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주,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 여정 – 새해 첫 주일
[신명기 26:5-9, 히브리서 10:32-39, 12:1-2]
이기영 목사
[슬라이드]
[설교 전문]
[1]
기독교 역사상의 대표적인 예수님의 초상화 곧 신자들의 신앙에 비친 종교적 거울에 비치는 예수상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비잔틴 시대의 예수상인데, 색 유리창에 조각으로 배색된 예수상입니다. 고대의 문제는 죽음 너머의 피안의 차원, 영원의 싱징을 묘사한 것입니다. 둘째는 중세 서방기독교의 예수상인데, 찬란한 황금법복을 입고 보석으로 수놓은 면류관을 쓰고 왕권의 지팡이를 쥔 심판주입니다. 현세와 내세를 다 주관히는 예수상입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는 예수상인데, 근세 경건주의 신앙에 비친 예수상입니다. 또한 양떼를 이끄는 목자 예수상인데, 역시 근세 부르주아지 신앙인의 눈에 비친 예수상입니다. 넷째는 발을 씻기는 남을 섬기는 예수상입니다. ‘남을 위한 사람’(man for others)이고, 더 나아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인간애로 대하는 예수상인데,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고 부릅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모범적 교본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연합장로교회가 10년 간 최고의 지혜와 신학적 연구 끝에 ‘1967년 신앙고백’을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발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현대 교회 신앙고백의 대표적인 것인데 예수의 역사적 실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팔레스틴의 한 유대인인 예수는 그의 동족 가운데 사셨고 그들의 곤궁과 시험과 기쁨을 같이 당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행위로 나타내셨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형제가 되셨다. 그의 완전한 순종은 오히려 그의 동족들과의 충돌을 일으켰다. 그의 생애와 교훈은 그들의 도덕적 선함과 종교적 신앙과 민족적 염원을 심판했다. 많은 사람은 그를 배척하고 그의 사형을 요구했다. 그들을 위해서 자기 자선을 스스로 내어 주심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이 받고 있는 심판을 자기 자신에게 지우셨다.” 이 역사적 인물 예수님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2]
신앙인의 긴 인생 여정은 마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경주와 같습니다. 히브리서 10장 후반부와 12장 1-2절에서 그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 여정입니다. 히브리서는 한 신앙인의 긴 인생의 여정을 승리로 산 지혜와 인내를 줍니다. 산등선이나 들판에 떨어진 물이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 여러 곡절의 사람들이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2)고 합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히 10:33), 심지어 우리의 산업을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큰 상을 얻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담대함을 포기하지 아니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확실하기에 하나님의 계획에 함께 머물며 그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침울에 빠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히 10:39)이기에 오래 참고 견디면서 신앙생활을 승리케 해야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얻지 못하고”(히 10:36) 실패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3]
또한 히브리서 본문(히 12:1-2)에는 신앙인의 여정을 한 경기자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중요한 단어 몇 개가 나옵니다. 하나는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목표를 말합니다. 목적은 추상적이고 목표는 구체적입니다. 그 목적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림 한 장을 그려도, 하루에 길을 가도, 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신앙정신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는 중에 많은 조각품들과 그림들을 보게 됩니다. 그 작품들 하나하나가 일생 동안 만들고 그린 것입니다. 그 예술가들이 돈을 바라보고 했을까요? 명예를 위해서였을까요? 분명한 것은 모든 쓸 만한 명작들은 전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한 시대를 높은 목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첫째로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얻(empower)습니다. 그의 힘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의 능력이 그로부터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중에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이 내게로 흘러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 된다는 것은 목적이 내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에 보람을 주는 그런 목적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중에도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럴 때에 예수로부터 큰 생명력과 능력을 얻어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천사의 마음을 가지고, 천사의 얼굴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중에 그리스도로부터 엄청난 위대한 생명력이 내게로 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l2:l)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증인이 있다는 말은 지금 내가 경기장을 달리고 있는데 구경꾼이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으로 축구경기를 비롯한 모든 경기를 지구촌 수억명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감동적입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정말로 신령한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조상들, 우리보다 먼저 가신 믿음의 조상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 중에 먼저 가신 분이 지금 지켜보고 있는 중에 내가 여기서 삶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라는 말씀입니다. 경기장에서 중요한 것은 가벼운 몸입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뭐든지 가벼워야 합니다. 옷도 가볍고 신발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깨끗해야 합니다. 또한 생각도 복잡하면 안됩니다.
