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존재 의미
1974년 1월 27일 / 누가복음 24장 45-47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남은 자의 신비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어떠한 형편 속에서라도 자신이 성실하게 판단한 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자기 사는 모습이 남의 눈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너무 신경쓸 것 없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했다. 그렇게 사는 때 경우에 따라 우리 자신에게 어려움이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겪고 사는 때 우리는 파멸치 않고 소위 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성실히 살았기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그럭저럭 사는 자들이 더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그들도 남은 자인가? 남아 사는 우리들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설교 전문]
우리는 이번 ‘남은 자의 신비’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 자신이 처하고 있는 여러 삶의 상황들 속에서, 특히 그 상황이 어렵고 곤란하여 일견 나에게 손해가 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같이 생각해 오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서의 대원리는 생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라는 것이다. 부딪힌 현실을 어물쩍 피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하나님 앞에 선 나의 신앙고백의 순간으로 받아 충실히 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 남아보려는 피할 수 없는 의욕이 있어서 철저히 살기보다는 적당히 살아가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훗날 지나고 반성해 보니 철저히 사는 것이 남게 되는 비결임을 엘리야의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또 남거나 남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결정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며, 그렇기에 우리가 남게 되는 때 그 사실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난 주일 증언에서 말씀드린 바 있다.
하나님이 남게 하셔서 남은 자가 된 사람들은 엘리야, 그밖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예언자들, 롯, 노아 등을 예로 들어 말씀드렸지만 정말 생을 철저히 살아 결국 죽게 되는 결정적인 손해를 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라도 피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가 무모했거나 지혜가 없었거나 판단이 부족했거나 살아 보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없는, 우리하고는 완전히 다른 성품을 가진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도 뛰어난 판단력과 갖가지 올무에 걸리지 않고 빠져 나가는 지혜와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같이 눈물 흘리는 인간적인 성품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다만 그가 살기돋은 해방절에 죽음의 자리인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은 그것이 자기 생을 거짓없이 사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한, 자신의 생에 충실하려는 그의 삶의 자세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악인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삶의 종국은 결코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자신이요, 이 지구 위에 엄존하고 있는 교회들이며, 그에게서 빛을 받아 지신의 삶을 이룩한 수없이 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그 증거이다.
하나님은 예수와 같이 산 분들을 부활시켜 영원한 ‘남은 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의 순간순간의 생활을 적당히 살아 넘기지 않고 그 모든 순간을 신앙고백의 순간으로 사는 분들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리심을 우리는 본다. 예수의 영이 우리 중에 지금도 살아서 마틴 니뮐러 목사나 본회퍼 목사를 움직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회의 역사란 이 예수의 영이 인간들 세계에서 움직여 일한 흔적이다. 이 예수는 영원히 남은 자가 되어 인류의 호흡과 같이 숨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예수는 죽었으나 부활하여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고 말하고 있치만 ‘그가 죽었으나 부활했다’는 짧은 표현 속에 있는 ‘결국 그가 죽었다’는 심각한 상황을 쉽게 잊어버려서는 안되겠다. 그가 살해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비록 예수 혼자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물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따라다나던 제자들과 그밖에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똑같이 부딪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철저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던 무리는 물론 사랑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무리들 모두는 부딪친 상황을 피해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는가 하면 수제자인 베드로 같은 분까지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막기 위해 예수를 저주하고 배신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라고 규탄받기 이전에 자신을 속이는 삶이요 자신의 생을 정직하게 , 진지하게, 철저하게 살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그렇게 사람답게 자신에게 철저히 살지 못했다고는 해도 오늘 교회사는 그들의 발자취요 인류 역사는 그들에 의해 크게 바뀌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가 살았던 그 시절의 ‘남은 자’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부류의 ‘남은 자’들을 발견케 된다. 위대한 예수의 제자들, 그렇게도 인간적이어서 나약하기 짝이 없고 계산속이 빠른 제자들, 의리도 신의도 없는 것 같은 제자들, 두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재빨리 몸을 사려 그늘 속에서 눈을 감는 인간들, 반항해야 할 때 반항하지 못하고 항거해야 할 때 항거해 보지 못한 사람들, 그렇기에 물론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살아 남기에만 급급한 사람들인 그들, 자신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숱한 변명과 이유를 나열했던 비겁한 그들, 그들이 예수의 ‘남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과연 ‘남은 자’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예수나 니뮐러 목사, 본회퍼 목사는 죽어서 우리에게 영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자만 롯, 노아, 엘리야, 베드로를 위시한 그 비겁한 무리들이 결국 ‘남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도시 어리둥절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우리는 대체로 위의 두 부류의 남은 자들 중에서 제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 역시 자신의 안일과 생명 보존에 급급하고 조그마한 손해도 보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며 어떤 경우 신의니 의리니 하는 강단적인 진리 따위는 쉽게 내동댕이치고 마는 일이 허다한 사람들이다. 어물어물 세상을 살아 오늘 먹고 쉴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되면 그것에 만족하고 마는 일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예수를 추종하던 그 많은 무리들 중 어느 한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배드로처럼 도망쳐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아 먹고 살면 그만이지 진리니 생에의 진지함이니 철저한 삶이니 하는 것을 따지고 들 이유가 무엇이냐고 자문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관심은 예수와 같이 신앙고백적인 삶을 산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하게 살았으면서도 ‘남은 자’로 살고 간 많은 신앙의 선배들에게 쏠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남은 자’가 되었는가?
