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7:8-16] 본적 조회 – 1982년 4월 25일, 김상근 목사

본적 조회

1982년 4월 25일 / 호세아 7장 8-16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최근 우리의 판단과 가치관이 크게 혼들리고 또 오도당하고 있다. 우리는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이런 때일수록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같은 때에도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 그 빛은 무엇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금 봄 대심방을 거의 끝내가고 있다. 가정을 굽어다 보면 물론 평안한 집도 있지만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는 가정들도 있다. 이런 가정들을 생각하면 교회가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위로와 격려가 되며 믿음에 서도록 해줄 수 있을까 하는 큰 숙제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증언도 역시 여러 가지 생각과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최근 소위 교회와 국가의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게 도전해 오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이에 대하여 증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특별히 오늘은 외국과의 국제 관계에 교회가 왜 간여하는 것이며 최근 일고 있는 ‘반미’의 파도를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증언을 드리겠다. 얼마 전 천주교 최기식 신부가 소위 범인 은닉죄로 구속되었는데 광주사태와 미 문화원 방화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사실 이 일에 대하여는 좀 잠잠해진 후 성서에 비추어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지난 주간에 또 한바탕 온 나라가 뒤집히는 것 같은 소용돌이가 일어났기 때문에 불가불 오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부시 미 부통령이 방한하기도 한다. 과거 미 대통령이 오면 그 환영이란 참으로 최고의 환영이 되었다. 카터도 당황할 정도였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나라라 들었는데 정말로 그렇다고 감탄할 정도다. 그만큼 친미라기보다 미국에 대하여 절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 제시될 여지가 너무나 좁은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미쳐버린 언론이라고 본다. 언론이 미쳐서 날뛰는 바람에 온갖 일들이 침소봉대되고 있고 국민은 완전하게 오도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니 그와 싸우느라 그런 대로 애도 쓰고 잡혀 다니기도 했다.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무언가 진실을 보도해 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하에 소위 언론 통폐합이 강행되고 난 후 우리의 언론은 스스로 앞장서서 정부의 식성에 맞추느라 별별 추태를 다 보이고 있다. 요사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은어들을 아이들이 말하는데 ‘스타’라는 은어가 있다. 물론 스타(star)라 하면 인기인이나 특히 인기 연예인을 말한다. ‘야, 스타가 오시는구나!’라 하면 퍽 좋은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은어 ‘스타’는 ‘스스로 타락한……’의 뜻이라고 한다. 요사이 언론은 ‘스타 언론’이다.

최근 가장 큰 쟁점은 소위 ‘반미’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도 그것이 미국 문화원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또 거기서 사람이 한 사람 죽었는데 방화에 의한 치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큰 문제이나 이 사회가 정말 인명을 그렇게 중시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저동 지하철 사고는 더 많은 인명을 희생하였다. 광주사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고 책임져야 한다는 여론도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것보다 그 행위가 반미 행위라는 것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한국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성명서도 ‘반미 성명서’라 하여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수없이 많은 선언서가 발표되었으나 이번처럼 대대적으로 취급받아 보기는 처음이다. 미 대사가 했다는 말이나 미 8군 사령관이 했다는 말, 그것을 본인들은 소극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그런 말들이 학생들을 얼마나 자극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이 아니라면 허위 보도를 한 세계의 모든 신문을 상대로 정정기사 요구를 했어야 한다.

하여간 무슨 들쥐 같은 국민이라느니 버릇없는 놈들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되었으니 참으로 서글프다. 어쩌다가 우리가 들쥐처럼 보이게 되었으며 제 나라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보겠다고 감옥을 불사하는 사람들이 버릇없는 애새끼들로 보여졌는지 분노보다 슬픔이 앞선다. 이런 말이 외신으로 보도되었을 때 그것을 읽은 모든 사람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미간의 우호를 해치는 외교 실무자나 군 지휘관을 바꾸라고 요청한 것임에도 그것을 미 정부는 가만히 있는데 제 나라 정부가, 또 제 나라 언론이 반미라고 확대 해석하여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서글프다. 며칠 전 강원대학에서 미국 국기를 불태운 사건이 생겼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말하자면 이 같은 불행을 막아 보자는 것이 한국기독교사회 선교협의회 성명서의 의도였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느 나라의 속국이 아닌 바에야 대사를 바꾸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런데 오늘 이 같은 와중 속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미국은 천사의 나라며, 우리 나라 정부는 정권욕에 불타 있을 수 있지만 미국만은 순수한 혈맹이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최근의 말은 하지 않겠다. 반미라고 잡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원래 국제 관계란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면서 속으로는 제 나라 이익을 철저히 찾는 것이다. 제 형제를 도와주는 것도 아까운 법인데 하물며 남의 나라를 돕는다고 할 때 돕는 것 이상 아무 다른 의도가 없다 한다면 거짓말이고, 또 도움을 받는 나라가 도움을 주는 나라에 대하여 자기 나라에는 아무 이익도 없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팔푼이다.

