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0] 무덤이 있는 신앙 – 1982년 7월 4일, 김상근 목사

무덤이 있는 신앙

1982년 7월 4일 / 로마서 6장 1-10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인사에 ‘여전하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여전하다’, ‘전과 같다’는 것은 좋은 것일 수 없다. 신앙생활에서는 여전이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여전하지 않은 신앙이란 무엇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비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다. 민심이 흉흉하고 소란스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옛날에는 한재란 나라에 큰 잘못이 있을 때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라 여겼다.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땅이 꺼져 지나던 자동차가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군인이 탄 비행기들이 대형 사고를 내고 전원이 폭사를 당한다. 우연이라고 여기기에는 모두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다. 며칠 전 어떤 신문의 만화에 국무총리가 경질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만화의 주인공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실어 놓았다. “이제, 총리도 바꾸었으니 비 좀 내려 주십시오.” 오늘의 한재와 대형 사고, 어음 사기사건에 결정타를 맞은 경제의 일대 위기, 이런 것들을 역사와 신의 심판과 경고의 관련 속에서 해석하는 태도다. 우리는 대단히 심각한 역사적 시점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오늘은 지난 주일 증언에 이어서 다시 세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한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를 역사 속에 세우신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예수의 첫 무리들이 그랬고 초대교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가 세례 받은 특수한 공동체다.

초대교회에 한 궤변이 유행하고 있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의 고마움이 돋보이고 갈증이 심할 때 물을 먹어야 물맛이 좋은 것처럼 죄 속에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을 수 있다는 궤변이다. 왜 이러한 궤변이 나왔을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어쨌든 변화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이나 후나 변화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에 대한 자아 비판과 자기 추궁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변화없는 신앙인이란 있을 수 없으니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자기 비판적 주장이 나오게 되었을 때 “아니, 큰 죄인이 큰 은혜를 입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죄를 더하는 것도 나쁜 것 아니다”라는 궤변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한 말은 죄인이니까 교회에 오지 죄인이 아니라면 올 필요도 없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죄된 생활을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신앙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절대 은총론’을 내세우기도 한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선행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아니냐 하는 반론이다. 이것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바른 논리다.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반론은 그야말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궤변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개인윤리나 도덕에 대하여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윤리생활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든가 부도덕한 것은 아무 문제될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개인윤리를 강조하고 개인을 문제 삼는 그 틈새에서 사회악을 간과해 버린다거나, 도덕을 크게 주장하는 거기서 그 사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 부도덕을 정당화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용할 병균을 배양하는 공장이 있었다. 적국에 퍼트릴 병균을 만들고 보존한다는 것, 전쟁에서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생산한다는 것은 국가의 시책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공장 경비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상사들은 자기 일에 충실할 것, 근무 시간을 지키고 절대로 허술한 경비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충실한 경비, 그것은 개인적 도덕, 윤리에 합당한 처신이다. 그런데 그것을 강조하고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 살인 무기를, 병균을 만들어도 좋은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간과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윤리의 문제보다 어디까지나 역사의 향방, 삶의 방향, 무엇을 지향하여 성실하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자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더 먼저,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입장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근본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에게 개인 윤리, 도덕 문제는 마치 큰 용광로 속에서 자질구레한 온갖 불순물이 제거되어 버리듯이 부수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것이지 개인의 윤리와 도덕은 문제삼을 것이 못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와 진실을 진지하게 관심하는 거기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개인에 집착하여 역사를 잃지 말고 역사를 진지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것, 거기에 개인의 문제는 따르게 되는 법이라는 취지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보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절대 은총론’이나 더 근본적인 물음에 서지도 않고 그저 형식적으로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바울은 ‘세례’라는 한 기점을 찍고 나온다. 너희가 모두 세례를 받았지 않느냐? 세례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한 기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의 죽음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것임을 여러분이 알지 못합니까?’이다.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에의 참여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죄와 대결하고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세례란 예수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함으로 죄와 대결하고 죄를 극복하는 것이다.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는 없다. 누구나 죄의 지배를 받아오고 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자아,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옛 사람”은 없어져야 한다. 죄의 노예가 되는 “옛 사람”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죄에 코가 꿰어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는 옛 자아, 죄가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는 옛 사람은 없어졌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무죄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았다는 뜻이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 속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고 다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죄 속에 그대로 머물러 살 수가 없다. 이젠 죄의 공기를 마시지 않는다. 그 지배를 받지 않는다. 더 이상 죄의 뿌리에 붙어서 자라지 않는 것이다.

