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20-23] 소명의 자리 – 1982년 5월 25일, 김상근 목사

소명의 자리

1982년 5월 25일 / 누가복음 6장 20-23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

부산의 미국문화원에 불이 났다. 방화였다. 학생들이 일으킨 일이었다. 보수 쪽의 신학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 미국 정부의 기관에 불을 싸지르는 것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기독교인의 방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광주학살이 자행된 지 만 2년이 지났다. 아무런 규명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감옥에 가 있고 병원에서 신음하고 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통해 정권을 잡았고 대통령에 올랐다. 그의 수하들은 고위 권력자들이 되었다.

절대로 가능할 수 없는 불의다. 그 불의의 배경은 미국 정부라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깔려 있었다. 미국의 양해가 있었고 지휘권을 전두환에게 주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학살이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일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미국이 이번에도 학살에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가담한 것이다.

학생들이 미국 기관에 방화한 것을 방화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아무도 감히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 때, 아무도 감히 심판의 철퇴를 내리치지 않는 때, 그래서 자주독립 국가임을 포기하고 마는 때, 피끓는 학생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의거였다.

언론은 가히 가관이었다. 대서특필이라더니 대대서특필을 연일 휘갈기고 있었다. 한 사람이 희생되었던가, 그것을 빌미로 도덕적 공격을, 칼을 날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대의(大義)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소중하다. 그를 소중한 목숨이라 하는 언론을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목숨을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언론이 광주 수백 명 수천 명의 목숨에 대해서 왜 입을 다무는 것인가? 언론의 타락이다. 그것은 언론 자신만의 타락이 아니다.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역사의 대의를 왜곡시키면 국민이 오도당하게 되어 있다. 언론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국도 언론도 반성할 리 없다. 결국은 국민의 깸만이 모든 것을 바르게 잡을 수 있는 것이지. 국민의 깸. 그렇다, 기독교인들의 깸이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오늘의 성직자들의 깸일 것이다. 성직자만이라도 바르게 사고하고 바르게 말하고 설교하고 행동한다면 역사는 분명히 바뀔 것 아닌가!

“소명의 자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교이다. 상대적 가치를 떠나 절대적 가치를 붙들고 씨름하는 성직자들이 있었더라면……


[말씀을 향한 물음]

기독교는 성서적 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우리의 소명의 자리, 교회의 소명의 역할을 항상 묻고 따라야 한다. 기독교의 참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의 소명의 궁극적 목표, 교회의 소명의 자리는 무엇일까?


[설교 전문]

내가 목회에 나선 지 어느새 14년이 되고 있다. 이 14년 동안 나는 “목회가 무엇이냐”를 꾸준하게 물어오고 있다. 이 물음은 내게 대한 소명의 자리가 어디며 교회의 부르심의 현장은 또 무엇이냐 하는 물음과 같다.

본래 종교는 인간의 한계, 약함에 부딪쳤을 때 발생하는 종교심에서 비롯된다. 본질적으로 실존적이라 할까 개인적이고 내면적 성격을 갖는다. 목회에 나가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에 거의 모든 정력을 쏟게 된다. 아름다운 목회다. 또는 신비한 체험, 영적 경험을 추구하여 도인(道人)이 되기도 한다. 이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단계를 지나면 교회를 조직화하여 운영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교인을 늘리고 재산을 증식하고 제직회, 당회를 운영하여 마치 교회를 경영하는 ‘전문 경영자’가 되는 듯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매주일마다 부딪쳐 오는 설교는 자연히 교인의 내적 갈등, 고민을 치유하는 내용이거나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등 성서의 자구를 해석하여 논어나 맹자를 해석해 주는 것과 같은 설교를 하게 된다. 모든 시간과 정력을 교인의 영혼을 돌보는 일과 교회 경영에 쏟게 된다. 이런 것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것이 성서적 기독교의 본질일까? 이런 것이 성서가 명령하는 목회일까? 목회의 본질이며 소명의 현장은 바로 이런 것일까? 기독교는 성서적 종교다.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명상하는 것은 언제나 이 고민 때문이다. 불경을 읽는 것처럼 하나의 경건 의식이나 성서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서의 핵은 무엇이고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 것인가를 새롭게 듣고 그것에 나의 모든 이해를 쳐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목회,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목회자에게 훨씬 더 심각한 유혹이 있다. 목회자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이다. 물론 그 성공은 물량적이고 세속적 권위에 기준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교회가 있기 전에 성서가 있었다. 성서가 있기 전에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씌어진 말씀’에서부터 사고를 시작한다. ‘이미 씌어진 말씀’이라는 것은 자칫 생명력을 잃기 쉽다. ‘말씀’보다 사실은 ‘사건’이 앞서 있었다. 그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씌어진 말씀’이 생명력을 상실치 않으려면 그 ‘씌어진 말씀’을 통하여 ‘사건’을 재생시키는 것이다.

