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의 소리와 양심의 소리
1982년 5월 2일 / 마가복음 15장 6-15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예수께서 잡히시고 처형되시기까지의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더구나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그분이 부활하시어 오히려 진리의 본체가 되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기독교의 절기로 말한다면 지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땅 위에 살고 있는 제자들과 자기의 추종자들의 믿음, 부활의 믿음을 든든하게 해주셨던 절기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주님의 삶과 죽으심, 부활의 의미를 새기고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세속권력의 판결에서 조작된 여론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는 극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예수의 반대자들이 한 첫 일은 여론의 조작이었다. 거짓 증언자들을 수없이 등장시켰다. 마가복음 14장 56절에는 “많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했으나”라고 되어 있다. 거짓 증언은 군중들을 선동하고 그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며 급기야는 광란에까지 이끌어 간다.
그들 중의 더러는 예수께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린 후에 주먹으로 치면서 ‘자, 그대를 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 맞추러 보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리고 하졸들은 예수를 손바닥으로 쳤습니다(65절).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 대단히 격노한 군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군중들은 정당한 정보에 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거짓 증언자들이 문제였고 또 거짓 증언자들을 사주한 권력자들이 군중을 그렇게 오도해 나갔다.
둘째로, 그들은 사대주의적이고 외세 의존적이고 아부스런 처사를 감행했다. 예수를 심문했던 유대의 자치법정은 그를 종교사범이 아니라 소위 국사범으로 몰아댔다.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그래서 종교사범은 자기들이 처리할 수 있었으나 국가의 문제에 관련되는 국사범은 자기들의 자치법정에서 처리할 수 없었고 로마의 법정으로 이관을 시켜야 했다. 예수께서 처음 구속 기소되셨을 때는 하나님 모독죄였다. 이것은 종교문제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예수의 죄를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로마 법정, 빌라도의 법정에 기소된 예수의 죄는 어느새 그가 왕을 참칭했다는 것으로 날조되고 있었다. 반로마 죄다. 빌라도의 심문은 “네가 너희들의 신을 모독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다. “너는 그러면 반로마주의자이냐”라는 심문이었다.
그들은 왜 예수를 반로마주의자로 고발했던가? 로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예수와 같은 인물을 제거하는 데 로마의 힘을 빌리고자 했을 뿐이다. 적어도 당시에 꼼짝할 수 없는 죄는 ‘반로마’라는 것이었다. 반로마를 했다면 혹시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라도 내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이의도 제기되지 못하게 하고 제거하는 방법은 예수를 반로마주의자로 모는 것이었다. 그래서 권세자들은 유대인으로서 부끄럽게도 사대주의적이고 외세 의존적이고 아부스런 처사였으나 로마에게 예수를 처형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셋째로, 예수의 반대자들이 한 일은 선동이다. 명절 때마다 여론에 따라 특별 석방조치를 내리는 단계가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의 사건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를 놓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대제사장들은 관제 여론을 만들어 군중을 선동했다. 11절의 “그러나”는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시킬 의사가 있었으나라는 의미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예수보다는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라고 했습니다.” 군중들은 빌라도 앞에 나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습니다”(13절). 빌라도가 반문한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소?”(14절). 군중들의 여론은 들끓었다. “사람들은 더욱 더 큰 소리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관제 여론, 오도하는 언론, 선동적 언론이 얼마나 악마적인 것인가를 확연하게 본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 국사범으로 만들 수 있었고 또 만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조차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이나 모든 세대에 커다란 계시를 준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일을 놓고 볼 때에 언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란 스스로 성숙해야 한다. 언론은 끝까지 양심의 소리여야 한다. 언론을 울리면 거기에는 반드시 밝고 맑은 양심의 소리가 나와야 한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런 초라한 꼴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만약 언론이 권력의 통제 아래 있게 되고 권력의 시녀가 되면, 민중의 소리는 병든 소리가 되며 악마의 소리가 되는 법이다. 군중은 스스로 조사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정보원에 스스로 접근할 기회도 없다. 다만 공적으로 대권을 위임받고 있는 언론기관에서 나누어주는 정보에 의하여 판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군중의 여론이 양심적 여론이냐 하는 것은 그 여론 형성의 근거가 바른 것이냐, 올바른 언론, 정론에 근거한 것이냐를 보아야 한다.
예수의 처형 여론의 근거는 조작이고 사대주의적 아첨이고 선동이었다. 그 군중의 여론을 어느 누구도 정당하다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언론을 조작하는 것은 역사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일이며 조작당할 수밖에 없는 언론은 진리를 죽이는 악마의 무기다. 언론은 도구다. 선하게 쓰는 경우 선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악하게 쓰는 경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다.
우리 나라 언론은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최기식 신부 때도 그랬지만 한국기독교사회 선교협의회(사선) 성명서가 발표되자 신문, 방송, TV가 일제히 대서특필하였다. 물론 그것도 교회의 소리를 단 한 줄도 내주지 않던 이제까지의 태도를 급격히 바꾼 것이다. 하여튼 사선(社宣)의 보도를 통해 언론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신문, 방송, TV에 마의(馬意), 우의(牛意)가 등장하였다.
