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45-50] 어리석은 죽음의 진리 - 1974년 4월 12일, 김상근 목사

어리석은 죽음의 진리

1974년 4월 12일 / 마태복음 27:45-50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마치 임금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었다. 임금 행세를 자청하였고 예수는 그 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기간이 되면 예수의 삶을 다시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4월 3일 천지가 놀랄 사건이 터졌다. 국가 전복 사건이 당국에 의해 발표되었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긴급조치 제4호였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훗날 민청학련이라 불렀다. 그에 개입하거나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그들과 회동, 통신, 연락하거나, 잠복이나 회합을 도와 주고 관여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어기면 사형까지 시키겠다 했다. 누가 잡혀 갔다, 또 잡혀 갔다는 소식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뒤에 밝혀진 대로 1,024명이 수사대상이었고 253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말이 그렇지 그만한 수의 사람들을 불러가고 체포했다면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아니될 수 없었을 것 아닌가.
급박한 몇날이 지나고 종려주일이 왔다. 예수의 수난주간이 시작된다. 성 금요일 ― 예수께서 십자가형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날도, 그리고 곧바로 부활주일도 온다. 긴급조치를 발동한 군부권력자들은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들, 아니 민중들은 잡초처럼 짓밟힌다.
이게 도대체 뭔가? 예수, 그는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부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이 처절한 현실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분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런 도전이 내 속에서 뒤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나를 가르치는 채찍이었다. 정의의 길이 보이면 그 길을 가라는 재촉이었다. 예수는 지금 무너지고 있다. 비참하게 종말을 맞고 있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던 바로 그 목격자들이 내뱉은 말은 무너짐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시오!” 반전이다! 아니, 반전되어야 하고, 반전된다는 신앙의 다짐을 예수의 사건으로부터 강요받았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구속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끝내 박정희ㆍ전두환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목요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남산 부활절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는 날, 함께 모여 기도하고 방청하던 일을 발전시켜 목요기도회를 탄생시켰다. 목요기도회는 그 엄혹한 시대에 타고 있던 희망의 불이었다. 성령의 섭리하심에 감격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의인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승리하는 현실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 왜 세상은 이리도 부조리합니까?’ 하고 항변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는 생의 터전이 나락으로 떨어져내림을 느낀다. 정적에 휩싸인 가운데 죽어간 의인 앞에 선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슬라이드]


억울한 고난과 철저한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얌체 같은 자들, 남의 피를 빠는 야수들이 성공하는 부조리,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의 첫번째 모순입니다

얄팍한 상식(도덕적 이원론) : 선을 행하면 살고,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긴다

욥 : 생의 궁극적 터전에 대한 붕괴, 고난 자체보다 '윤리적 가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흔들리는 공포

욥의 절규와 예수의 절규 : 시대는 다르나, 두 의인은 정확히 같은 '부조리와 절망'의 교차점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가 목격한 핏빛 현실 :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이기지 못했다는 믿음을 스스로 이룩하려 했으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는 '네가 결국 부활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애걸조차 없는, 신이 의식되지 않는 철저한 고립과 침묵의 순간

십자가의 결단 : 하나님이 버려 내 편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이 길이 '참 인간의 길'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아무런 보장 없이 뚜벅뚜벅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는 고독한 행보

전통적, 기복적 신앙(과거의 상식) vs 어리석은 죽음의 진리(실존적 신앙)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를 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할지라도...


[설교 전문]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수없이 많은 부조리를 본다. 오늘을 꿋꿋이 바르게 사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잔꾀를 부리고 권모술수로 사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본다. 정직하게 살아보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그때그때를 적당하게 지조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융성하게 되는 것을 본다. 얌체 같은 사람들, 극악한 인간의 무리들, 남의 살을 찢고 피를 빠는 야수들이 오히려 성공함을 얼마든지 본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당신과 다투어 보아도 그때마다 옳은 것은 당신입니다. 하오나 나 당신께 시비를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의 길이 번성하며 속임수를 쓰는 자가 잘 되나이까?”(렘 12:1).

인간 세상의 이러한 모순은 항상 우리에게 깊은 문제를 안겨 주고 있다.

