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위기와 회복
1974년 11월 24일 / 마가복음 2장 23-28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인권의 절대성
마침 세계인권주간이 왔던 게다. 지난 얼마 동안을 돌이켜 보았다. 앞서 언급한 민청학련사건을 북한의 사주와 연결시킨 고리가 이른바 인민혁명당이었다.
민청학련사건과 함께 인혁당사건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재판을 빠르게 진행시키더니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날 새벽에 7명을 사형집행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재심청구를 낼 기회조차 박탈해 간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사람이 이렇게 취급당해도 우리는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몇 주검을 화장장으로 날라 화장해 버렸다. 한두 주검은 집으로 운구해 주어 장례식을 했다. 그중 한 주검이 우홍선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장의차로 운구되는 남편의 뒤를 그 부인이 따른다. 몸을 잘 가눌 수 없어 했다. 나는 덥썩 부액했다. 다른 쪽을 보니 신현봉 신부가 부액하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언덕을 비틀거리며 내려 걷던 부인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외마디를 내뱉는다. “하나님, 이 개새끼야. 왜 구름 한 점이 없냐? 왜 바람도 안 부냐? 왜 비도 안 오냐? 천둥도 안 치냐? 하나님, 이 개새끼야.” 신부와 목사 사이에 선 한 인간의 절규다. 겨우 차에 태웠다. 장지에 따라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의 절규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인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인간이 이렇듯 비참할 수 있는 것인가. 천벌은 없나.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집에 가지 못했다. 길에서 강제 연행되어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 목요기도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했었고, 그것이 문제된 것이었다.
기자들이 일으켰던 자유언론실천운동도 이 설교가 있기 두어 주 전에 일어났다. 유신권력에 언론인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악마 같은 권력을 편들기에 급급했으니 가슴을 치고 또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회 분열분자인 맥킨타이어를 불러들여 집회를 하고, 한국예수교협의회와 대한기독교연합회는 성명을 발표하여 우리를 비판하고 나섰다. 성서는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저 짓밟히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권리다. 한 하나님, 한 주님을 고백한다 할 수 있는 것인가.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난 두 주간 동안 성서에 나타난 인권사상을 상고했다. 그러한 가장 존귀하고 숭고한 인권사상이,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이 이 나라 이 사회에서 과연 보장되고 있는지, 만약 우리의 인권이 위기에 부딪혀 있다면 그 회복의 가능성을 어디서 찾아야 하겠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인권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러한 권리에 대한 성서적인 선언을 지나간 두 번의 증언을 통해 말씀드린 바 있다. 여기서 나타난 인권 선언에 의하면 ⑴ 인권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또 그에게만 속해 있는 절대적인 것이며, (2) 그렇기에 인간은 타인의 인권을 짓밟을 수도 없고 또 짓밟혀서도 안 되며, (3)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인권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대부분의 자유민주 국가의 헌법정신에 깊이 반영되어 있어서 소위 ‘천부인권론’ 위에서 그 나라의 헌법을 제정하고 있다. 천부인권론이란 글자 그대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자유와 평등을 골격으로 한 권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 인권회복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여기저기서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에 지난 두 번의 증언을 우리의 신앙의 바닥에 깔고 오늘날의 인권의 위기를 살피고 그 회복의 길을 성서 안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우선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기에 앞서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식량위기에 관해 말씀드리려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상처는 치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느낌이다. 요 얼마 전에 세계 각나라의 대표가 로마에 모여 이 인류를 어떻게 하면 굶주림에서 해방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가졌다. 우리는 오늘 아침도 아마 식사를 못 하고 오신 분이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세계의 40억 인구 중에 약 8억 이상, 즉 2할의 인구가 영양실조 내지는 굶어 죽기 직전에 놓여 있어서 매초당 25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굶주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극심하여 그곳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매주 1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은 고양이와 개, 죽은 새,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를 먹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아와 함께 디프테리아가 만연되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의 부모들은 약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한다. 굶주림으로 오래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으로 일찍 죽는 것이 낫다는 이유에서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1972년 세계적 흉작 이후 중공, 소련 등에서 식량을 대규모로 구입하였다거나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거나 하는 이유 등이 지적되고 있으나 다른 각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 싶다. 강자가 약자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죄악 때문이다. 작년 이래 수십년 동안 백인들에 의해 빼앗겨만 왔던 아랍국가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적 자원인 석유를 경제적인 무기로 삼게 되었고, 그렇게 되니 세계의 경제권이 미국으로부터 아랍으로 넘어가게 될 위험이 생겼다. 이 경제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은 불가불 식량을 무기화하여 비싼 돈을 받지 않고는 팔지도, 무상원조도 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가장 약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그것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죄악 때문이다. 하루 수십만씩 아사자(餓死者)를 내는 방글라데시의 1인당 연간 식량소비량이 겨우 180kg인데 비해 캐나다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톤이나 되어도 아사자를 위해 자기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뒷짐지고 있는 것이 가진 나라의 태도다. 또 선진국들은 정원의 잔디나 골프장의 잔디를 위해서 비료를 다른 나라에 원조하거나 팔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후진국들의 식량증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 사람들이 1주일에 햄버거 한 개씩만 아낀다면 인도 사람들의 식량난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데도 그것이 불가능한 사실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나 기가 막힌 사실인가? 세계 안에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하루 수십만을 죽여도 정당화되는 사회, 자신의 포식을 위해 다른 사람은 죽어도 괜찮다는 20세기의 윤리, 이것은 성서의 신앙에 따르면 반드시 심판받고야 말 사실들이다. 이러한 세계가 어떻게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인권이 보장된 세계라 할 수 있겠는가? 