? 우리가 사는 방식, 우리의 미지근한 제자직,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계속적인 거절에 예수는 어떤 마음을 느끼겠습니까?
복음의 지혜는 한결같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하고 예수는 묻습니다. 돈을 버는 데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예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계속해서 예수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 마틴 루터킹 목사, 헨리 나우웬처럼, 우리도 보게 되고 깨닫게 되고 새로운 변화된 삶을 살게 될 것 입니다. 우리도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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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건전한 개신교단 중 하나인 그리스도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hrist)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에 속한 건전한 생활을 위해 매일 열두 번 감사할 것을 가르칩니다.
- 1)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새로운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 2) 조반을 먹을 때는 오늘도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3) 차를 타고 직장으로 갈 때는 오늘도 나를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 4) 직장과 가정에서는 오늘도 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5) 일을 하며 잔소리나 비판, 압력을 받을 때도 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6) 직장이나 집에서 칭찬이나 격려를 받았을 때는 만족과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 7) 점심시간에는 얘기를 나눌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 8) 하루의 일이 끝나면 그래도 작은 성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9)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 10) 저녁 TV나 신문잡지 등을 보며 앉았을 때는 여가의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11)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 12) 꿈속에서는 생명이란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런 감사의 삶을 날마다 살 때 어떤 유혹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자로서 우리의 소중한 나날을 기쁘고 보람되며, 이웃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크고 작은 뜻을 펼치며 영육이 다 강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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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위에서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삽니다. 자기만 잘 나갈 뿐 아니라 자식들도 잘되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다니고 부와 권력과 사회적 명성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거기다 건강과 평화로운 가정생활까지 따라 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하기야 이 후자가 여의치 않아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외적 조건만으로는 누가 봐도 행복할 것 같은데 건강이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어 어두운 얼굴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위의 두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부러울지언정 존경심은 느끼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은 저나 나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부와 권력을 순전히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좀 손해 보면서,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존경과 감동을 자아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목적은 결국 자기 자산에 갇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이웃과 사회, 세계와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린 존재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저명한 민중신학자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는 가진 자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간단히 두 마디로 정의했습니다. ‘가난해지기 위한 노력’(struggle to be poor)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노력’(struggle for the poor)입니다. 전자는 자발적 가난으로서 개인의 도덕성과 영성의 문제이며, 후자는 사랑과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좌우명으로 삼을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티베트 불교와 정치의 지도자이며 영성가로 널리 알려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여의고 매 일 2000배씩 10만 배 기도를 한 뒤인 바로 그때 “가장 좋은 수행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에게 달라이 라마는 “최선을 다해 남을 도우세요. 아니면 적어도 남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종교가 없더라도 남에게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곧 훌륭한 수행법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가난과 종교, 가난과 영성은 가까운 친구입니다. 둘이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신앙이 좋을수록 물질적으로 복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다운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기복신앙이 우리나라 종교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복을 구하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복의 내용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이며 진정한 행복인지를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이고 사명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가난과 너무 멀어진 듯합니다. 성직자들이 무소유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무슨 대단한 일인 양, 성직이 출세의 수단이 되고 신앙이 복덕 방망이가 되어 버린 종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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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하면서 몇 가지 진언을 할 생각을 감히 해 봅니다. 21세기는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한 문명전환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 중심주의, 개인 중심주의, 소유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생명 중심주의, 우주 중심주의, 존재 중심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입니다.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과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 각성,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을 통해 생명 중심의 가치관과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생태계를 향해 출애굽 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던 식민지 백성 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식민지의 아들’(son of the colonized) 예수가 바라보았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vision)과 전략은 오늘날 세계금융자본의 횡포 아래 신음하고 있는 이 땅의 민초들을 위해 교회가 해야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과 같은 소비와 낭비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예수를 믿는 것이 곧바로 예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길임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과 예수 따름의 고민’을 진정으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한 번 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일심회-천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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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직관적으로 묵상하시려면 [이미지로 보는 설교] 재물이 많은 사람과 예수 따름의 고민 [마가복음 10:17-22, 46-52]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