대리석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하루는 사람들이 그의 조각품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대리석 돌덩이를 세워놓고 여기저기서 필요없는 부분을 다 떼어 냈더니 이런 좋은 작품이 됐습니다.” 떼어 내야 될 것을 다 떼어 내야 나타날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버려야 됩니다. 깨끗이 버려야 비로소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경기자는 가벼운 마음, 가벼운 몸으로, 가벼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목표를 향해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이 주는 넷째 말씀입니다. “인내로써 경주하며”(히 12:1), “예수는 십자가를 참으사”(히 12:2), 저자는 예수의 십자가를 인내로 보았습니다. 모든 경기에 있어서 마지막엔 인내로 승부가 납니다. 얼마나 참느냐, 어디까지 참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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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는 40대 초반에 수감되어 70대에 접어드는 10,000일을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27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세상과 단절하여 폐인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이었으나 그리스도인이던 그는 끝내 절망하지 않고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의 죄악은 정의의 하나님과 세계양심세력에 의해 무너질 것을 희망하며 확신했습니다. 그의 95세 서거에 즈음하여 타임지(Dec 19, 2013)는 항거자(Protester), 죄수(Prisoner),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라는 특집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자유를 향한 긴 여정”(Long Walk to Freedom)의 생애를 세계인들에게 가슴 뭉클하게 이야기합니다.
만델라, 그의 삶은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안정된 길 대신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 철폐 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27년간 무기징역으로 복역하며, 자기 정진을 통해 내적인 힘과 외적인 권위를 키워 민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19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선거에서 첫 흑인 대통령이 되었고, 백인사회에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대화합을 실현했습니다. ‘진실과화해위원회’를 만들어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용서했습니다. 이 과정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만델라는 세계 모든 사람에게 더 큰 어떤 숭고한 의미, 즉 좌절과 패배의 참된 의미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일생을 통해 몸소 깨달은 인간 존엄성과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보복과 이웃에 대한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련의 인내가 한 개인이나 세계에 가져다주는 보화를 만델라는 실증하여 보여 주었기에, 우리는 그가 터득한 인고의 결실로서 고난의 세계를 평회롭게하는 예지를 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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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지 〈타임〉지(Dec 23, 2013)는 ‘인민의 교황’이라는 표현과 함께 ‘올해의 인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정했습니다. 교황의 권고문이 세계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폭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성장의 열매를 소수가 독차지하고, 많은 민중들이 힘겨워하는 현실을 교회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교황의 거침없는 행보에 미국 극우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똑같은 주장’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포용력이 넓습니다. 이를테면 가톨릭교회에선 이혼한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치 않습니다. 교황은 “성찬은 완벽한 이들에게 내리는 상이 아니라, 약한자들에게 주는 강력한 치료제이자 자양분”이라고 지적합니다. 낙태와 관련해선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했거나, 가난 때문에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겪었을 극심한 고통에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되묻습니다. 동성애와 관련해선 “그들이 선한 뜻으로 신을 따른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을 정죄할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모든 교황의 행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로서 미국 가톨릭 신자의 92%가 그에게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교황은 전 세계 분쟁과 사회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을 통해, 특히 분쟁지역인 시리아, 남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이라크 등을 언급하며 이에 대한 인류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교황의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과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해 말에 한국사회는 대자보 열풍에 자발적 참여자들의 기발한 상상력들이 잇따른 바 있습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와 철도노조 파업 동의 여러 정치적ㆍ사회적 문제들을 겪은 바 있습니다. 2014년에는 정의와 화해 정직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와 용기의 결단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하셨고, 교황도 교회는 최선을 다해 정직한 사회실현을 위해 정치와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로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회복과 평등한 사회 실현을 위해 아픈, 성난 외침을 겸허히 경청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화해의 아름다운 나라를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찾아 위로하며 함께하는 모습이, 13세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코의 영감과 예수를 닮았던 그 성인의 모습을 21세기인 오늘에 어두운 지구촌에서 실현해 보여 주는 듯한 감회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13세기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과 순명, 사랑과 겸허의 평화실현을 위한 성육신적 경건의 삶이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는 진정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과 그에 관한 신학을 다시 정립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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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70년부터 이스라엘은‘국토’, ‘주권’, ‘민족’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세계에 영원한 목적지 없이 순례자의 길을 떠났다가 20세기에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을 하게 된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으니, 2천 년 썩은 고목에 꽃이 핀 것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저들에게 그 명맥을 이어 오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 답안을 신앙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신앙일까요?