욥의 경우를 보자. 자식들은 모두 급사하고 재산은 일시에 사라지고 그야말로 집안이, 그의 명성이, 그의 생의 철학이 송두리째 땅 밑으로 폭싹 가라앉아 버렸다. 몸에는 종기투성이, 기와 조각으로 긁고 앉아 있노라면 개가 와서 그 고름을 핥아먹는 꼬락서니를 보며, 욥의 아내는 남편 욥을 향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소리친다. 이 말에 욥은 사지가 꼬이며 오장이 뒤틀리는 것을 아프게 경험하면서 이 숨막히는 순간, 마치 하늘과 땅이 맞닿아 가슴을 누르는 것 같은 이 순간을 잘도 견디어낸다. 그는 눈을 허공을 향해 움직이지 않고 입을 꽉 다문 채 죽음의 침묵만을 신음소리와 함께 삼키고 있다. 그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에 그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고 그의 긴장은 폭발할 것만 같아진다.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게. 죄 없는 사람으로 망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마음을 바로 쓰는 이로 비명에 죽은 사람이 어디 있던가? 나 보기에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사람은 다 심은 대로 거두더군. 그들은 하나님의 입김에 불려가고, 그의 콧김에 사라져 버리더군 그래”(욥 4:7-9).

욥도 이 정도의 상식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상식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자기가 지금 부닥치고 있는 현실 앞에서는 바위를 향해 던지는 한 개의 계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런 얄팍한 상식에 빠져 태평성세를 구가하고 앉아 있을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당신의 눈은 인간의 눈보다 못하며 질그릇 같은 인생보다도 깊이 보지 못하시나이까?”(10:4) 하고 하나님께 대들게 된다. 이런 외람된 말이야말로 정신이 온전한 신자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욥은 그러나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 사면에서 에워싸는 고통의 가시들 속에서 그렇게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욥의 이 절규는 의인이 억울하게 고난받는 것을 보면서 그 이유를 캐어보려는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반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평생을 걸쳐 믿고 신봉해 왔던, 그래서 내 모든 존재를 그 위에 세워놓았던 이 튼튼하고 단단한 신앙의 대지가 별안간 꺼지는 바람에 끝없는 심연 속으로 거꾸로 떨어져가는 사람의 부르짖음, 외마디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이야기는 “의인이 왜 고난을 받게 되는가?”, “의인이 받는 고난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따위의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의 터전, 즉 “의인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둠이 결코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하는 생의 터전을 순식간에 잃은 사람이 생의 설자리를 찾아 허우적거리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고,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또 어떠냐”고, “호박 같이 둥근 세상 둥글게 살아가자”고, “이럴 때는 이렇게 살고 저럴 때는 또 저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식으로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욥이 부닥친 이 심각한 문제는 자기의 고난에서 오는 아픔을 피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받는 순간 생겨난 생의 바탕과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심각한 물음인 것이다.

이렇게 되는 순간 욥의 전통적인 신앙은 여지없이 깨어져 나갔으며, 선한 사람은 잘되고 악한 사람은 망한다는 도덕적인 이원론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선ㆍ악이라고 하는 도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었던 하나님은 욥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가치를 가지고 세계를 통치해 가시는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고 살아가던 생은 그 근본이 마구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욥은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버려 두시지 않으시려나이까? ……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시나이까?” 하고 하나님께 대들게 된다(7:19-20).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승리하며, 의인이 수모를 당하고 악인이 영광을 받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을 방치해 두신다면 나는 무엇을 믿고 살라는 말인가?’ 하며 그는 다리가 꺾어지라고 땅을 구르며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 왜 세상은 이렇게 엉망입니까?’

여기 또 한 사람 그렇게 외치는 사람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시나이까?” 하는 욥의 외마디 소리와 같은 말이다. 그는 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겸손하게 그 앞에 나아와 그와 더불어 생을 개척해 가려는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누구보다 깊이깊이 믿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장가도 들지 않고 병자에게는 의사로, 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는 친구로, 옳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조력자로, 율법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는 해방자로 살았다. 그야말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고, 눌린 자들을 놓아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날이 이미 우리에게 온 것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날이 가면 갈수록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의롭게 살려는 자를 위하신다는 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을 그는 보았다. 그렇게도 의분과 정열을 가지고 인간에게 외쳤던 세례자 요한도 옥중에서 비명횡사하여 결국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어간 것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백성을 누르는 착취의 손아귀는 더욱 악착스러워짐을 그는 분명하게 보고 느꼈던 것이다. 여름날 파리채로 파리잡기보다 더 쉽게, 율법으로 사람을 속박하고 죽이는 종교의 횡포를 똑똑하게 보았던 것이다. 병자에게 의사가 되고, 버림받은 자들의 의기를 일으켜 놓았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테러와 협박을 불사하는 세상에서그는 살아가게 되었다. 정직하게 살려는 소시민들, 지게를 지고서라도 제 밥벌이 제가 하여, 최소한의 아비구실, 어미구실이라도 해보겠다고 허우적대는 군중들, 그러나 끝내는 실의와 좌절과 절망으로 루핑 지붕 밑에 등을 깔아버리는 판자촌 군상들을 그는 너무나 똑똑하게 보았던 것이다. 자기의 양심대로 말하다가 돌팔매의 무덤 속에 갇혀 죽은 스데반의 사건과 같은 사건을 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았다.