나는 최근 들어 부쩍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항변에서 그 길을 보아내고 싶다. 소련이라는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오랜 과거부터 강대국이긴 하지만 우리 백성 못지 않게 불행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1800년대 러시아는 ‘짜르’ 왕조가 계속되는 동안 백성들은 말하는 자유, 비판하는 자유, 먹고 살 자유 등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자유를 제약당했다. 이래서 뜯기고 저래서 뜯기는 갖가지 세금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동물들의 집단으로 취급하던 그는 톨스토이니 고골리니 도스토예프스키니 하는 사상가, 지식인들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사회의 혁신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최근 솔제니친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지유를 향유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는 소련 안의 모든 사회가 이 사람이 저 사람을 향한 증오와 불신의 감정으로 기득차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그 시정을 강력하게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그는 7, 8년 전 수용소에서 11년간이나 죄수 노릇을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적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 작품 때문에 그는 반사회적 작가라고 규탄받아 소련의 작가동맹으로부터 축출을 받았고 요 며칠 전 한국 신문에도 발표된 『수용소 군도』라는 문학작품을 발표하고 반역자로 낙인찍혀 고난을 겪어 오고 있다. 앞에 말한 분들의 소위 반체제 운동, 자기 자신의 양심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압정에의 항거란 가히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의 투쟁들이 계속되는 소련에 엄연히 수백년의 전통과 역사를 가진 러시아 정교회라는 기독교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 있는 지성인들, 의식 있는 사상가들, 뼈 있는 문학인들이 다 희생되어 가는 때에도 그들은 어떻게 살아 남고 있는가? 러시아 정교회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지 못한 대표적인 집단이라고 생각된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의식을 집행할 때 집행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죽으면 복되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얼빠진 교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교회를 사랑하시어서 그 교회에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을 솔제니친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재작년 말 솔제니친은 정교회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교회가 설교와 출판의 자유를 제한받아 가면서까지 굴욕적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차라리 목사는 순교의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솔제니친이 자기의 서한 속에서 주장하는 바와 그리스도의 비겁한 제자들이 남은 자로 살게 된 데에는 똑같은 한 삶의 틀이 있다. 수백년 동안 자기 백성이 그렇게도 학대받고 동물로, 혹은 기계로 취급받는 속에서도 목사들은 호의호식하며 자기 주변의 문제에는 눈 하나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자면 굴욕적으로 남아 있기를 그만 두고 차라리 순교자가 되라고 한 여기에 비겁한 무리들이 남은 자가 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 후에 남은 자 가 되어 이 땅 위에 새로운 삶의 새계를 열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들의 결정적인 회개에서 비롯한 것이다.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일어나는 순간 과거는 어쨌든 ‘남은 자’의 대열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과거나 우리 이웃의 과거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얽매여 있는 수가 많지만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것은 오늘, 지금 우리의 삶이다. 어제는 어떻게 살았든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한다. 왜냐하면 철저한 회개란 뉘우치고 가슴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훌륭히 사는 삶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이 어제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회개가 되기 때문이다. 이 회개하는 일이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약삭빠른 장삿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남은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비겁하게 살아가지만 항상 은혜로 남은 자가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남은 자가 되는 데는 어떤 관계적인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오고 거기에 대해 누구는 죽고 누구는 남아 뒷날 역사를 다시 만드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순서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남은 자가 될 수 없고 베드로와 같은 예수의 제자들이 남은 자의 일을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면허 장을 얻은 것도 아니요, 남은 자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는 그런 일도 아니다. 어제는 어떻게 살았거나 오늘을 철저히 사는 때,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과거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는 것 이다. 여기에 우리와 같이 범속한 사람들이나 예수의 제자들이 ‘남은 자’가 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남은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그 비겁했던 자기 제자들을 회개하게 하여 예수의 남은 자가 되는 영광을 주시려 히셨는가? 우리나 예수의 제자와 같이 은혜로 남게 된 자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신약성서의 말씀은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처럼 싸우고 투쟁하다가 자신의 생에 정직히 살다 죽어 간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이어받고 그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그의 제자들이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지난날에 어떻게 행동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살고 있든지간에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 이상 이제 남아 있게 된 경위를 물을 것은 없다.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는 남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삶을 지혜 있다, 없다 탓할 일도 아니다. 그것을 탓하고 시비를 가리는 데 남은 자의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산 삶의 정신, 삶의 혼, 삶의 모습을 경건하게 이어받는 증인이 되는 때 남은 자로서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소위 손해본 사람들, 파멸한 사람들의 삶을 증언하는 데 남은 자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 엄숙하고 훌륭한 삶이 이렇게 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가지 않으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삶의 전달이란 말로써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삶의 전달은 삶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신앙고백을 전수하는 것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역시 신앙고백적인 삶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희랍어로 ‘마르튀로스’는 ‘증인’이라는 뜻인데 ‘순교’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똑같은 말을 어느 경우에는 ‘순교’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증인’이라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증인이 된다는 것은 또다시 철저한 삶을 사는 것, 그러다가 손해보기도 하고 죽기도 하게 되는 순교자의 삶을 사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세대에 순교자적인 철저한 생활인이 전승되어 나가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다음 역사가 다시 빛나고 아름답게 창건되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지금 남아 있는가? 일제의 압제를 지냈으면서도, 6ㆍ25의 피바다를 건너 왔으면서도, 4ㆍ19의 물결이 휩쓸어 지나갔는데도 또 최근 이 경색된 사회 속에서도 왜 남아 있는 것인가? 우리의 가정 속에서, 우리의 일터 속에서 우리는 지금 왜 남아 있는가? 우리는 분명히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고난 속에서 산화해 간 우리의 선배, 선열들의 증인으로서’, ‘사람답게 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오늘을 다시 값있게 성실하게 살아달라고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것이라 나는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