마침 올해가 한미 수교 100주년이다.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맺은 지 100년이 된 것이다. 미국과 국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에게 이익이 된 것이 많다. 무엇보다 국교를 맺은 지 2년 후에 미국의 알랜이 선교사로서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도한 것은 가장 큰 결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우리가 덕을 입은 일이 많다. 해방 후의 원조며 6ㆍ25 때의 도움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모든 것은 미국의 국가 이익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순결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또 필요에 따라서는 미국이 우리를 배신한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와 미국의 수교는 청나라가 주선했는데 청으로서는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일본의 독점적인 진출과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보자는 속셈이 있었다. 또 미국은 왜 그렇게도 우리와 수교코자 했던가? 선교사로 왔던 알랜이 조정의 신임을 받자 미국은 그를 조선 공사로 임명했고 급기야 운산 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 전화시설, 전차시설, 상수도시설 등 대규모 이권을 얻어내 갔었다. 그들은 42년간 운산 금광을 캐 먹었다. 1902년 1년간 순이익이 90만원이었는데 조선 왕실에 상납한 액수는 2,500원에 불과했다. 1897년부터 1915년까지, 18년간의 운산 금광 생산고가 4,900만원이었다. 당시의 외채가 국민들이 상환운동을 벌였을 만큼 심각했었는데 그것이 4,500원이었다. 우리가 심각하다고 여겼던 외채의 10만 배를 18년 동안 벌어갔었다. 10만분지 1이 없어서 우리는 곤경에 빠졌는데 우리 빚의 10만 배를 가져갔다. 또 경인철도 부설권은 알랜이 따내서는 일본에 팔아 먹었다.

나는 여기서 미국을 부도덕하다고 욕하는 것이 아니다. 국제 관계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며, 그런 것인데도 미국만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적선을 하는 나라라고 믿어야 한다는 강요가 문제라는 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가 36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도 미ㆍ일간의 국제 홍정에 의한 것이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한반도에 밀어닥치자 영국과 미국은 한반도 지배를 일본에 용인하여 줌으로써 러시아를 막고자 했다. 1905년 7월 29일 “태프트一가쯔라 비밀협약”에서 일본은 필리핀을 미국에 넘기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다. 더구나 포츠머스 조약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질 것을 승인하며,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지도보호 및 감리의 조처를 취할 것을 인정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공동범죄를 범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미국의 국익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국제 관계가 우리의 젖줄이며 미국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생각을 버리고 대등한 관계에서 우리가 열을 주면 우리도 열을 얻어내는 주권행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식했을 때는 모르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 미국 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제 관계가 이러한 이해 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미국을 비판만 해도 반미라 하고 반미는 곧 북한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안보논리로 밀어 붙인다면 앞으로 커다란 문제와 혼란이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정부를 비판할 권리가 있고 또 당연히 우리에 대한 다른 나라의 태도와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반미하여 미군을 철수시키라는 주장이 아니라 대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이를 위하여 미국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라를 위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모두 더 나은 나라에서 살기 위해 필요하다면 비폭력적인 대미 비판, 대일 비판을 해야 한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다. 당시 이스라엘은 일만 생기면 외국에 도움을 청하였고 외국 때문에 생존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것을 크게 비판했다.

“이 민족 저 민족에게 빌붙는 에브라임(에브라임은 북왕국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 외세가 제 힘을 먹어 치우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그 역시 모르는구나 …… 이집트로 가고 아시리아로 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 대신들은 제 멋대로 혀를 놀리다가 칼에 맞아 죽기나 하고 이집트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호 7:8-16).

