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하는 그리스도인 [텍스트]
[고린도전서 9:16-23]
이기영 목사
[1]
성 어거스틴이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기 이전에 하루는 희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문에서 천사가 그를 심문합니다. “너는 누구냐?” 어거스틴은 대답합니다. “일개 그리스도인입니댜.” 그러자 천사가 그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더니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너의 머리와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깜짝 놀라 꿈에 서 깨어났습니다. 통곡을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가슴을 가득 채움으로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가였던 키케로(기원전 106-43)는 사실 어거스틴(354-430)의 철학 스승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저작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그의 《고백록》에서 “키케로는 내 생각을 확 바꿔 놓았습니다. 나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센 정열로 지혜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서술했습니다. 키케로는 어거스틴의 마음에 ‘지혜에 대한 사랑’의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 전에 그는 먼저 키케로의 철학으로 회심하였습니다. 키케로는 국가란 인민의 것이며, 인민의 안녕, 복지야말로 공화국의 본령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창조에서 시작하여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을 파악하고, 목적지향적 역사관을 최초로 확립하였습니다. 세상 나라는 옛사람, 가인의 속성을 닮은 이기심, 자기중심성, 탐욕, 폭력, 교만, 명예욕, 약육강식 등의 원리 로 지배되는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아가페 모티프가 중심이 된 새로운 역사만이 세상나라를 구한다는 역사관입니다.
최근 한국 개신교와 천주교를 비롯하여 원불교 등 종교계와 서울시민과 전국 곳곳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 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촛불시위로 실추된 정의와 진실의 회복을 외치고 있음을 보면서 역동적인 모습과 함께 정의실현, 민주ㆍ평등ㆍ살림의 민주의 나라를 열망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뒤로 내 란음모사건과 권력과 언문 합작에 들러리 선 법무부 등의 모습으로 정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기능은 곧 선포(kerygma), 교제(koinonia)와 봉사(diakonia) 그리고 교육(didache)으로 집약됩니다. 선포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선포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전령을 말합니다. 교제란 그리스도의 고난과의 사귐, 그리스도 안에서의 냐와 너와의 만남을 뜻하며, 봉사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종으로서의 헌신을 뜻하며, 교육이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예적인 훈련 및 신앙교육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사도행전의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사용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채 제도화되기 이전에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 말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며 그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무리들’로서, 비난과 조소의 뜻이 담긴 명칭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교회의 사명과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 곧 그리스도인이고 제직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청지기 정신으로 교회를 받들고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지위(status)로 이해하며 명예직으로 여기는 폐단이 없어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역할(function)로서 이해하며 받은바 달란트대로 신실하게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에게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렇게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산실도 없이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나셨고, 가난한 목수였고, 선교 3년 동안에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만큼 무일푼의 방랑 선교자이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권자들의 질투와 또는 몰이해, 의구심 같은 것들의 못된 심보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 시련과 비참을 영광과 새 생명으로 이어가게 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전 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에 군림하도록 했습니다.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으로 보여 주신 삶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긍지가 있기 때문에 남에게 억지로 지배당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기어코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기에 분쟁이 생기고 교만과 미움이 자라나고 이기적인 편당이 성장해 갑니다. 심지어는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까지도 침투해 교회 존립을 위태롭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자유와 정의와 사랑이 서로 어울려서 평화의 질서를 세우는 곳입니다. 우리가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을 섬기면 그 낮아지고 겸허한 마음씨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신뢰와 존경 그리고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존경이고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3]
모세가 광야에서 그 숱한 이스라엘 군중들의 송사를 혼자 맡아 가지고서 밤낮 분주했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가 찾아와서 충고를 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분주하게 지내다가는 기운이 모자라서 쓰러지겠다. 그러니 제도를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해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 이런 제도를 만들어서 경미한 송서는 그들에게 맡기고 중대한 사건만을 모세가 맡도록 충고를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으로 채택하겠느냐 하는 선거방법과 인선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지덕이 겸비한 자, 즉 첫째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둘째르는 진실무망하고, 셋째는 불의를 미워하는 자를 골라서 응분의 직위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8:13-21의 말씀입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신앙이 돈독하고 품격이 성실하고,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골라서 쓰라고 하는 말이겠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정치권력 군사력, 경제력 등을 믿고 서로 상대방을 억지로 지배하려고 광분하며 눈을 붉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무기라고 하는 핵폭탄을 신주처럼 모시고서 죽음의 천사를 역사의 챔피언으로 앞세워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인, 사회인 그리고 자기 나라 사람 혹은 외국인 할 것 없이 오직 사랑의 봉사로 행하고 나눔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의 올바른 방향입니다.
