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44] 예루살렘 시위사건의 교훈 - 1974년 4월 7일, 김상근 목사

예루살렘 시위사건의 교훈

1974년 4월 7일, 누가복음 19:28-44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마치 임금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었다. 임금 행세를 자청하였고 예수는 그 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기간이 되면 예수의 삶을 다시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4월 3일 천지가 놀랄 사건이 터졌다. 국가 전복 사건이 당국에 의해 발표되었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긴급조치 제4호였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훗날 민청학련이라 불렀다. 그에 개입하거나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그들과 회동, 통신, 연락하거나, 잠복이나 회합을 도와 주고 관여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어기면 사형까지 시키겠다 했다. 누가 잡혀 갔다, 또 잡혀 갔다는 소식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뒤에 밝혀진 대로 1,024명이 수사대상이었고 253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말이 그렇지 그만한 수의 사람들을 불러가고 체포했다면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아니될 수 없었을 것 아닌가.
급박한 몇날이 지나고 종려주일이 왔다. 예수의 수난주간이 시작된다. 성 금요일 ― 예수께서 십자가형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날도, 그리고 곧바로 부활주일도 온다. 긴급조치를 발동한 군부권력자들은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들, 아니 민중들은 잡초처럼 짓밟힌다.
이게 도대체 뭔가? 예수, 그는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부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이 처절한 현실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분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런 도전이 내 속에서 뒤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나를 가르치는 채찍이었다. 정의의 길이 보이면 그 길을 가라는 재촉이었다. 예수는 지금 무너지고 있다. 비참하게 종말을 맞고 있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던 바로 그 목격자들이 내뱉은 말은 무너짐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시오!” 반전이다! 아니, 반전되어야 하고, 반전된다는 신앙의 다짐을 예수의 사건으로부터 강요받았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구속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끝내 박정희ㆍ전두환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목요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남산 부활절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는 날, 함께 모여 기도하고 방청하던 일을 발전시켜 목요기도회를 탄생시켰다. 목요기도회는 그 엄혹한 시대에 타고 있던 희망의 불이었다. 성령의 섭리하심에 감격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향한 물음]

예수는 겸손을 가르친 분이다. 온유한 삶을 우리에게 보인 분이다. 높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즐겨 죄인의 친구가 되신 분이다. 그러나 2천년 전 예수는 돈키호테처럼 군왕의 흉내를 내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일이 있다. 자신을 메시아로 내보이며 소란을 피워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갔다.
겸손을 아는 예수가 왜 메시아 행세를 자행하셨겠는가?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에 그에게서 무엇을 보아내야 할 것인가?


예루살렘 시위사건의 재구성 : 종려주일 텍스트 이면에 감춰진 체제 고발과 파멸의 역사

텍스트의 모순: 두 얼굴의 메시아

학자들의 딜레마 : 왜 갑자기 돌변했는가?

감춰진 단서: '열 므나 비유'와 예루살렘행

체제의 타락: 청지기 직분의 붕괴

예언자들의 기소장: 시스템적 억압의 역사

예루살렘의 임계점

침묵에서 행동으로: 시위의 기획

예루살렘 시위의 해부학: 지도자, 동력, 참여자, 반대세력

충돌하는 두 세계: 터져나온 희망 vs 기득권의 공포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묵살된 경고와 예언자의 눈물

파멸의 타임라인: 예언의 역사적 성취

예루살렘 시위가 남긴 역사적 교훈

[설교 전문]


예수는 그의 생애의 말기에 접어들어 평생을 통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벌이고 있다. 자기가 메시아라는 말을 듣게 될 때마다 그는 그 같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일렀다. 혹시 어떤 사건을 통해 메시아로 추앙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면 그 사건 자체를 은폐시키곤 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신하여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으며(눅 9:18-21), 맹인 두 사람을 고쳐 주었을 때도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시오”(마 9:27-31)라고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서는 극력 피하여 온 것이 그의 평소 태도였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의 공적 활동 초기에 주저했던 태도를 버리고 정정당당히 예루살렘 입성 절차를 준비시키고 제자들을 시켜 나귀 새끼를 풀어 오게 하고, 주인이 못하게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만 하면 세상 사람이 다 응해줄 테니 문제없다는 듯이 그 태도를 돌변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선장군처럼 일단의 군중과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은 나귀 등에 올라 앉아 메시아 왕으로서 등극의 행진을 하고 있다.

이 일은 솔직히 말해서 예수답지 않은 행동으로 보여진다고 회의를 갖는 학자들까지 있는 대목이다. 어찌 온유와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메시아가 감히 자기 자신을 대중 앞에서 메시아입네 하고, 제왕 즉위식과 같은 특이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자라면 어찌 감히 자기 스스로가 굉장히 드높고 권세있는 구세주라는 의식을 가지고 메시아라고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평소 예수의 삶의 태도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사실 예수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편단심에 사로잡혀 행동했을 뿐 자기 자신이 메시아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완강히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예수가 돌아가신 후 초대교회 교인들이 고백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느냐를 살펴본다면 꼭 이렇게만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의 이 예루살렘 입성과 직접 관계된 그 전후 사정을 말해 주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 앞에 한 가지 비유를 놓고 있다. 주인께로부터 금화를 위임받아 어떤 사람은 충실히 일했으나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은 충실치 못한 자가 가지고 있는 금화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도록 했다는 비유이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기사 서두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과 예루살렘 입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는 왜 예루살렘에 들어갔는가? 그것은 금화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모든 일들을 망쳐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땅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너나할것없이 인생이라는 금화를 주신다. 자신의 삶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즐겁고 보람있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금화를 땅에 묻고 만다. 하나님은 또 가정을 주시기도 하고, 직장을 맡기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 등을 맡기신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은 그 나라의 정사를 맡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 경제권을 쥔 사람들이 집합하여 있는 곳, 그 나라의 종교를 위해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곳, 소위 성공하여 윗사람이 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힘있는 사람들,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을 섬기고 잘 받들도록 각각 자기의 자리를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맡은 봉사의 직을 다하지 않고, 그 많은 백성들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만다. 제대로 섬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시려는 하늘 나라의 질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의 삶이 싫어 그가 이 땅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힘으로 누르고 강제로 지배하며 세도를 부리고 산다(마 20:25).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구약성서의 선지자 미가는 미가서 3장 13절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야곱 가문의 수령들과 이스라엘 가문의 벼슬아치들이여, 새겨 들어라! 너희야말로 정의를 알아야 할 자들이 아니더냐? 그러나 너희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였도다. 너희는 내 백성의 살갗을 찢고 살을 뼈에서 도려내어 그 살을 삼키는도다. 너희는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조각내 마치 가마 속에 갈라넣듯 하며 마치 냄비 속에 고기를 갈라넣듯 하였도다.”

