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2-6] 남은 자의 역설 - 1974년 1월 20일, 김상근 목사

남은 자의 역설

1974년 1월 20일 / 로마서 11장 2-6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남은 자의 신비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정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누가 그러더라는 것을 전해도 안 된다. 그리하면 영장 없이 체포하여 15년 이하의 징역과 자격정지에 처한다.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1974년 1월 8일의 일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가 선포되었다.
그날, 나는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던 기독자교수협의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협의회는 분노로 찼다. 성토가 뜨거웠다. 그러나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내 방에 기관원 둘이 들이닥쳤다. 덮어놓고 차에 태웠다. 새벽길을 질주했다. 사직 터널을 지나기에 서대문 형무소로 가는가 했다. 독립문에서 유턴했다. 내 집 앞에서 내리게 했다. 긴 연금이 시작되었다.
김진홍 전도사가 연금 중인 나를 방문했다. 유신철폐 선언을 하기로 했으니 참여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모의자들이 나를 참여시키자 했던 것이고, 김 전도사가 전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야 된다. 우리라도 그리하자고 했다.
1월 17일, 거사날이 왔다. 나를 지키고 있던 경찰들을 따돌릴 방도가 없었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니 함께 기독교회관으로 바람이나 쐬러 다녀오자고 꼬드겼다. 성공했다. 경찰과 함께 NCC 총무실로 갔다. 그러나 늦었다. 일은 이미 끝났다. 친구들은 유신철폐, 민주회복을 선언하고 몽땅 체포되어 간 후였다. 나는 허탈하기도 했고 죄책감 같은 것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옳은 항거였으나 무서운 일이었다. 누구라서 저 미친 권력에 맞설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숨 죽이고 엎드릴 뿐이었다. 우리 친구들은 해냈다. 훌륭하다. 한국 교회는 이래서 살아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괴로웠다. 의거에 참여치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변명은 충분했다. 연금되어 있는 형편이었고, 그날 현장에 간 것만도 번쩍이는 기치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변명이요 구실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최선을 다하였으면 참여할 수 있었지 않았겠나. 죽지 않고 남아 보려는 꾀에 스스로 빠진 것 아닌가. 나는 이런 자문에 괴롭힘을 당했다. 과연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고 있는 것인가.
뜻밖에 남은 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예수의 죽임당하심 후의 “남은 자”도 이렇게 하여 남게 된 것일까? 남고자 하여 남게 되었다면 “남은 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비겁하여 남게 되었더라도 남게 된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인가. 나의 교인들도 “남은 자”인가.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말씀을 향한 물음]

자신의 생을 성실하게 산다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산다고 할 때 흔히 손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일쑤다. 심지어는 지신의 파멸까지를 감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처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나만은 살아남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있다. 또 하나님은 다음의 역사를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남기시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지혜는 어디에 있겠는가?


남은 자의 역설: 생존의 환상과 은총의 실재

생존을 향한 본능 vs. 진실을 향한 대가

우리가 부둥켜안고 놓지 못하는 것들

생존은 예외이며, 전멸이 역사적 기본값이었다

타협의 환상: 살아남으려 할 때 잃어버리는 것들(김은국의 '순교자')

엘리야의 절망: 철저하게 살았던 자의 한계

엘리야의 논리적 오류

은총의 실재: 숨겨진 7,000명의 네트워크

'남은 자'를 구성하는 두 개의 기둥

생존 패러다임과 남은 자 패러다임의 충돌

책임의 영역을 분리하라

현대의 바알: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타협하는가?

남은 자의 역설

현실에의 참여: 남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설교 전문]


인간에게는 누구나 더 오래 살아 보려는 욕망이 있다. 노인들께는 죄송스런 말이나 ‘이 늙은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보약을 찾고 더 오래오래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얼마든지 본다. 이것을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생명 보존의 본능이다.