[4]
사도 바울은 “부득불”(16절),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17절)며 ‘마지못해’ 복음을 전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운명’이라고 콘첼만은 해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생산적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백 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고, 죽였고, 더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다가 극적 장면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 아닙니까! 이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지요. 그뿐입니까,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은혜에 사는 자가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죽어 가니 감사하고, 같은 고난을 받되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니 감사하고, 매를 맞되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으니 감사하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가담된 그 높은 긍지와 그 사랑으로 그는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간중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고용되었다고 하는 사실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리하여 값없이, 상도 보답도 보상도 바람이 없이 그저 감사, 그저 기쁨으로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바울은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 봉사자였습니다.
자유하는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행복합니다. 행복은 자유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매이지 않는 사람, 경제적으로는 빚이 없는 사람, 정치적으로는 자유하는 사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도 팔리지 아니한 인격,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는 이런 자유함,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체면이다 위신이다 명예다 살림살이다, 뭐 잔뜩 붙들어 매어 놓으면 괴롭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부끄러움이 없고 항상 자유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에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설사 경제적인 자유는 없어도 양심의 자유는 있고. 정치적인 자유는 없어도 도덕적인 자유는 가진 사람, 그리고 신앙적 자유를 가졌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는 줄 압니다. 불가피 성에 매인 것이 없습니다. 빚진 것도 없습니다. 자유,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보다 더 자유한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은, 그 고귀한 자유를 스스로 버릴 줄 아는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이 귀한 자유를 내 스스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벌벌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0:18절에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지우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 스스로 선택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이 포기라고 하는 것, 내 스스로 종이 되는 것, 스스로 매이는 것,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행복의 경지에 있는 자유하는 그리스도인 봉사자인 것입니다.
자유하는 그리스도인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한 생산적인 투자 곧 생의 투자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았노라”(18절)고 말씀합니다. 권리를 다 쓰지 않다는 것, 스스로 제한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권리를 다 쓰고 모자라서 남의 것까지 빼앗아 씁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면서 스스로 포기하며 사는 것처럼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 스스로 섬기는 자가 된 것은 얻고자 함입니다. 얻은 바가 있기 때문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얻기 위해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입니다. 종이 되어야 주인이 됩니다. 스스로 버리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자기의 생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수고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맺어지는 아름다운 열매를 보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사도 바울의 오늘의 본문에서 그 중심사상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루터는 자유에 대한 두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우 여러분, 내 수고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무엇을 얻고. 내가 손해 봄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내 희생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을 내 생명, 내 이득처럼 기뻐할 줄 아는 그 마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은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기쁨이기에 차원 높은 행복을 영위케 하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그리스도인 봉사자에게 가장 귀한 축복은 겸손의 복을 아는 것입니다. 겸손해서 은혜 받고. 겸손해서 은혜를 은혜로 알고, 겸손해서 은혜를 감당하고, 겸손해서 은혜를 지속하게 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이요 은혜 받는 한계입니다. 겸손한 만큼 지혜롭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5]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섬겼습니다. 유대인, 이방인, 약한 자에게 알맞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래도 그의 목적 의식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됨으로써 저쪽이 삽니다. 내가 종이 됨으로 저쪽이 주인이 되고, 내가 처철해짐으로 저쪽에 영광이 돌아갑니다. 내가 죽음으로 저쪽에 삶이 옵니다. 이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희생적 봉사를 감당하고 의와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는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내용인즉, 타인이 됨으로써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는 그리스도의 진리,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살림의 진리’입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제국의 질서’의 정반대에 있는 것입니다. ‘제국’은 타자를 정복하고 약탈하여 비워 버리고그 속에 자기를, 자기에 대한 선망을 채워 버리는 체제입니다. 바로 본문의 배경인 고린도 시가 그랬고 로마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체제는 ‘타자 살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이들 ‘안보의 체제’들은 예외 없이 그 결사체 내부에서 타자 배제의 시스템을 작동시켰습니다. 