잘못된 오늘의 질서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대로 보존해야겠다는 태도는 불원간 그 질서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말 것이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민총화, 국민총화를 부르짖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조금만 참자고 말하는 당사자들은 우리네 서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몇백만원, 몇천만원짜리 밀수보석을 사들이고 있으니 그들이 어찌 국민을 위하는 지도자라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의 의식 속에 국민의 인권 따위가 의식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더구나 이러한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고 데모 좀 했다고 10년, 20년, 무기, 사형선고를 동네 개이름 부르듯 하던 재판부가 이들에게는 거의 예외없이 집행유예에, 그들에게는 푼돈에 불과할 3, 4백만원의 추징금 정도로 다스리고 있으니 이 나라 백성의 인권에도 큰 인권, 작은 인권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 세계의 식량난이 결코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매년 몇십 퍼센트씩 경제성장이 되어 그야말로 한강변의 기적을 낳았다고 선전해 온 지가 벌써 10년이 넘건마는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제 사람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쌀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뛰어 올라 서민생활을 위협하고 있는가 하면 추운 겨울은 다가오는데 연탄이 없어 심지어 주부들이 데모를 벌이기에 이르렀는데도 이 백성 모두가 밀수보석을 사들이는 무리와 똑같은 인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말한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없애고 누구나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외치던 우리의 동료들을 재판할 때 변호를 잘못했다 하여 10년의 징역에 과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의 하나로서 구금된 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선언하고 있고, 이 선언은 그 전제로서 변호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인정되고 변호권이 침해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아울러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되어야 한다. 법정에서 직무상 행한 변론이 범죄가 되어 변호사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위축된다면 피고인은 변호사에게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던 36년 동안도 그 숱한 독립운동 사건에 관한 변호를 하는 가운데 일본의 통치를 신랄히 비판하고 통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변호사가 구속기소된 사건은 한 건도 없었을 뿐 아니라 외국 어떤 나라에서도, 그 나라가 만약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법질서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법적으로 인권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이제 없게 되었다,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고, 불법으로 영장도 없이 연행해 가고, 기소도 하지 않은 채 100일이고 200일이고 형무소에 가두어 두었다가 내놓는 사례는 오늘날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노무자의 불안, 그들의 비인간화, 농민의 절망, 학생들의 좌절, 가정주부의 초조함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 모두가 실감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가장 경계하는 것은 소위 ‘유신헌법’을 결코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국민의 91%의 지지를 받아 가결된 헌법이니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나머지 9%의 사람들이 계속 반대하여 사회를 소란케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유신헌법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통과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계엄령을 선포하여 놓고 총칼로 위협하고, 모든 매스컴을 총동원하여 좋다는말만 하게 했으며, 그것은 이북과 평화적인 대화를 하며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국민의 권리인 인권, 자유, 평등을 보류시켜 놓고라도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압을 받았던 역사적인 산 증인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냐? 그 과정은 어떻게 되었건 그만둔다 하고라도 제가 만든 법을 제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은 천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법이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불법과 인권 유린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당연히 논란되고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헌법에 대하여 ‘좋소’하는 것만이 허용되고 ‘아니오’ 하는 말을 하는 때 잡혀가지 않을까, 직장에서 파면되지 않을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기업을 하는 분은 기업 도산의 위협을 느낀다면 적어도 이 나라는 인권이 보장된 나라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놓고 우리는 예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보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한 말씀에 귀를 열어 보자는 것이다. 여기 인자라고 번역한 희랍말은 ‘사람’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번역이 논리적으로도 옳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법이란 신성불가침의 가장 존엄한 율법이었다. 그것은 신의 명령과 뜻과 질서를 집약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안식일 지키는 일을 절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그 안식일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안식일법 때문에 굶어죽어가도 그것은 요지부동의 법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때 이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폭탄선언을 지나 혁명적 선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예수는 이 땅 인간세계의 무엇이나 인간을 위해 있을 때 의미가 있고 인간을 억압할 때는 비록 그것이 신의 뜻이라, 질서라 이해되었던 것이라도 철폐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인간을 억압할 절대적인 질서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논리에 의하면 인간이 질서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이 선언을 풀어 보면 예수는 결코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율법의 본래 의미요 의도를 바르게 규명하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은 인간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안식일이 먼저 있었고 그 안식일을 위해 인간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있고 그 인간을 위해 안식일이 제정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 안식일이 인간을 오히려 억압하고 인간의 권리인 인권을 유린하게까지 되고 말았다. 그렇기에 예수는 선언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
이 논리는 사람이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람을 위해 있다,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 사람이 법의 주인이다. 사람이 체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권력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경제질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제도, 권력도, 경제질서도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들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무리다. 이 땅의 무엇도 우리의 인권을 짓밟을 수 없고 또 짓밟아서도 안 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라고 하신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승리하신 선언이다. 우리는 그 선언의 증인들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 하시며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인권을 찾아 산도, 강도, 늪도 가시덤불에 찔리고 찢기며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전위대이다.
이 나라의 인권회복의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과 승리의 확신을 가진 증언의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라고 선언하고 싸우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