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인권 선언
1974년 11월 17일 / 누가복음 15장 1-7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인권의 절대성
마침 세계인권주간이 왔던 게다. 지난 얼마 동안을 돌이켜 보았다. 앞서 언급한 민청학련사건을 북한의 사주와 연결시킨 고리가 이른바 인민혁명당이었다.
민청학련사건과 함께 인혁당사건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재판을 빠르게 진행시키더니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날 새벽에 7명을 사형집행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재심청구를 낼 기회조차 박탈해 간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사람이 이렇게 취급당해도 우리는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몇 주검을 화장장으로 날라 화장해 버렸다. 한두 주검은 집으로 운구해 주어 장례식을 했다. 그중 한 주검이 우홍선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장의차로 운구되는 남편의 뒤를 그 부인이 따른다. 몸을 잘 가눌 수 없어 했다. 나는 덥썩 부액했다. 다른 쪽을 보니 신현봉 신부가 부액하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언덕을 비틀거리며 내려 걷던 부인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외마디를 내뱉는다. “하나님, 이 개새끼야. 왜 구름 한 점이 없냐? 왜 바람도 안 부냐? 왜 비도 안 오냐? 천둥도 안 치냐? 하나님, 이 개새끼야.” 신부와 목사 사이에 선 한 인간의 절규다. 겨우 차에 태웠다. 장지에 따라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의 절규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인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인간이 이렇듯 비참할 수 있는 것인가. 천벌은 없나.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집에 가지 못했다. 길에서 강제 연행되어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 목요기도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했었고, 그것이 문제된 것이었다.
기자들이 일으켰던 자유언론실천운동도 이 설교가 있기 두어 주 전에 일어났다. 유신권력에 언론인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악마 같은 권력을 편들기에 급급했으니 가슴을 치고 또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회 분열분자인 맥킨타이어를 불러들여 집회를 하고, 한국예수교협의회와 대한기독교연합회는 성명을 발표하여 우리를 비판하고 나섰다. 성서는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저 짓밟히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권리다. 한 하나님, 한 주님을 고백한다 할 수 있는 것인가.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전전 주일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권리인 인권을 어떻게 보장해 주셨는가 하는 것을 구약성서를 통해 살펴 보았다. 예수도 인권을 말씀하셨는가? 말씀하셨다면 그의 인권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전전 주일 증언을 통해 창세기 1장 26-28절과 4장 10-15절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인권선언에 대하여 증언한 바 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은 인권이란 절대적인 것이며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이 하나님의 입장이요 성서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최근 인권이라는 말이 크게 문제되면서 교회가 소위 인권회복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국에 주신 크신 축복이라 믿고 감사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인권회복 운동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일하시는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믿고 이 일에 “그의 뜻을 따르는 겸손과 승리자의 확신으로” 성큼 응하고 있음을 정말 깊이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움직임이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종교인은 조용히 종교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소위 종교적 행위에만 충실하라고 나라의 고위층에 계신 분은 훈계하고 있다. 또 외국의 부흥사를 초빙해다가 한국 교회는 공산주의에 물들어 있다며 그 증거는 최근 교회가 취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한국교회가 인권회복 운동을 펴는 것을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이적행위인 양 선전케 하고 있는데 그것은 실로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논리대로 나간다면 인권회복 운동이라도 오늘의 고정된 질서를 조금이라도 동요시킨다면 공산주의의 방조자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인권회복 운동이 만약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라 한다면 이 같은 행위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 예수에게서 나타났던 인권에 대한 사상과 신념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다음 주일에는 그가 인권을 위해 어떻게 투쟁하였는가 하는 것을 성서에서 찾아 오늘 한국 사회의 사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교의 방향을 찾아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예수는 구약성서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인권이란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는 것으로 인간이 창작한 무엇이든간에 그것이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절대로 침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 예수의 입장이다. 인권이라는 각도에서 볼 때 예수는 처음부터 이 점에 있어서 굉장히 철저한 분이었다고 보여진다.
이제 복음서 몇 군데를 찾아 보자.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인간이란 나누고 쪼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통전된 존재로 보고 있다. 영혼과 육체로 인간을 나누어 60이 되고 70이 되어 육체가 쇠잔해진 후에 이 육체는 땅 속에 묻히고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가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품속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전통은 아니었다. 동양이나 서양 모두에 이 같은 영, 육을 분리하는 전통이 있어서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육은 속되고 잠정적인 것이요 영은 거룩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다.