주인이 되고자 하였고 이 스라엘이 되고자 했으며 남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주인다움, 이스라엘인다움, 남자다움의 질서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될 수 없는 자,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 자, 남자가 될 수 없는 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에 바울은 자기는 바로 그런 ‘될 수 없는 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곧 스스로 타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27절)이라는 표현은 그가 빌립보서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낮아짐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동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빌 2:6-8). 빌립보에서의 낮아짐과 비움의 그리스도를 바울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서 교회와 사회공동체 윤리로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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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탁월한 신학자요 순교자인 본회퍼(Dietrich Bonheoffer, 1906-1945) 목사는 산상수훈에 관한 주석서 《나를 따르라》(The Cost of Discipleship)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거의 1세기 전의 인물인 키에르케고르처럼, 그도 자신이 속해 있는 루터교 전통을혹평하여 “싸구려 은혜”, “안일한 기독교”라고 질타하며 설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자, 섬김에 대하여, 본회퍼 목사의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는 핀켈완드에 있는 비밀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성서 읽기와 묵상을 위한 조언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정말로 어느 수도사나 영성가보다 더욱 내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혀에 굴레를 씌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한 생각을 가장 잘 정복하는 길은 그 생각을 전연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은 은혜에서 솟아나는 마음으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주장이나 이에 따르는 억지가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 따라서 봉사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온유한 섬김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을 낮추어 생각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높고 유익한 교훈입니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그 대신 언제나 남을 좋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높은 지혜요 완성인 것입니다”(토마스 아 켐피스). 셋째는 말없이 귀를 기울이는 섬김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 형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촉하신 최대의 봉사, 즉 형제의 죄의 고백을 들어주는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는, 돕는 섬김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적극 돕는 섬김을 해야합니다. 다섯째는, 서로 짐을 지는 섬김입니다. 성서는 “진다”는 말을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 업적을 이 말로써 표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진정 우리의 병을 지셨고 우리의 아픔을 몸에 지니셨고 우리가 받을 벌을 몸으로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사 53:4-5). 여기서 실현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사귐입니다. 그것은 서로서로 남의 짐을 몸에 지는 십자가의 사귐인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한때 뉴욕에서 안전하게 지냈지만, 미국 천지들의 손을 뿌리치고 급박한 전운이 감도는 고국을 향해 1939년 7월 7일 뉴욕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면서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배에 오른 이후로 장래에 대한 나의 내면적인 분열이 사라졌다.” 라인홀드 니버가 그를 유니온 신학교에 초청한 목적은 신학자로서의 그의 소질이 아까워서 그를 독일의 소용돌이에서 빼내려는 것이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니버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서리나는 이자택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이 살아남기 위해서 조국의 패전을 바라든가, 자기들의 나라가 이기기를 바라서 우리의 문명을 파괴하든가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내가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냐를 압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가운데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조국이 망할 것을 하나님 때문에 원하며 민족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의 후배인 것입니다. 생명을 내걸고 조국을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조국을 무너뜨리려고 생명을 내던져 투쟁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기 어려운 일입니다. 정의와 진리의 청지기로서 자유로운 선택의 본보기를 보는 듯합니다.
본회퍼는 사후에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Everhard Bethge)가 출판한 《옥중서신》(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을 통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서신들은 1960년대의 신학에서 널리 사용된 표현들, “종교 없는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 “세속적인 거룩”(secular holiness), “성년이 된 사람”(man come of age) 등의 용어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종교를 비판했고, “공간을 메워주시는 하나님”(God of the gaps), 다시 말해서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하나님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21세기 앞으로도 기억되게 할 것입니다.
자유하는 그리스도인, 성도 여러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실한 생의 목적을 오늘 세우시기 바랍니댜 영원히 헛되지 않는 일 복음에 참여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 그 일을 위해 자기 생을 남김없이 쏟아 가는 보람되고 영광스런 일에 용감히 전진하시길 바라며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복음을 위한 수고와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어딘가에서 생명과 의로운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위에서 허락하시는 영육간의 건강 영광된 축복이 함께하고, 교회 발전의 창조적 역사를 한몫 담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삭개오작은교회 , 2013. 9. 29)
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직관적으로 묵상하시려면 [이미지로 보는 설교] “자유하는 그리스도인”(고전 9:16-23)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