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7-13] 닫을 수 없는 문 – 1982년 1월 17일, 김상근 목사

닫을 수 없는 문

1982년 1월 17일 / 요한계시록 3장 7-13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여러분은 바른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고달픈 길임을 알고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닦으신 길이요 하나님이 여신 문이다. 용기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이 여신 문으로 가기 위하여 오늘 주시는 말씀을 경청하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요한계시록’은 가장 난해한 성서 중의 하나다. 묵시적이요 암시적이며 상징적인 용어로 가득 차 있어 해득이 전문가에게도 힘든 이 성서는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물론 일곱 교회에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저자는 그곳 일곱 교회에 보내면 전체 교회에 퍼지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보낸 것이다. 1세기말 아시아 교회에 대한 심한 핍박과 시련과 유혹으로 교회들이 위급하게 되었고 심지어 존망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에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소망을 밝힘과 동시에 오히려 최후의 승리를 눈앞에 보면서 죽음과 대결하는 용감한 신도가 되게 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다. 또한 이 편지는 일정한 신학적인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고난 가운데서라도 반드시 가야 할 사명과 소망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증언의 본문으로 택한 3장 7절 이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대상으로 한 부분이다.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는 영원히 닫히지 않을 문이 열려 있다. 비록 약한 힘밖에 없는 교회지만 하나님께 충실했기 때문이다. 네가 유대인 회당으로부터 여러 가지 핍박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음부터의 신앙에 굳게 서서 네게 주기로 되어 있는 면류관을 뺏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너는 작은 힘을 가졌으나”(8절).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힘밖에 갖지 못한 교회다. “작은 힘”이라는 것은 도덕적 능력이나 정신적인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교인의 수가 적다는 것이고 그나마도 사회적 지위나 부, 영향력에 있어서 그 힘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외형으로 보아 작고 약한 교회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행하는 일을 안다.” 그 작은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가 행한 일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말이다. 행한 일이란? “내 말을 지켰으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10절에 가보면 “내 말”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 새번역 성서는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라 했고 공동번역 성서도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견뎠다”라고 번역했다. 이 같은 해석은 “나의”가 인내와 말씀에 다 걸리는 입장을 취한 것이나 학자에 따라서는 “나의”가 “인내”에 걸린다. 그리스도 자신의 인내와 같은 인내의 분부에 충실했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온갖 고난을 인내하며 가야 할 길을 가신 것을 말한다.

핍박과 시련 가운데 있는 이들을 격려하는 편지임을 전제한다면, 이 성서가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그들에게 ‘참고 견뎌라’ 라고 강요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느냐? 너희가 받는 어려움은 그리스도가 받은 어려움이요 그것을 그리스도도 참고 견뎠으니 너희도 인내하라. 그러면 그리스도를 지키신 하나님께서 너희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도 너를 보호해 주겠다”(10절) - 이 말씀은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갖은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보이신 말씀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시대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문답을 하는 자리에서 장로님 한 분이 “공산당이 와서 네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 죽이겠고 예수를 믿지 않겠다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와 같은 극한적이고 한계가 분명한 자리에서는 예수를 믿겠다고 결연한 말을 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이미 아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 박해를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인이라는 것이 나의 신분상 보탬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씀은 박해시대에만 해당되었던 것일까?

오늘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세기에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이 당한 고난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가치관 때문이다. 신앙을 고백하기가 정작 어려운 때는 무엇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고 무엇이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 모호한 때이다. 신앙고백이 생활로 표현되어야 하는 경우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갈 수밖에 없는 형편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는 때다. 지금 세상은 물질주의, 황금만능의 시대가 되어 있고 누구나 이것을 개탄한다. 그러나 좋은 장식을 보면 무턱대고 갖고 싶다. 잘 꾸며진 집에 가게 되면 우리집도 잘 꾸며 놓고 살고 싶어진다. 그렇게 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 사람값, 사회적 신분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기 일쑤다.

앞서 1960년대까지 우리의 신앙이 내세적이었다는 말씀을 드렸다. 지금은 그러나 내세적 성격은 거의 완전하게 없어졌다. 차라리 물질화했고 현세적이 되었다. 이해타산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이익이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어서 돈을 벌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해야한다. 그것이 신앙의 내용이 되어버렸다. 1960년대 이후에 불어닥친 경제제일주의, 물량주의에 홀린 것이다. 우리의 고뇌는 이러한 가치관에서 벗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인내 - 그가 지금 이 땅에서 다시 인내하신다면 무엇일까? 사람값, 사는 목적과 만족하는 척도를 물질에 두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것, 삶의 내용으로 자신을 재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세속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금 여기서 당하면서 인내하는 것이다. 갖가지 악조건에서도, 즉 미워할 수밖에 없는 때임에도 사랑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임에도 희망을 갖고, 나를 줄 수 없는 풍토 속에서 나를 주는 이 같은 삶이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다. 재물을 구하고 지위와 신분을 높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것, 더 귀하고 우리가 마땅히 주구해야 할 가치를 주구하는 것 -그것이 오늘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인내하는 것이다.

