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기도
마태복음 6:5-13
이기영 목사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뜻 깊고 중대한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성현이나 인생의 선배들은 기쁠 때와 슬플 때, 감격 할 때와 어려울 때, 어떤 용단이나 선택이 요청되는 때에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기에 하나님께 그의 깊은 소원을 아뢰고 의논합니다. 현대 철학과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준 키에르케고르는 기도란 인간의 최후 최고의 종교 행위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개인적 실존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구도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기도문 가운데, ‘주님의 위대하심, 나의 하찮음’이 있는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제가 진정으로 자신의 하찮음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선하심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 주십시오.” 성서와 히브리 기독교의 오랜 역사에서도 많은 훌륭한 인물이나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의 생애에서 참으로 어렵거나 기쁠 때, 심지어 사망의 문턱을 해맬 때에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성서의 기도문, 시편에 많은 기도문이 있고, 교회 역사에도 수많은 기도문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많은 기도문이 있지만, 수없이 듣고 외우면서도 성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롭게 와 닿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 치를 유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유한하고 이기적이고 무엇이 든 받기를 더 좋아하는 인간이기에,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신앙인의 모습이 작게나마 자리하고 있기에 이런 기도가 우리의 심금을 울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 인이든,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위해서든,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도 인류가 큰 빚을 지 며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인간의 최고 행위는 역시 신앙인의 특권이랄 수 있는 기도라 하겠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그 뜻이 이 땅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이 지상의 세계가 그만큼 소중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요 3:16),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예수로 탄생하신 사실과 상응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하시며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바로 인간 사랑이요, 보이는 형제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 두 사랑은 언제나 상관관계를 갖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최대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데, 대화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이겠고,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는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지고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있는 단독자로서의 인간의 경우와 같은 것입니 다.
2) 주기도문에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 모두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온 누리에 모든 사람이 고루 먹게 해서 굶주린 자가 없어야 한다는 지상명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관심이 다만 영적이고 신비하여, 세상 물질적인 것에 초연한 것이 아님을 잘 시사합니다. 오늘 이 땅의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매일 먹을 양식을 간구합니다. 부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어떤 종교, 종족, 계층, 성, 차별 없이 다 포함됩니다. 이 세계의 특히 제 3세계에선 지금도 식량이 부족합니다. 세계 인구 3분의 1이 기아선상에 있고 아프리카를 포함한 지구 남반부에선 식량의 절대량이 모자라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희생자들인 셈입니다. 살 빼는 운동을 큰 과제로 삼는 많은 부요한 나라 사람들, 그리고 사랑과 자비를 내세우는 세계 종교와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란 이런 굶주리고 헐벗어 쓰러지며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종교인은 그 누구도 자기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동포들 수백만 명이 기아선상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결코 복음 증거나 교회 세우는 일,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일만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온 지구촌 사람들이 다 함께 먹을 수 있게 하는 과제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3) 주기도문에는, 허물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먼저 주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는 죄인 되고 허물 많은 인간들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할 최선의 방법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우리는 형제나 동족만이 아니라 어떤 종족, 국가, 종교, 남녀노소, 계층이나, 이념의 다른 사람도 포함합니다.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4) 끝으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기에 항상 시험에 들지 말라고 기도할 것을 말씀합니다. 죄악과 무지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언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기에 악에서 보호하고 구해 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자신의 욕구 충족이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온갖 시험에 빠져 스스로 패망을 자초할 수 있음을 알기에,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악은 세상에 편만하고 언제 어디서나 까닭 없이 우리를 엄습하기에 이 모든 악에서 보호하고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5) 주기도문은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 끝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역시 주기도문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대전제요, 그중요 내용은 온 인류의 날마다의 양식과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이며, 탐욕과 이기적인 인간의 죄의 유혹에서, 그리고 모든 악에서의 해방과 구원이 주기도의 주제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외식하는 자와 같은 위선적인 기도나, 중언부언하지 말 것을 가르치시고, 은밀한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데 기도의 여러 유형이 있겠으나 침묵, 즉 내적 침목의 기도를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침묵의 벗입니다. 나무와 꽃, 풀과 자연을 살펴보십시오. 침묵 중에 자라고 있습니다. 태양과 달 하늘의 별들을 보십시오.
역시 잠잠히 침묵 중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침묵 중에 내 자신을 텅 비워서 하나님께 자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으로 우리의 말이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적 침묵은 우리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난한 자, 무력한 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로 자기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완전히 승복하고 내맡기는 자세입니다.
안토니 블룸이 쓴 《기도의 체험》이란 책에 겸손을 배우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는 본래 라틴어 땅(humus)에서 나왔으니, 겸손이란 곧 땅과 같은 것입니다. 땅은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모든 것 아래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을 딛고 살지만 땅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뿐더러 땅에다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버립니다. 그러나 땅은 자신을 열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빛을 받아, 그 썩은 데서 생명이 움트고 거기 뿌려진 씨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고 있습니다.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너는 이 겸손을 배워라. 그리하여 네가 겪은 모든 것, 병고, 고독 절망까지 다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겸손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입니다.
주기도는 단지 명상이나 필요한 무엇을 하나님께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나 기도원이나 화려한 교회당에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인간들이 세상에 살면서 이기적이고 타락한 존재들이기에 자신만을 위하려는 탐욕을 넘어, 우리 인간 모두가 지고지선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구하면서, 그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그뜻대로 사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도 욕심 많은 인간이기에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고 그런 결의가 혼들리지 않고 날마다의 삶이 그러한 생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 앞에서의 다짐이고 결의인 것입니다.
결코 기도와 일상의 삶은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일상의 생활로 연결되어야 하고 삶 속에서 그 기도는 생동감이 있어야합니다. 기도만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몇 날을 단식하며 기도한다면서 그 기도 자체가 목표가 되고, 그의 일상의 생활은 전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평화를 이룩함에 상관도 없고. 상식에도 못 미치는 삶이라면 그런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 없이 옳고 바르게 잘 살면 된다는 자세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홀로 언제나 사랑과 정의의 뜻대로 산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언행심사를 철저히 점검하고 회개하며 새롭게 살지 않는다면 이기심과 타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광야의 수도자 안토니에게 어느 날 하늘에서 음성이 있기를 “안토니야, 네 선행이 저 알렉산드리아 구두수선공보다 못하구나.” 안토니는구두수선공을 찾아가 일상의 생활을 알아봅니다. 구두수선공의 생활은 아침 일찍 자신과 도성을 위해 기도하고 종일 구두수선을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안토니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성자가 따로 없습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기도를 날마다 하나님께 드리며 그 기도에 부합하여 살고 있는가의 여부가 성자로 혹은 평범한 자나 악한 자로 나누이게 합니다.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인 하나님과의 대화, 그의 뜻과 음성을 듣는 기도를 숨쉬는 호흡에 비유합니다. 주님과의 이런 호흡이 계속되고, 그분과의 대화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떳떳할 때 그 기도와 삶은 살아 있는 증거가 됩니다.
신학 용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라틴 말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주여,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성 프란시스나 인간 세계에 가장 기본적이고 절실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기도와 삶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생활은 언제나 명료하고 간단명료하였습니다. 피땀 흘리며 드리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쓴 잔의 십자가를 할 수 있거든 마시지 않게 해 달라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에 맡긴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중보의 기도와 운명 전 십자가에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죄악을 범하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와 삶으로, 때로는 눈뜬 기도를 하며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993. 9. 12)
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직관적으로 묵상하시려면 [이미지로 보는 설교] 오늘, 우리의 기도 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