그래서 성서 번역에도 간혹 영혼, 육체 등을 나누어 놓은 곳이 없지 않아 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도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모두 죽여 게헨나에 넣을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영혼과 몸을 갈라 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 26절에는 여기 영혼이라 번역한 똑같은 단어를 “목숨”이라 번역하고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또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가복음 9장 25절에는 똑같은 말을 “자기를 잃으면”이라고 되어 있다. 마태복음 6장 25절에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영혼, 혹은 목숨이라 번역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스로의 혼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떤 민족에게나 민족혼이 있다. 이것은 민족의 몸이 있는 것처럼 그것과는 별도로 민족의 혼이 있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정신’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나에게서 내 정신을 만약 뺀다면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니다. 적어도 살아 있는 ‘나’는 아니다. 나는 이것을 현대어로 ‘나의 인권’이라 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앞의 성서를 다시 읽어 보자.
마태복음 10장 28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몸은 죽일지라도 인권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태복음 16장 26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인권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또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인권을 바꾸겠느냐?’ 이렇게 영혼, 혹은 목숨이라 번역된 낱말을 현대어로 인권이라 바꾸어 놓아도 아무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수의 인권에 대한 사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첫째로, 사람은 사람의 인권을 짓밟을 수 없고 짓밟혀서도 안된다는 선언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의 ‘몸은 죽일지라도 인권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예수의 말씀 속에서 인간이 비록 다른 사람의 몸은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인권만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선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말은 비록 우리의 몸이 두 동강나고 세 동강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사상이다. 인간은 타인의 인권을 짓밟을 수 없는 것이요 또 인간이라면 자신의 인권을 절대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만큼 인권에 대한 신념이 철저하지 못하다.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것도 예사거니와 힘들게 자신의 인권을 지키는 것보다도 차라리 인권을 버리고 몸의 안일을 취하려는 비겁함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인권을 빼앗긴 인간이란 하나의 생물에 불과하지 인간은 아닌 것이다.
둘째로 발견할 수 있는 예수의 사상은 인권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예수는 ‘몸은 죽일지라도 인권은 죽이지 못하는……’이라는 말씀 끝에 참새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참새들은 돈에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러한 참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이다. 또 마태복음 6장 25절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 하늘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하시고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신다. 이어서 “어찌하여 너희는 옷에 대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말하신다. 이 말은 인간을 참새나 들새나 들풀과 나란히 비교하고 있는 말은 아니다. 새나 들풀의 생명까지 하나님께서 정말 지키시고 계시다는 말도 아닐 것이다. 다만 마지막 말들, 즉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에서 인간의 인권, 인간 자신 전체로서의 나는 철저하게, 참새의 목숨, 새나 꽃의 가꿈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간의 목숨, 인권이 마치 권력자나 윗사람에게 속해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고 산다.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 맘대로 하겠다는 사고나 내가 집권자이니 내 백성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예수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이다.
셋째로,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인권이라는 사상이다. 마태복음 16장 26절의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인권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또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인권을 바꾸겠느냐?”는 더 설명할 필요없이 온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인권이라는 예수의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과연 그러한가? 어느 때는 국가가 인권보다 더 소중하게, 어떤 정치적 체제가, 돈이, 체면이, 법이 인권보다 더 존귀하게 취급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본다. 그런 부차적인 것들이 절대화되고 우상화되어 있는 데서 오는 비극이 오늘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이상과 같은 예수의 인권사상이 가장 극적으로 잘 표현된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신약성서의 말씀이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권이란 절대로 침해될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는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땅에서 이 인권의 유린이란 너무나 당연한 것인 양 자행되고 있다. 그 가장 큰 명분이요 그럴싸한 명분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것이요,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인 기본권을 유보시키자는 명분이다. 이것이 소위 오늘날의 조직사회에서는 얼마든지 정당화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99마리 양과 1마리 양, 즉 대와 소, 국가이익이라는 것과 국민 개인의 희생을 예수는 절대로 대등하게 놓고 취급하고 있지 않다. 대가 소중한 것처럼 소가 소중하고 국가이익이 중요한 것처럼 개인의 자유도 중요하다. 대나 국가는 99마리 양처럼 더 좋은 조건의 들에 있고 소와 국민의 자유는 잃어버린 1마리 양처럼 구체적으로 잃어버렸다면 예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소를 위해 구원의 사업을 전개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국민의 자유가, 얼마나 많은 국민의 권리가, 얼마나 많은 국민의 인권이 대의 질서, 국가의 이익, 99마리라는 명분에 의해 유린되고 짓밟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인권을 찾아 그 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끝까지, 회복할 때까지 싸우고 투쟁하여야 한다. 만약 여러분 자신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면 스스로 잃어버린 인권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그 길에 목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