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6-28] 하나님의 인권 선언 - 1974년 11월 3일, 김상근 목사

하나님의 인권 선언

1974년 11월 3일 / 창세기 1장 26-28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인권의 절대성

마침 세계인권주간이 왔던 게다. 지난 얼마 동안을 돌이켜 보았다. 앞서 언급한 민청학련사건을 북한의 사주와 연결시킨 고리가 이른바 인민혁명당이었다.

민청학련사건과 함께 인혁당사건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재판을 빠르게 진행시키더니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날 새벽에 7명을 사형집행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재심청구를 낼 기회조차 박탈해 간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사람이 이렇게 취급당해도 우리는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몇 주검을 화장장으로 날라 화장해 버렸다. 한두 주검은 집으로 운구해 주어 장례식을 했다. 그중 한 주검이 우홍선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장의차로 운구되는 남편의 뒤를 그 부인이 따른다. 몸을 잘 가눌 수 없어 했다. 나는 덥썩 부액했다. 다른 쪽을 보니 신현봉 신부가 부액하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언덕을 비틀거리며 내려 걷던 부인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외마디를 내뱉는다. “하나님, 이 개새끼야. 왜 구름 한 점이 없냐? 왜 바람도 안 부냐? 왜 비도 안 오냐? 천둥도 안 치냐? 하나님, 이 개새끼야.” 신부와 목사 사이에 선 한 인간의 절규다. 겨우 차에 태웠다. 장지에 따라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의 절규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인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인간이 이렇듯 비참할 수 있는 것인가. 천벌은 없나.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집에 가지 못했다. 길에서 강제 연행되어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 목요기도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했었고, 그것이 문제된 것이었다.

기자들이 일으켰던 자유언론실천운동도 이 설교가 있기 두어 주 전에 일어났다. 유신권력에 언론인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악마 같은 권력을 편들기에 급급했으니 가슴을 치고 또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회 분열분자인 맥킨타이어를 불러들여 집회를 하고, 한국예수교협의회와 대한기독교연합회는 성명을 발표하여 우리를 비판하고 나섰다. 성서는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저 짓밟히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권리다. 한 하나님, 한 주님을 고백한다 할 수 있는 것인가.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최근 ‘인권’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자주 듣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인권이 빈번하게 유린되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은 도대체 성서도 인권을 말하고 있는가? 특히 하나님은 인권을 어떻게 취급하시고 계신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권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고백적인 삶이 이룩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권 선언 : 1974년 11월 3일, 창세기에 새겨진 인간의 절대적 존엄과 통치의 한계

교회가 선언한 인권의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기독교의 '인간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극복해야 할 신학적 장벽 : 인권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인간을 지을 때의 하나님의 의도는 '과제'를 맡기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는 곧 신의 과제를 위임받은 '대리통치자'로 탄생한 것이다.

제1선언 : 통치의 명확한 한계

제2선언 : 지배가 아닌 공존

위임과 축복의 역동성

제3선언 : 인권 파괴의 원초적 결과

절대적 생명권의 보장 : 창세기 4장 15절 - 하나님의 인권 선언의 절정

1974년 대한민국을 향한 예언자적 진단 : 우주적 대리통치, 대등한 공존성, 인권의 절대성

인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만 속한 절대적인 것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인권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권 선언이다.


[설교전문]


11월이 막 지나면 세계는 소위 인권주간을 지킨다. 1948년 12월 6일 유엔이 “세계만민선언”이라는 인권선언을 발표했고 그날을 기점으로 온 세계가 인권주간, 혹은 인권의 달을 지켜오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매년 요란스런 아치며 플래카드며 입간판이 여기저기 나부끼고 서게 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인권의 달을 맞기에 앞서 나는 참 인권이란 무엇이며 인권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이번 주제 속에서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더구나 최근 우리 나라가 인권의 문제를 국내외에 선언한 바가 있는데 1962년 미국 연합장로교가 인권선언을 발표했고, 우리 나라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도 작년 11월 24일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요 며칠 전 NCC 인권위원회에서 다시 인권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교회가 선언한 모든 인권선언의 근거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라는 데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었다고 그 격을 상당히 높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감히……”, “이 죄인은 아무 공로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등등이 우리의 기도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도 죄인으로서이지 그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고귀하고 존귀한 자세로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죄의 규탄이 너무 지나쳐서 자학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감히 고개도 못 들고 눈을 감으면 죄인으로서의 자책 때문에 쩔쩔매는 정신질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죄인으로서 소극화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자들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창조 때 인간에게 부여한 본래적인 그 어떤 것인데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 일부, 혹은 전부가 상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루터는 타락과 함께 거의 상실되었다고 하고, 칼빈은 조금 남아 있는 정도라 하며, 바르트는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본다. 이와 같이 믿어 왔기 때문에 이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 때 인간에게 부여한 본래적인 그 무엇이라고 하여 그것과 하나님과를 연결시키는 사고는 어디까지나 그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 앞에서 말한 여러 인권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이라는 전제는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하겠다.