말하자면 친이집트, 혹은 아시리아만 꼭 붙잡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도 너는 반이집트, 반아시리아라 하여 연행되고 체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집트 없이 우리가 살 수 있느냐, 아시리아 없이 우리가 안보할 수 있느냐 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도 왕들의 이해관계이지 그것이 제 나라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월남 패망을 곧잘 말하지만 월남이 미국을 믿지 않아서 망했던가? 미국이 월남을 돕지 않아서 망했던가? 제 나라라면 그렇게 쉽게 손을 털고 철수해 버릴 수 있었겠는가? 외국이 제 나라의 보장이 될 수 없다는 산 증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야훼가 저희 하나님이건만 저들은 나를 찾아 돌아오지 않으리라”(7:10)

“빗나간 화살처럼 나에게로 돌아 올 생각도 하지 않는구나”(7:16).

어떻게 해야 하느냐? 외세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야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야훼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진실을 찾고 정의를 찾는 것을 말한다. 평등에 서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 국민이 합일하고 일치하게 될 것이고 나라를 지키는 진정한 힘은 바로 이 국민의 합일과 일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구한 말 친일파, 친로파, 친청파라 하며 제 각각 다른 나라를 등에 업고 정권을 쥐어 보겠다고 아우성을 쳤던 저 못난 지도자들을 보았다. 그 결과는 나라의 홍왕이 아니라 패망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역사적 경험도 이러한데, 그래도 교회가 바른 말을 할 수 있는데, 교회는 제 나라 장래에 아무 관계를 하지 말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나라가 망하면 종교도 없다. 그러나 가만 있으라는 말은 간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는 방식으로 간여하라는 말이다. 간여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비판을 반대로 몰아붙이고 비판은 용공이라 하는 종교인들 - 그들은 친미다. 그들은 왜 종교인이 정치에 간여하느냐고 한다. 친미는 정치 간여가 아니고 반미만 정치 간여인가? 대대로 거짓 예언자들이다.

우리의 본적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 교회는 ‘이집트인이 아니다, 아시리아인이 아니다’라고 외친 호세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교회는 오늘의 호세아가 되어야 한다.


[회상 노트]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

부산의 미국문화원에 불이 났다. 방화였다. 학생들이 일으킨 일이었다. 보수 쪽의 신학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 미국 정부의 기관에 불을 싸지르는 것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기독교인의 방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광주학살이 자행된 지 만 2년이 지났다. 아무런 규명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감옥에 가 있고 병원에서 신음하고 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통해 정권을 잡았고 대통령에 올랐다. 그의 수하들은 고위 권력자들이 되었다.

절대로 가능할 수 없는 불의다. 그 불의의 배경은 미국 정부라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깔려 있었다. 미국의 양해가 있었고 지휘권을 전두환에게 주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학살이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일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미국이 이번에도 학살에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가담한 것이다.

학생들이 미국 기관에 방화한 것을 방화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아무도 감히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 때, 아무도 감히 심판의 철퇴를 내리치지 않는 때, 그래서 자주독립 국가임을 포기하고 마는 때, 피끓는 학생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의거였다.

언론은 가히 가관이었다. 대서특필이라더니 대대서특필을 연일 휘갈기고 있었다. 한 사람이 희생되었던가, 그것을 빌미로 도덕적 공격을, 칼을 날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대의(大義)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소중하다. 그를 소중한 목숨이라 하는 언론을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목숨을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언론이 광주 수백 명 수천 명의 목숨에 대해서 왜 입을 다무는 것인가? 언론의 타락이다. 그것은 언론 자신만의 타락이 아니다.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역사의 대의를 왜곡시키면 국민이 오도당하게 되어 있다. 언론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국도 언론도 반성할 리 없다. 결국은 국민의 깸만이 모든 것을 바르게 잡을 수 있는 것이지. 국민의 깸. 그렇다, 기독교인들의 깸이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오늘의 성직자들의 깸일 것이다. 성직자만이라도 바르게 사고하고 바르게 말하고 설교하고 행동한다면 역사는 분명히 바뀔 것 아닌가!

“소명의 자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교이다. 상대적 가치를 떠나 절대적 가치를 붙들고 씨름하는 성직자들이 있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