11절은 이 삶을 끝까지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이다. 이것은 경쟁적 언어가 아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거룩한 소임, 특권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거룩한 소임, 특권을 버리지 않고 사는 자에게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하나님께서 그 앞에 열어 놓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자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받치는 거룩한 자리에 서게 하겠다는 것이다. 면류관은 최후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관이다.

우리는 사탄의 현실, 즉 물질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안일무사하고, 나를 다치지 않는 범위 밖의 일이라면 악이건 선이건 상관할 것 없다는 사탄의 현실 가운데 살고 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단독화, 계충간에,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생기고 있는 극도로 양극화된 이 사탄의 현실 가운데 살고 있다. 진실과 비리, 사랑과 폭력, 정의와 고문통치가 뒤범벅이 되어버린 사탄의 현실에 살고 있다. 신앙조차 교회조차도 물질화, 물량화, 이기화해 가는 사탄의 현실에 살고 있다.

이 같은 처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주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문제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부딪치면서 그 문제를 통하여 사회와 민족사의 문제에로 접근하는 신앙을 갖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사사로운 것이라 일축해서도 안 되며, 개인적인 것이니 기독교와는 관계없는 것이라 해서도 안 된다. 사사롭고 개인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할 때 비로소 그것을 통하여 사회와 민족의 문제에도 솔직하고 현실적인 접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와 민족의 문제를 파악하게 되는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성인 신앙, 어른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추진하는 동기와 힘, 바탕 - 이런 것들이 철저하게 신앙적이어야 하겠다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신앙 없는 사회운동을 지향해서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힘도 없으려니와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자세도 아니다. 우리는 이 같은 신앙의 방향성을 꾸준하게 물어왔다.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진지하게 물어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힘을 가진 교회이지만 그러나 방향만큼은 바르게 잡아왔다고 자부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힘을 가졌으나 바른 길을 걸었고, 하나님은 그 교회 앞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열어 놓으셨다. 우리 교회도 적은 힘을 가진 교회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같은 방향을 잡아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닫을 수 없는 문,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길이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신앙의 고된 길을 택했다. 편하고 자기 만족적인 신앙의 길이 아니라 갈등하며 씨름해야 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 길은 그리스도의 길이다. 인내로 가야 할 길일 뿐이다. 특히 오늘 올해 제직으로 임명된 분, 교사나 성가대, 부원 등으로 임명된 분들은 우리가 기왕에 택한 길을 함께 걸어가기로 결단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그 길, 그 문은 주님의 길이요 주님의 문이다. 우리가 가자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닦으신 길이요 결코 사람은 닫을 수 없는 문이다. 우리가 합심하여 이 길을 걷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이 문을 들어가자.

나는 목회지침 끝에 한 말을 오늘 증언의 끝말로 삼고자 한다.

“우리 한국 교회의 고질은 축복받기 위해 믿는 기복신앙이요 저만 아는 이기적 신앙이요 무조건 복종케 하는 맹목적 신앙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다시 그 일을 반복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이러한 은혜롭지 못한 신앙의 동기를 극복한 교회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국 교회 진로를 위한 시험대 위에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성패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며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사의 문제입니다. 나 한 사람의 신앙이 한국 교회와 민족사에 연결되어 있다는 부르심의 자리를 숙연하게 감당해 나갑시다.”


[회상 노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 때, 개선될 가능성이 예견되지 않는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982년 새해 첫 설교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아직도 여전히 캄캄한 밤인데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공허한 축복소리만을 전할 수는 없다.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힘 안 드는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이다! 믿음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교하고자 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자 했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고자 하고 사랑한다면 믿음 가운데 있는 것이리라.

당신들은 고달파졌지만 행동해 왔고 또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다. 우리의 성정(性情)으로 어떻게 소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일반화된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어떻게 거슬러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과연 그것이 힘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 힘으로 살았다. 그 힘으로 버텼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존재의 근거였다. 그것을 떠나 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사랑이다! 실천이다! 행동이다! 그랬길래 잡혀 다니면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어 제낀 문, 그 문은 닫을 수 없는 문이다. 닫아서는 안 된다. 이 해도 가던 길을 가자. 수도교회 교인들도 나와 같은 믿음에 서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