반면 세례자 요한의 목에 차가운 빛의 칼을 댄 임금, 백성들의 납작한 호주머니에서 일 원짜리 동전까지 빨아간 착취자들, 인간의 고난을 외면한 채 밝아 오는 새 아침만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종교인의 무리들, 예수에게 협박과 테러를 감행하던 무법자들, 그들은 이 땅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 간악한 행실이 논공행상이 되어 더 진급하고, 더 갖게 되고, 더 거들먹거리며 살수 있게 해주는 젖줄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한때 예수에게 매혹되어 5천명씩, 6천명씩 무리를 지어 따랐던 그들마저 그놈들과 한 통속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며 예수를 배반하여 강자에게 아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예수도 욥처럼 자기의 신앙이 저 밑바닥부터 무너져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 왜?, ‘하나님! 왜 세상은 이리도 부조리합니까? 왜 세상은 이렇게도 불합리합니까? 당신이 살아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의 눈에는 파리한 저 군상들이 보이지 않고 개기름 흐르는 저 무리가 보이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당신의 귀에는 저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당신께서 이 현실을 굽어 보시지 않고 당신께서 이 울부짖음을 들으시지 않는다면 인류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란 말입니까?’

예수에게 내세의 신앙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내세에 가서 보상받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이 땅 위, 오늘의 현실의 모든 부조리와 억울함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설령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룩하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이 모순을 시정해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나선 것이다. 그 나선 길은 고난의 길이요 그 고난은 결국 십자가형이 된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평생 믿어 온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이 신앙을 스스로 이룩해 보려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십자가에 이르고야 말았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자기가 가야 할 이 길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마음을 고쳐 먹지 않는다. 죽음에 부딪혀서까지 그는 이 세상의 부조리에 몸서리칠지언정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애걸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다시 이 현실을 씹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여기에 결국 네가 부활할 것이라는, 세상은 결코 부조리하지 않다는 아무런 보장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부르나 하나님이 의식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부조리한 현실이 지금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올바르게 산 분이 지금 흉악범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여기서 일하고 계신다면 이런 극단적인 부조리는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중단하지 않는다. 자기의 삶의 태도를 바꿔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다. 홀로 십자가에 매달려 기어코 이 옳은 길을 이룩하려 지금 핏방울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 엄숙한 현실, 이 경건한 삶, 이 진지한 생 앞에서 우리는 오늘 이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삶 중의 삶이요, 가장 거룩한 신앙 중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 부조리를 시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버려 내 편이 되어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기에, 이것이 인간의 길이기에 홀로 가는 이것, 아무런 보장도 배후도 없으면서 그 길이 참길이기에 뚜벅뚜벅 골고다에 올라 십자가에 매달리는 이 모습이야말로 참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예수의 생을 기념하여 여기 모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유를 들어 내가 가야 할 길, 내가 걸어야 할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던가? 세상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세상을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고, 그렇게 살아 보았자 나만 손해라고 핑계하며 물러서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우리는 예수나 욥이 가졌던 상식, 즉 옳게 살려는 자를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는다, 결국 이기고야 만다는 상식을 아예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다.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지혜가 우리를 사로잡은 지 오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진지하게 살려하지 않는다. 부평초처럼 떠돌며,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기를 자청한다. 그러나 인간 예수가 오늘 우리에게 보이는 삶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지만, 이 길을 나 홀로 가도록 하나님께서도 외면하고 계시지만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절망과 우리의 좌절은 그 다음에 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 절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를 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얼마나 맥빠지는 소리인가? 그분이 기어코 죽고 말다니, 그분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망하고 만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분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걸음을 걸으신 분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는 오늘 저녁 이 모든 항변에도 ‘너희도 그렇게 살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된다는 아무런 보장도 아직은 없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기에 인간이 가야할 길을 가라는 것뿐이다. 그것이 참 인간의 모습이기에 그렇게 살라는 것뿐, 설령 그것이 죽음으로 끝맺는다 할지라도 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죽음, 이 어리석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저녁 이런 삶을 결단해야 하겠다.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의 옷자락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길을 개척하고 내가 내 갈 길을 가는, 내가 이땅의 부조리를 개혁하고 내가 이 땅의 모순을 바로잡겠다고 결단해야 하겠다. 그것이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 같은 결단과 노력을 하는 색다른 삶의 무리들이다. 우리의 이 모임 위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해도 동요되지 않고 제 길을 가는 축복이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