또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룩하면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부둥켜 안는 예도 많이 본다. 이것 역시 인간의 자기 보존 본능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자기가 세운 회사라든지, 자기 정력과 재산을 털어 바친 학교라든지, 심지어는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교회의 경우, 일단 어떤 안정된 단계에 올라서기만 하면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이미 알려진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나 체면 등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여하튼 일단 그것이 나의 화신(化身)이라고 생각되거나 내 혼이 여기에 담겼다고 느껴지는 때 여간해서 그것을 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이 같은 본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더구나 자기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나라를 보존하고 자기들의 피를 지킨다는 일에 대해서 처절할 정도로 철저한 백성이었다. 오늘까지도 그 사상, 하나님이 축복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은 살아있어서 강대한 아랍공화국과 맞서 현대식의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예민한 눈으로 역사의 흐름을 주시하고 해석해 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기 역사를 해석하는 입장과 사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관을 갖게 된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에 일어난 전쟁이나 기근이나 어떤 재난도 무의미하게 보지 않는다. 그것을 자기들이 저지른 인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또 이스라엘 민족만큼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백성은 땅 위에 없을 것이다. 옛날의 전쟁이란 무척 잔인했다. 정복군은 많은 경우 피정복 백성을 거의 모두 죽여버리든지 포로로 자기 나라에 끌고가는 것이 상례였다. 민족을 멸절시키는 전쟁 풍습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멸절의 위기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넘겼다.

그러나 그러한 전멸의 운명을 타고 넘을 때마다 소수의 ‘남은 자’는 비록 수가 적고 힘이 약한 무명의 인사들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그들이 다음 세대를 향한 민족의 희망이며 민족 재건의 핵들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남은 자’들인 적은 무리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삶을 영원한 교훈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민족의 죄악상을 가슴 아프게 통탄하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 아슬아슬했던 과거를 회상케 하고 있다. 자기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나라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쳐들어와서 정말 숨돌릴 여유도 없이 살았었다고 회상한다. 그 전쟁의 참상들을 생각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얼마의 사람들을 남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은총을 배반하지 말자고 외치고 있다. 이사야 1장 9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고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자고 호소하였다. 다 죽어가고 다 없어져도 항상 다음을 위해서 남게 되는 자가 바로 이 ‘남은 자’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읽은 분들이다.

이 본문의 말씀은 기원전 10세기경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아합 왕의 왕후로 들어온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의 여호와 종교 박멸정책 때문에 어느 때는 도망가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부딪쳐 싸우기도 했던 엘리야의 삶의 행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남은 자’의 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싸우다 싸우다 지친 엘리야,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더 이상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상황을 판단한 엘리야, 그래서 여호와는 이제 이 역사 속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결론지은 그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 하고 하나님께 넋두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어느 토굴 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장탄식을 이렇게 늘어 놓았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나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왕상 19:10).

이 짤막한 그의 하소연 속에서 우리는 지금 엘리야가 겪고 있는 고난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엘리야야말로 자기 생을 성실히 사는 자이다. 그는 현실을 피하지도 않고 적당히 넘기지도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자기 생에 대한 열심이 특별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딪히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적당히 살아 어물쩍 넘어가려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처한 우리의 현실이 무엇인가?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현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각 사람의 현실을 생각해 보자. 나 자신에게, 내가 싸워서 이기고 극복하고 고쳐야 할 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 내가 나에게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서 구김없이 살 수 있게 되기 위하여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묻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 가정에서 극복해야 할 문제에 우리는 얼마 만큼이나 철저하게 부딪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 직장의 인간화를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고통하며 애쓰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얼버무려, 흔한 말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서로 상하지 않고 다치지 않게 적당히 그냥 지나쳐 버리자는 자세로 살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현실과 부딪쳐 산화할 각오와 결단이 없이는 우리의 현실이란 악한 대로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주일의 증언에서도 그 같은 암시를 받았지만 이 ‘남은 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문제이다. ‘남은 자’란 파멸과 멸망의 와중 속에서야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되는 단어다. 소용돌이 속에서 다음 역사를 창건하기 위해 남게 된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남은다’,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과연 누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냐? 즉 ‘너는 남은 자가 되라’고 결재하는 최종 결재자는 누구며 무엇에 근거하여 그 같은 결재를 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엘리야는 자기의 역사적 현실에 아주 깊게 부딪쳐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 한 사람이다. 그는 이제 생존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제는 더 싸울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되었다. 스스로가 파멸의 직전에 있음을 느끼면서도 물러설 수가 없어 차라리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 주시라고 부탁하는 그의 삶은 무섭도록 정직한 삶이다. 소름끼치도록 철저한 삶이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적당히 살아남을 충분한 이유를 찾자면 찾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를 위하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은 이제 이 땅에는 나 외에 다른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나라도 남아서 여호와의 종교를 유지시키고 보존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마저 죽어 없어진다면 하나님 신앙의 이 위대한 전통을 어떻게 전승시킬 것인가?’ 라고 말이다.