인간을 지을 때의 하나님의 의도는 그 인간에게 어떤 과제를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지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과제를 맡겨, 일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업을 대행케 하는 대행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는 곧 신의 과제를 받은 존재다. 1장 26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기록된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과제를 맡아 탄생된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지음받은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그 통치의 한계를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하여 그 속에서 아름답게 사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자로서의 본분이지 인간이 인간을 다스려서는 안 되는 것이고 또 다스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을 현대의 말로 바꾸면 인권이란 하나님만은 좌우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인간이 인간의 인권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창조되어 우주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임되었으나 인권에 관한 한 통치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고,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서술을 잇고 있다. 인간에게 통치의 위임을 하신 후 그들을 축복하신 말은 상당히 생동적이다. ‘생육하라 → 번성하라 → 충만하라 → 정복하라 → 다스리라.’ 이 말은 인간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결의를 창조 후 축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위대한 축복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하신 축복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창세기 기자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썼을 때 그의 의도 속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수과제에 대한 전달의도가 있었다. 이 세계 대리통치자인 인간의 과제 속에 ‘공존의 과제’가 포함되어 있음을 역설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2장 18절에 보면 “야훼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쓰고 있다. 이 말을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사역했다. “야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를 위하여 그에게 꼭 알맞는 구조자를 만들리라.” 즉 홀로 있는 것은 아예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라는 데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말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인간은 그냥 인간(humanity) 이 아니라 같이 어울려 사는 인간(co-humanity)이요, 그냥 존재(existence)가 아니라 같이 사는(co-existence)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같이 사는 존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를 하나님은 “좋지 못하니”라는 표현을 써서 공존의 과제를 역설하고 있다. 앞의 창조기사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로 표현한 말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여기서 인간은 공존하게 되어 있는 존재이지 어느 누가 어느 누구를 대등치 않은 자리에 놓아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지 못하니”라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도 역시 갑이 을의 인권을 절대로 침범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같이 살며, 같이 통치하며, 같이 장래를 설계하며, 십자가를 지게 되면 같이 지는 것이지, 나 혼자만 통치의 위임을 독차지하고 나 혼자만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인권을 부질없이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인의 평등과 통치 그리고 공존의 자유를 박탈할 수는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는 엄격한 공존만이 있는 것이지 계급이 있어서 절대 인간이 탄생되는 상태를 하나님은 “좋지 못하다”고 심판하신다.

이러한 공존의 인간상이 파괴된 상태를 악의 원초적 현실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4장 1절 이하이다. 이 대목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인권선언의 절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게 벌을 내리신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1-12).

아벨의 인권을 침해하여 그를 죽였고 그 피가 땅에 뿌려져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 같은 인권 침해자의 종국은 자기가 이제까지 갈고 닦은 땅, 통치하여 왔던 땅, 그 땅으로부터 거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 땅에 호소해도 별도리 없이 망명과 은거와 유랑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형벌이다. 그렇기에 가인은 이렇게 애걸한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절).

그러나 여기 인권의 가장 숭고한 절정이 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음을 면케 하시니라”(15절).

비록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여 살인한 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으로 서는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그의 인권을 유린한다면 7배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죽일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가인에게 주신 표는 인권의 표이다. 인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다. 인권은 그렇기에 절대적이다.

지금까지 나는 세 가지 점을 들어 인권의 절대성을 말했다.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은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창조되었다는 말이며, 그 통치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우주 삼라만상이지 인간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 침해의 사태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악적인 사태라는 말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말은 서로 공존하며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말이지 통치자와 피통치자, 통치의 조타수와 구경꾼으로 창조했다는 말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천부적 인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유신헌법 제정으로 이미 자행된 위정자와 국민 사이의 공존성의 파괴는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는 죄악적인 사태라는 말이다.

셋째로, 아벨의 인권을 침해한 가인이 유랑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인권을 침해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것이나 그의 인권도 하나님은 침해를 용납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이미 인권 침해의 사태가 자행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가인과 같이 유랑하며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권도 종국에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권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