구약은 곧 이스라엘 민족사와 그들의 신앙이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 고백의 가장 오래된 것이 신명기 26장 5-9절입니다. 요약하자면,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소수로 거류하다가 큰 민족이 되었고, 애굽인의 학대와 억압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구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원로들이 그들 자손에게 대대로 일러주어 암송하게 할 만큼 오래된 민족사적 고백으로서 아마 초기 단계에는 개별적으로, 사적으로 하다가 마침내는 민족적 축제, 특히 감사절에서 낭독, 교독 등으로 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들이 선 뿌리, 그들을 이끈 역사적이요 원초적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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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으로서 또는 신앙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긴 여정을 끝까지 아름답게 서는 덕목이 인내요, 그 인내는 희망이 받들어 주고, 그 희망은 신앙이 밑받침해 준다는 교훈이나 성서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분단 60년을 넘긴 민족적 비극에 대해 또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전쟁 당사국인 독일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그 피해와 억압의 장본인들입니다. 해방을 받았으면서 어찌하여 60년이 넘는 오늘에까지 남북분단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 한국사회는 역사 왜곡과 사실 오류로 비판을 받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문제 논란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도 올바른 이해를 하면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해방부터 현재까지 겪고 있는 민족분단을 회상하면 당시 승전국 미국이 한반도에 분단선을 그은 것은 미국 외교 역사의 관점에서도 냉전을 가져오게 한 참으로 비정한 역사였음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은 1945년 종전 후 20년(1965년) 만에 일본과 화해했고 수교를 시작했습니다. 6ㆍ25전쟁을 막후 조정했던 소련과는 1953년 휴전 후 38년(1991년) 만에 화해하며 수교했습니다. 6ㆍ25 전쟁 때 서로 맞서 싸웠던 중국과도 화해하고 긴밀한 교역국이 되었습니다. 한ㆍ중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동족인 북한과는 아직도 주된 적이며, 괴뢰로 보고 증오하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새해에는 부디 남과 북이 상생의 원리에 따라 화해와 진정한 교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그동안에 화해의 역할을 못 한 것에 대하여 깊은 참회를 해야 합니 다.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복음의 참 뜻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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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옹은 세계의 오물을 뒤집어 쓴 창녀 같은 한반도요, 세상의 온갖 죄악을 다 집결시킨 고난의 여왕 같은 존재라며, 이는 세계를 구원할 능력을 키우려 하시는 신의 섭리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혹하여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의 한반도의 고난과 아픔을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로 믿고 싶어 하나 그만한 의식과 자질이 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인류구원의 역사가 이와 무관하다면 이보다 더 비참할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극심한 민족의 고난 속에서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 메시아의 태동을 꿈꾸었듯이. 우리 한민족도 냉전체제에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분단의 쓰라림도 세계를 구원하는 대속의 수난으로 믿고 해석하며. 인류의 새 희망을 여기에서 태동할 수 있게 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교세가 세계적이요. 그 규모나 활동이 세계 제일임을 자랑하지만, 회고하여 보면 지금까지 잘못 믿어 온 것에 대하여 참회하며, 새롭게 태어날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이 오늘의 분단 한반도에서 주시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 쓰라린 분단 상황을 자기들의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해 온 것을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이 쓰라린 분단 한반도의 고난 속에서 인류 구원의 대속의 진리를 반드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예지와 과제가 여기에 있고. 세계는 이런 수난과 시련 속에서 구원의 새 빛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 한국교회가 세계에 새 희망을 줄 적 격의 백성이라고 믿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2014년. 새해를 맞으면서 성서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깊고 넓은 코이노니아를 해야 합니다. 만델라, 프란치스코 교황 등이 고난의 역경 속의 역사에서 희망을 닦았듯이, 민족적 시련과 고난의 분단 속에서 그 의미를 판독하고. 먼저는 한 민족의 구원과 희망을 찾고, 고난의 온누리에까지 구원과 화해의 활력과 새 희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금후 한국교회의 선교 과제는 평화통일이고,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 역시 평화통일임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한반도분단의 문제와 시련은 남북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이해관계에까지 얽혀 있기에 더욱더 한민족의 예지와 결단, 희생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비유하면, 남북의 한민족은 머리는 둘이지만 몸은 하나인 쌍둥이 같은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가 병들거나 죽으면 또 하나도 병들고, 하나가 살면 둘이 다사는 운명의 존재이기에 인내로 피차 함께 아파하고, 돕고, 염려하고, 돌보면서 둘이 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평화통일에의 길로 인도해 주실 날을 믿고 소망하며, 인내하며, 믿음의 주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새롭게 출발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