자유당 말기, 공화당 말기에 그러더니 이 제5공은 지금이 초기인데, 1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옛날 낯익었던 그 얼굴들이 다시 나와 ‘사선’은 반미라고 우겨 댔다.
요새 시중에 가면 “사선 덕에 아무개 출세했어!”라든지 “스타가 되었어!”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아이들이 만든 은어에도 ‘스타’라는 말이 있다. 그 은어에 의하면 스타란 스스로 타락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타”, “스타가 온다” 하면 인기 배우 혹은 인기 있는 사람이 온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얼굴이 병든 언론 덕분에 TV에 척 나오니까 스타가 되었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과연 이번 사건에서 언론이 ‘스타’를 많이도 만들어 냈다.
거기에 나와서 말하는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거론할 필요는 없다. 소위 목사라는 사람들이 나라가 없어지면 종교고 신앙이고 있을 수 없는데 ‘지금 반미하여 미국이 나가면 우리는 신앙을 못하게 된다’고 야단들이다. 교회의 한 단체가 ‘대사나 사령관, 정신차리라’고 했다고 미국이 나갈 리도 없지 않은가? 참 스타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나? 미(美)가 신앙의 보루인가? 하나님이 보루인가? 나라가 없으면 종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종교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성직자로서 왜 하지 못하는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다.
어느 시대나 언론이 조작극을 획책할 때는 그 시대의 종말이 왔었다. 여론을 조작하고 관제 여론을 만들어 민중을 오도해 갈 때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죽이고야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시대나 들쥐들이 성하면 그 시대는 망해가는 시대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으나, 반로마를 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겨야지, 로마에 이르고 고자질하여 자기 충성을 과시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고야 말았지 않은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한다면 그런 사대주의적 아첨이 나라까지 망하게 한다는 말인 것이다. 구한말에 그랬지 않나? 청나라 아니면, 일본 아니면, 러시아 아니면 우리는 살 길이 없다고 툭하면 거기에 일러 바치고 아부하다가 나라가 어떻게 되었던가? 사대주의적 아첨이 극하는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시대요 이미 망해 가고 있는 시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각 없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철없이 외쳐대는 스타들이 많아지면 이미 문제가 깊숙하게 생긴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병든 언론에 제 얼굴 내놓고 무슨 큰 일이나 하는 양 질러댄 그 소리가 곧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교 교인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오늘과 같은 현실 속에서 조작 여론에 현혹되지 않고 사대주의적 아첨의식을 떨쳐버리는 일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진리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꼬이는 선동의 소리를 분별해 내야 한다. 이런데 휩쓸리지 않는 “양심의 소리” 층이 두터워져야 진리가 살아날 수 있다. 그 양심의 소리가 크게 울려지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반드시 그 층만은 두터워야 한다. 여러분의 양심의 소리가 겹겹이 포개져서 이 땅에서 절대적 가치를 보존시켜 나가야 한다. 여러분은 이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막아서는 것이다.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회상 노트]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
부산의 미국문화원에 불이 났다. 방화였다. 학생들이 일으킨 일이었다. 보수 쪽의 신학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 미국 정부의 기관에 불을 싸지르는 것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기독교인의 방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광주학살이 자행된 지 만 2년이 지났다. 아무런 규명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감옥에 가 있고 병원에서 신음하고 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통해 정권을 잡았고 대통령에 올랐다. 그의 수하들은 고위 권력자들이 되었다.
절대로 가능할 수 없는 불의다. 그 불의의 배경은 미국 정부라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깔려 있었다. 미국의 양해가 있었고 지휘권을 전두환에게 주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학살이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일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미국이 이번에도 학살에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가담한 것이다.
학생들이 미국 기관에 방화한 것을 방화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아무도 감히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 때, 아무도 감히 심판의 철퇴를 내리치지 않는 때, 그래서 자주독립 국가임을 포기하고 마는 때, 피끓는 학생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의거였다.
언론은 가히 가관이었다. 대서특필이라더니 대대서특필을 연일 휘갈기고 있었다. 한 사람이 희생되었던가, 그것을 빌미로 도덕적 공격을, 칼을 날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대의(大義)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소중하다. 그를 소중한 목숨이라 하는 언론을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목숨을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언론이 광주 수백 명 수천 명의 목숨에 대해서 왜 입을 다무는 것인가? 언론의 타락이다. 그것은 언론 자신만의 타락이 아니다.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역사의 대의를 왜곡시키면 국민이 오도당하게 되어 있다. 언론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국도 언론도 반성할 리 없다. 결국은 국민의 깸만이 모든 것을 바르게 잡을 수 있는 것이지. 국민의 깸. 그렇다, 기독교인들의 깸이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오늘의 성직자들의 깸일 것이다. 성직자만이라도 바르게 사고하고 바르게 말하고 설교하고 행동한다면 역사는 분명히 바뀔 것 아닌가!
“소명의 자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교이다. 상대적 가치를 떠나 절대적 가치를 붙들고 씨름하는 성직자들이 있었더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