성서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히브리인들의 출애굽 사건이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핵심 기조는 출애굽이며 신약성서의 주요 내용은 예수의 수난사요, 수난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다. 출애굽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두 개의 민족적 전승이 있다. 하나는 자기들의 족장사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전승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자기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물론 요셉 설화가 족장 전승과 출애굽 전승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족장사에는 없었던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이 출애굽기에 가서 갑자기 자주 쓰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히브리’라는 용어는 구약성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지방의 여러 다른 문서에도 자주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란 한 민족의 고유 명칭이 아니다. 한민족, 배달민족, 게르만, 앵글로색슨 등과 다르다. ‘히브리’, 아카드어로 ‘하비루’(habiru)는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가? 이것은 그 지역 “토착민보다 더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무리” 또는 “토지를 갖지 못하여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개념이다. 그들은 고용병이 되거나 약탈자나 도적의 무리를 이루거나 노예로 살았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1장에 나오는 ‘히브리’들도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는 노예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구약성서의 분수령인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눌리고 억압당하고 빼앗기며 평등하게 살 수 없었던 ‘히브리’들을 탈출케하신 것으로서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사회, 경제, 정치적 약자들을 해방하시어 억압과 착취,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가 없는 가나안 공동체를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가나안 공동체의 성격은 출애굽 과정인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내용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소위 ‘율법’이라 불려지는 이 계약은 사회, 경제, 정치적 평등과 자유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요컨대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이집트의 히브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데 그것은 그들의 사회, 경제,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에서 보는 구원의 역사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자. 예수께서 처음 체포되어 유대의 법정에 섰을 때 그의 기소 내용은 하나님 모독이었다. 그러나 정작 로마의 법정으로 이관되었을 때는 어느새 기소 내용이 변조되어 있다. 국가사범이었다. 유대인의 왕을 참칭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왕의 행세를 했다. 나귀를 타고 호산나 환호와 아우성 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것이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네 말대로다”라고 답변하셨다. 예수는 사실 왕을 자처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세상의 왕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 “네 말대로다” 했다 한다. 그러나 빌라도의 물음에 ‘정신적’이라는 단서나 조건이 전혀 없다.

유대 사람은 누군가? 적어도 예수를 결박하여 재판하고 또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로마화한 유대인을 두고 빌라도가 저들의 왕이냐고 물은 것은 아니다. 호산나를 외치고 옷을 벗어 깔며 나귀를 앞장서 끌고 들어섰던 사람들, 민중들이요 갈릴리 유대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리라. ‘어부, 죄인, 창녀, 병자, 날품팔이 저들의 왕이냐’라는 질문이었고 예수는 그들의 왕이라고 답변하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관심의 일차적 대상이었다. 예수의 청중은 바로 그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었다.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은 그날 그날의 끼니 때문에 고생하는 극빈자들이 가르침의 대상이었음을 분명히 해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지금 배부른 사람을 대조시킨다. 경제적 개념이다.

그러나 “슬피 우는 사람”은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억울하여 우는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강자에게 유린당한 억울한 처지에 있는 계층을 반영한다. 마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록에서 “옥에 갇힌 자”에 대하여도 일체감을 가지라 한다(마 25:31-46). 주기도문에서도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하오니”라고 가르쳤다. 정치적, 사회적 피억압자의 기도임이 분명하다. 권세자와 지배자의 기도는 아니다.

예수는 이들을 무조건 영접하고 사랑했다. 그들의 밀집지역이 갈릴리였고 예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저들과 더불어 살고 저들의 편이 되었다. 부활하신 후조차 마가에 따르면 갈릴리로 다시 가신다. 그는 사회, 경제, 정치적 약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막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율법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받을 어떤 비판도, 고난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사건도 사회, 경제,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보는 구원의 역사다.

목회란 무엇이냐? 목사가 되어 목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논어, 맹자나 옛 성현의 말을 풀이하는 선생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개인의 영혼을 붙잡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도인이나 수도사가 아니다. 물론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일이나 교회의 경영이라는 것을 던져 버리자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신비한 경험, 체험, 이것이 기독교의 목적이요 목회의 궁극적 목표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 현실 가운데서 ‘히브리’, 가난하고 억압당하고 병든 민중을 떠나 내 교인을 영적으로 돌보고 교회를 경영하는 데 전력을 쏟는다 한다면 성서적 목회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내 교회, 내 교인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 일과 사회, 경제, 정치적 목회가 연관을 갖고 연결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당장 우리가 던져져 있는 죄의 현실이다. 죄에 대한 이해, 구속사에 대한 이해가 민족의 현실, 민족사와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과 단절된 종교적 경험이나 체험, 혹은 “교인”만에 대한 관심, 교회의 경영이란 무익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복음의 핵심에 선 것은 아니다. 복음의 핵심에 선 목회가 비록 경쟁 가치관이나 성공 논리에 있어서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구속 사건에 부름받은 한 여기에 서려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목사가 되기를 준비하는 여러분에게 복음의 핵심에 설 수 있는 신학적이고 신앙적 훈련을 쌓아달라 부탁하고 싶다. 성공을 기대하기 전에 성서적 사건 앞에 정직히 설 것을 다짐해야 한다. 평안하고 호화스런 생활을 상상하기 전에 자신의 뼈를 깎는 아픔과 자신, 교회의 통속적 요구와의 고투를 다짐해야 한다. 복음의 핵심에 서는 목회를 위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그래야 한다. 이것이 경건이다. 언제나 반복하여 물을 것은 성서의 핵심은 무엇인가이다. 그것을 향하여 나는, 우리는 어떤 노력을 쏟고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