이북에서 월남한 교회의 지도자들이면 다 비근한 경험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공산당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교회를 지킬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남은 자가 될 것이냐, 남한으로 도망할 것이냐, 공산당에 항거하여 죽어갈 것이냐, 그리고 교회와 자신이 이 역사 속에서 산화하여 버릴 것이냐, 그렇게 되는 때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이며 나는 또 어떻게 될 것이냐, 교회를 보존시키기 위해 공산당과 타협할 것이냐, 아니면 그들과 싸우든지 도망쳐버리든지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에도 교회를 보존시키고 나를 보존하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결론내리기 쉽다.

십여 년 전에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국인이 쓴 영문소설이 출간되었다. 김은국 씨의 『순교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북의 교회가 다 무너져 가는 때 평양에서 14명의 목사가 체포되어 그중 12명은 죽임을 당하고, 한 목사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고, 유일하게 한사람 신 목사라는 분만 살아남아 ‘남은 자’가 된 것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이다. 사실 죽은 12명은 목사답지 않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비난하면서, ‘개처럼’ 죽어갔다. 그들은 살아남기를 너무도 원하여 하나님을 비난하고 저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 목사는 목사였지만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인은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해 무한한 회의를 갖고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상한 신념에 대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적 하나님께는 철저하지는 않았으나 민중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한 자가 되고 ‘개처럼’ 죽어간 다른 목사들을 순교자로 높여 세웠다. 그래야 그들의 신도들이 절망치 않고 난국을, 좌절의 중심부에서라도 이기고 자신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순교자적인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평양에 있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모아놓고 교회가 보존된 내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과 정반대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신 목사는 항거했고, 항거한 것으로 알려졌던 12명의 목사들은 자기의 종교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목숨만이라도 살아남아 보려고 공산주의자 앞에서 갖은 추태를 다 부렸던 것이다.

‘남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서 결과되는 것인가? 반항할 때 반항하지 못하고, 항거할 때 항거하지 못하고, 따라서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비굴하게 살면 남아지는 것인가? 이렇게라도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위하고 살 때 남아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 원대한 앞날은 생각하지도 않고 모든 부조리에 ‘아니오’ 하고 죽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삶의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남은 자’, ‘남음’이라는 말은 멸망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남기를 목적하는 때 결코 남아질 수 없는 것이 남음의 생리이다. 남아보려고 비굴하게 되는 때 아무도 남은 자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 즉 나 자신, 내 가정, 내 기업, 내 직장, 내 사회, 내 국가 속에서 스스로 안전하기를 구하여 어떠한 파멸의 와중 속에서라도 ‘남은 자’가 되려하는 때 거기에는 개선도, 개혁도, 발전도, 남은 자도 없게 되고 만다. 남아보려고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삶이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요 인간의 교만이다.

오늘 본문을 보자. 엘리야가 하나님께 나 홀로 남았다고 푸념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가?

“나에게는 아직도 바알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다”(롬 11 :4).

바울은 이어서 이 역설 — 무릎 꿇지 않고 싸워 이제는 죽기를 자원하게까지 된 그들, 그러 나 하나님은 그들 자신을 남은 자가 되게 하는 ‘남음의 역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자기 공로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것입니다”(롬11:6).

인간으로서는 성실히 오늘을 사는 것뿐이다. 내일 누가 남을 것인가 하는 걱정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데서 온다. 내일 누가 살아남아서 교회를 유지할까 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걱정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이거나 아니면 살고 싶은 악착같은 인간의 생명 보존 욕구를 구차하게 신학적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이다. 우리의 육적 생명과 혹은 교회라는 이 틀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의 참된 모습과 교회의 참된 사명과 본질마저 잃어가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명을 유지시키고 교회를 보존하는 것,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인가? 더구나 교회가 인간적 차원의 어떤 기구라면 몰라도 그것은 엄연히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서만 좌우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느냐,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남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욕심으로 되지 않는다. 내가 남고 안 남고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그것이 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죽으려 하지 않으면 남을 수도 없나. 이것이 남음의 역설이요, 님은 자의 신비요 하나님의 경륜이다.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나 롯이 소돔의 유황불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노아나 롯의 뜻에 의해서였던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남는 것은 도피가 아니다. 현실 도피가 아니다. 현실에의 참여였다. 그 무서운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겪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부딪힌 문제는 어떻게 이 아픔의 역사를 ‘겪어야’ 할 것인가이다. 어떻게 ‘남을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정직하게 살아가자. 우리의 고난의 역사를 진지하게 겪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