또 선지자 아모스는 아모스 3장 9-10절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얼마나 숱한 울부짖음이 그 속에서 울려오고 압제가 그 안에서 행하여지는지 보라. 그들은 정의 행하기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횡령과 노략질로 뺏은 재물을 궁전 안에 쌓아 올리는도다.”

선지자 이사야도 이사야 3장 13-15절에서 외치고 있다.

“여호와께서 변론하려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이에 백성들의 아우성은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살 수 없다고 외치고 싶으나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예수의 심정도 지금 이 같은 예언자들의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소위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비유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 그리고 내가 임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그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4-28).

그의 마음 속에는 예언자의 분노가, 하나님의 분노가 가득 찼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때의 예수의 행동을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셨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메시아연해서는 안 되겠다느니 자만스런 행동은 삼가야 하겠다느니, 겸손하고 온유해야 하겠다는 따위의 상식적인 고민을 할 여유가 없게 된 것이다. 스스로가 겸비한 인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온유한 자세를 지키기 위해, 가슴 속에서 불붙고, 심장을 터트리는 이 하나님의 분노를 눌러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새 질서, 백성을 위하는 새 질서, 새 인간의 모습, 새 삶에의 희망이 오지 않는다면 저 질식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예수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예루살렘행을 더 이상 머뭇거리고 주저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드디어 나귀를 타셨다. 그의 돌연한 태도 표변으로 실의에 잠겨 있던 사람들, 한숨짓고 주저 앉아있던 사람들, 살을 찢기고 뼈를 갈리운 사람들, 가죽을 벗기운 사람들, 울부짖으며 가슴치던 사람들, 무엇인가 새 질서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사람들, 횡령과 노략질을 당한 사람들, 그들은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을 보자, 감격에 가슴이 벅차옴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겉옷들을 훨훨 벗어 그가 가는 길 위에 펴며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온 대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새 삶을 향한 비장한 몸부림,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복이 있으라. 하늘에는 평화가 있고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이 있으라.”

그들은 이렇게 소리치며 뛰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시위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지금 예수는 새 질서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무섭고 삼엄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큰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시위의 맨 앞에 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앞장서 있다. 자유에의 물결, 인간으로 살려는 기도의 물결, 인간답게 살겠다는 의지의 물결이 예루살렘을 향해 홍수처럼 터져 흘러간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주인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일을 몹시도 불쾌하고 언짢게 여기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이런 시위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신은 그들을 꾸짖거나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그 앞에 서서 이렇게 선동하며 경거망동한 짓을 하고 있느냐고 대들고 있는 것이다. 점잖은 사람이,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백성들을 지도하고 가르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대답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정의가 영원히 묻혀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약자가 언제까지나 그 살을 찢기우는 것만은 아니다. 불의가 세상 끝날까지 덮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압제를 행하고도 끝까지 평안할 수는 없다. 횡령과 노략질로 빼앗은 재물을 그 궁전 안에 쌓아 올리고도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터뜨리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는 말이다.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확신인가?

그러나 예루살렘의 주인들은 한 치의 반성의 기미도 없다.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려는 실오라기 같은 빛도 보이지 않는다. 이 엄청난 반정부적인 시위사건을 통해서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졌고 그들의 귀는 더욱 막혔으며 그들의 눈은 아주 멀어버렸다. 이것은 마지막의 징후이다. 마지막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인가 보다.

예수는 안타까웠다. 예수는 땅이 꺼지는 한숨을 짓는다. 그의 눈에서는 드디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는 운다. 뜨거운 눈물, 가슴을 에는 눈물, 정말 괴롭고 안타까운, 그의 오장육부가 타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한탄한다.

“네가 오늘이라도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그 길이 네 눈에 가리워 있구나.”

그의 한탄은 깊고 깊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을 구해내야 하겠는데 예루살렘은 이 시위의 교훈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강퍅해지기만 한다. 이 시위의 교훈을 바로 알았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게 비극의 역사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후 유대는 로마에 반항하여 싸우다가 멸망하였다. 예수가 예루살렘 멸망을 예견하여 “때가 올 터인데 그때에 네 원수들이 진을 치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공격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포개놓이지 않게 될 것이다” (42-44절) 라고 경고한 지 37년 만에 예루살렘은 망하고 말았다. 성전의 돌들마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예루살렘은 망하고 말았다.

예수의 예루살렘 시위 사건은 예수에게는 반역자, 내란음모자로 자신을 몰아 세우게 한 실마리가 되었고, 예루살렘에게는 멸망의 예표가 되었으며, 그 후의 모든 인류에게는 한 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