이에 관한 바울의 말의 시제는 완전히 과거거나 완료시제다. “우리는 죽었다”(6:2),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6:3), “우리는 묻혔다”(6 4) - 현재완료다. 6절도 현재완료형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이다. 모두가 과거 혹은 현재완료 시제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돌이켜 볼 수 있는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미 끝이 난 사건을 뜻한다. 묻혔던 사건, 못박혔던 사건, 죽었던 사건을 뜻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자에게는 무덤이 있다. 세례는 옛 나를 장례했던 의식이다. 세례를 받고도 무덤이 없다면 그것은 참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 옛 나의 무덤이 있어야 한다. 세례가 하나의 상징만은 아니다. 세례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 전과 그 후가 별로 다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게 못 된다. 당시에는 세례가 침수였다. 물에 몸을 담글 때 그것은 옛 사람, 죄에 지배를 받던 자아가 매장되는 때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힌 것입니다”(4절). “묻힌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도 이같은 “무덤”이 없었다. 돌아다 볼 수 있는 무덤이 없었다. 그리스도인 이전의 옛 자아와 그리스도인 이후의 자아 사이에 차이가 없다. 옛 자아의 무덤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안타까웠다. 네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렇다면 네 무덤이 어디 있느냐? 옛 너를 묻은 무덤이 어디 있느냐를 묻고 있다. 옛 너는 죽었지 않느냐? 그래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세례를 받은 우린데 무덤이 없다! 옛 자아가 그대로 지금의 자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옛 나는 죽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무덤이 없다는 것을 바울은 개탄하고 무덤이 있는 신앙을 촉구하고 있다.

커다란 범행에 가담했던 어떤 사람이 죽게 된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잘못 판별하여 살아 있는 일당 가운데 한 사람의 무덤이 생기고 살아 있는 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서게 되는 한 영화가 있었다. 우연하게 생긴, 살아 있는 자신의 무덤이다. 주인공은 가끔 자기 무덤을 찾아간다. 옛 자기가 죽은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옛 자기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무덤을 찾을 때마다 다짐한다. 경찰의 눈을 피하는 것은 절대로 옛 자아가 살아온 그 같은 생활 반경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그 무덤은 그에게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유혹이 있을 때마다, 새 삶을 다짐할 때마다 그 무덤은 새 삶의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상징적인 의식 정도로 인식한다. 세례를 교인으로서 나이를 먹어가는 한 과정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세례란 죄의 지배를 받던 자아를 장사지내는 의식이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롬 6:3-4).

우리는 침례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머리에 물을 찍어 바르는 것은 옛 자아가 묻혔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머리에 물을 찍어 손을 얹을 때 우리는 이미 매장되어 버린 것이고 거기 무덤 하나가 생기는 순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무덤이 없는 것 아닌가? 10년을 교회에 다니고 세례를 받았어도 무덤이 없다. 옛 사람 그대로가 아닌가? 자기에 사로잡혀 있던 자는 여전히 자기에게 잡혀 있고 육체의 욕정대로 살던 자는 여전히 육체의 욕정을 따라 산다. 시기와 증오의 마음도 그대로다. 아집과 독선도 그대로다.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것도 그대로다. 시와 비를 가늠하는 기준도 그대로다. 가치관도 그대로다. 자기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도 그대로다. 자기비하도 그대로다. 그렇게든 저렇게든 도무지 아무 변화가 없다. 자기 일, 자기 집안일, 자기 것에만 집착하던 자아가 그대로 있다. 정의와 사랑에 무관심하던 자는 10년 교회생활을 해도 여전히 무관심하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해 주고 나만을 축복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주장된다.

나를 돌아보자. 새 것이 된 나인가? 나에게 무덤이 있는가? 장사 지낸 과거, 과거완료로서의 경험이 있는가? 지금 나와 비교되고 대칭되는 옛 인간이 있는가? 신앙은 장식이 아니다. 신앙은 세례다. 세례는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다. 세례는 무덤을 만드는 사건이다.

오늘의 내가 옛 나, 옛 인간과 완연하게 구별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회상 노트] 예수와 하나되는 신앙

바뀌지 않는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구나. 그저 언제나 그렇구나. 내게는 대선배가 되는 어떤 목회자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목회란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을 부으면 몽땅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만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를 지나고 보면 콩나물은 다 자라서 식탁에 오르기에 충분하게 된다. 목회에 조바심은 금물이다.

내가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들려준 말씀이었다. 그 때 벌써 나에게서 조바심 같은 걸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콩나물은 자라지 않느냐? 자랐지 않느냐? 어느새 이 교회에서 10년이나 설교를 하고 목회를 했지만 콩나물처럼 밥상에 오를 만큼 자랐다고 할 수 없다. 조바심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자라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야 한다.

왜 그럴까? 혁명적 사건을 일상적이고 예사스런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례’다. 세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사건이 아닌가!

최근의 어떤 책에 장로고시 면접시험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것을 읽었다. 필자는 피고시자에게 술, 담배를 하느냐고 기습적으로 물었다는 것이다. 단호하게 안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황하는 빛을 띄다가 안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한다. 아마 그도 그날 이후 술, 담배를 끊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술, 담배를 좋다 할 생각도 없고 그것 자체에 대해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그것을 물었다니 안타깝다. 말하자면 금주, 금연을 혁명적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술, 담배류의 금욕을 하고 그런 데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럼으로써 가치관에 혁명을 이루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콩나물 자라듯 하는 신앙은 예수의 죽음에의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닌가! 개인적, 사적 관심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사회의 온갖 불의와 부정의는 제 세상을 만들고 만다.

기독교인의 경건, 기독교인의 자유는 훨씬 깊고 근본적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그리 될 수 있을까? “무덤”, “죽음의 영향권 밖”은 결국 “정의의 도구”이기 위해서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