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부활’ 신앙
1974년 4월 14일 / 마태복음 27:50-54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마치 임금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었다. 임금 행세를 자청하였고 예수는 그 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기간이 되면 예수의 삶을 다시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4월 3일 천지가 놀랄 사건이 터졌다. 국가 전복 사건이 당국에 의해 발표되었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긴급조치 제4호였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훗날 민청학련이라 불렀다. 그에 개입하거나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그들과 회동, 통신, 연락하거나, 잠복이나 회합을 도와 주고 관여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어기면 사형까지 시키겠다 했다. 누가 잡혀 갔다, 또 잡혀 갔다는 소식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뒤에 밝혀진 대로 1,024명이 수사대상이었고 253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말이 그렇지 그만한 수의 사람들을 불러가고 체포했다면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아니될 수 없었을 것 아닌가.
급박한 몇날이 지나고 종려주일이 왔다. 예수의 수난주간이 시작된다. 성 금요일 ― 예수께서 십자가형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날도, 그리고 곧바로 부활주일도 온다. 긴급조치를 발동한 군부권력자들은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들, 아니 민중들은 잡초처럼 짓밟힌다.
이게 도대체 뭔가? 예수, 그는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부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이 처절한 현실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분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런 도전이 내 속에서 뒤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나를 가르치는 채찍이었다. 정의의 길이 보이면 그 길을 가라는 재촉이었다. 예수는 지금 무너지고 있다. 비참하게 종말을 맞고 있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던 바로 그 목격자들이 내뱉은 말은 무너짐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시오!” 반전이다! 아니, 반전되어야 하고, 반전된다는 신앙의 다짐을 예수의 사건으로부터 강요받았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구속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끝내 박정희ㆍ전두환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목요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남산 부활절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는 날, 함께 모여 기도하고 방청하던 일을 발전시켜 목요기도회를 탄생시켰다. 목요기도회는 그 엄혹한 시대에 타고 있던 희망의 불이었다. 성령의 섭리하심에 감격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향한 물음]
부활주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 불가사의한 일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막연하게 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도 음미하지 않고 아무런 마음의 갈등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간증도 없이 그저 하나의 연중행사로 참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금요일에 마태복음 27장 45-50절만 읽었다. 그 다음은 이미 예수의 죽음이 부활로 승리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부활절을 맞는 한국교회 교인들, 또 우리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어떤 것이며, 이 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더듬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할 때 그 고난의 시작은 공명정대하지 못한 우리의 세계에서부터, 올바르게 살아보려고 애타는 사람들의 실의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해 항의하는 반항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했다. ‘하나님! 세상이 왜 이렇습니까!’ 이 세상의 갖가지 부조리와 모순, 잘 살아 보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예기치 않은 어두운 운명이 그 인간들을 절망으로 삼켜버리곤 하는 이 냉혹한 현실 — 이에 예수는 반항하여 인간답게 살려는 자가, 정직하게 살려는 자가, 의를 위해 살려는 자가 승리하며, 버림받고 따돌림받은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게 되는 세상, 이런 세상이 어서 빨리 이루어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하나님이 이룩해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이룩하겠다고 결단하고 나선 삶의 종국이 십자가의 고난이 되었음을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불합리한 이 세계 어디서 하나님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의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순간에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갔다는 말이다.
얼마 전 말씀드렸던 김은국 씨의 소설 『순교자』도 인간의 부당한 고난과 신의 공의성 사이에서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한 목사를 소재로 삼고 있다. 살펴보면, 주인공 신 목사는 인간들이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도 피나게 고통받는 순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 천부당만부당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신 목사가 신봉하던 하나님은 저 높푸른 하늘 저쪽, 금빛 찬란한 보좌에 정좌하고 계신 분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며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고난의 종으로서의 신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보이는 것은 아무 죄없이 죽어 간 사람들, 아무 잘못없이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어린 것들, 수없는 인간의 고통만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그래서 인간의 고통에 외면하는 신을 거부하고, 몸소 자신이 마치 인간 예수가 걸어간 것과 같은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 갔던 것이다.
신 목사가 일생을 통해 믿어 온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본 것은 오히려 악한 자가 잘되고 그 악의 그늘 밑에서 숙여 사는 자기 이웃들은 결국 패하고 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이 모든 불의를 그대로 용납하고 속수무책으로 뒷짐만 지고 서 있는 신을 불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믿어왔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신 목사는 예수처럼 하나님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 전쟁의 고통, 가난, 질병, 죽음, 악인이 이기는 현실에 대해 끝까지 끈덕지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고문과 냉혹한 죽음 앞에서 굴복한 동료 목사들을 같은 인간으로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평생 동안 충성을 다한 그들을 이렇게 혹독한 고통과 죽음 속에 내버려두고도 마음 편안히 지내는 불의의 하나님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부당한 일도 있는가 하고 그는 영혼 깊이 탄식한다.
드디어 김은국 씨가 그린 순교자 신 목사는 결국 자기가 죽게될 것을 알면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던 것처럼 북한에 남아 있는 신도들의 고통을 대신 지고 공의와 사랑을 몸소 이룩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그 숱한 고난을 견디어 내며 폐허가 된 북한의 절망 속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사실 부활신앙이라는 독특하고 유일한 신앙 위에 교리를 세우고 우리의 삶을 그 위에 올려 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어느 때는 사자의 아가리 속에서도, 어느 때는 투우장의 투우의 분노의 표적이 되면서도, 어느 때는 돌무더기에 깔려 죽어가면서도, 어느 때는 불태워 죽임을 당하면서도, 어느 때는 원수의 총칼 앞에서 죽을 시간을 세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그 부활의 신앙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오늘의 가난과 오늘의 치욕과 오늘의 고통과 오늘의 괴로움을 이를 악물고 참아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인간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아니다. 가장 강한 것 같으면서도 이것은 현실을 피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도피하려는 약자의 심보요 오늘을 체념하는 패배자의 모습이다. 우리의 오늘의 신앙의 현주소가 이렇게 피안적인 내일에 기대를 두고 있기에 ‘부활을 회의해 본다’는 것은 절대금물, 터부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눈을 꼭 감고 믿을 사항이지 따지고 재볼 사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부활의 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다. 오늘 우리의 하루 하루, 한순간 한순간의 생활과는 아무 관계없이 이 다음에 부활하리라는 신앙만 갖고 있으면 막연하게나마 저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겠거니 하는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소망은 오늘을 망각하고 이 세상 一 부정과 부조리와 억울함과 고통이 깔린 이 세상을 잊어 버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망각하고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비기독교적인 소망이다. 이러한 부활사상은 이단적이며 통속적인 것으로서 여기서도 적당히 잘 살고 죽어서도 편안히 지내보자는 욕심의 소산이지 신앙은 아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현실적이고 생생한 십자가 위의 고난과 그 고통을 망각하는 부활신앙은 결코 기독교적인 신앙은 아니다. 십자가를 뺀 부활신앙, 그리스도의 고난과 치욕을 잊어버린 부활의 영광은 한낱 종교적 단편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부활은 요리조리 현실을 피하고 그야말로 제몫의 십자가를 피하여 사는 자에게 내려지는 하사품이 아니다. 부활은 그저 믿고 앉아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내려지는 축복이 아니다.
부활은 이 땅의 모든 부조리를 보고 겟세마네의 고뇌와 몸부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외치는 항변으로 한 발자국 전진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결국 그 항변 때문에 자신이 십자가 위에 매달린다 하더라도, 그리고 예수처럼 십자가 위에서 맥없이 숨을 거두고 만다 할지라도 옳음을 세우기 위해,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 공의가 강 같이 흐르게 하기 위해, 그 길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삶의 태도에서 부활은 싹트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 예수의 노력이 “예수께서 다시 큰소리를 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노력도 역시 맥없이 끝나고 말 것도 각오해야 한다. 빛도 없이, 생색도 없이 사그라지고 말 것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산다면, 그 다음 순간을 마태복음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다시 큰소리를 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라는 기가 막히도록 절망적인 인간의 노력의 끝을 서술하고는, 곧 이어서 그 속도를 바꾸어 “그런데 보시오”라는 말로 그 장면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처럼 가야 할 길을 정직하게, 진지하게 가기만 한다면 그 끝이 죽음이라도 좋고, 절망이라도 좋고, 좌절이라도 좋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서 바톤을 이어 가신다’ 는 것을 마태복음 기자는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보시오”라는 말 다음의 사건은 인간들의 노력이나 인간들의 몸부림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가장 철저하게 사는 자, 가야 할 길을 어김없이 가는 자,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애써 노력하는 자,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니 나라도 공의를 세워야 하겠다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 一 그런 자의 생 다음에 반드시 “그런데 보시오”라는 말로 시작되는 후편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그 후편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바로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마 27:51-53).
이것은 결코 실의의 장면이 아니다. 좌절의 장면이 아니다. 절망의 장면이 아니다. 위축된 장면이 아니다. 먹구름이 깔린 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밝고 기쁘고 즐거운 승리의 함성이다. 이 승리의 감격, 이 승리의 기쁨, 결코 죽고만 말게 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 이것을 가슴이 터져라고, 목이 터져라고 노래하며 기뻐 날뛰는 장면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부활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죽은 지 3일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진지한 생, 철저한 생의 절정인 십자가의 죽음 바로 다음 순간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 예수의 정직한 고난 —절망적 최후 —“그런데 보시오”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 이 일련의 사건을 보고서야 백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고백한 것처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라는 새 질서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금 다시금 음미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목요일에 주님의 식탁에 서로 모여 앉지 않고서는, 고난의 금요일에 함께 그 고난의 길을 주시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고난의 금요일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현실을 강조하자는 것이고, 십자가의 현실을 음미하자는 것은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 그저 믿기만 하면 부활된다고 하는 사이비 신학,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는 一 이 거짓되고 비기독교적인 부활의 소망을 우리는 이 순간 파기해 버려야 하겠다. 이것은 가장 욕심에 찬 신앙이며 세속주의적인 소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부활은 십자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부활을 똑똑히 주시한다면 오늘 우리의 삶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피안적인 부활의 소망은 여지없이 파괴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현실에 뛰어들며 현실의 십자가에 매어달려야 한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명사를 부활신앙이 아니라 ‘고난부활 신앙’으로 바꾸어야 하겠다. 그래야만 우리는 피안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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