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위하여
출애굽기 3장 7-10절 ; 마태복음 28장 16-20절 / 1983년 9월 4일 / 수도교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의 신앙의 계기는 어차피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행을 당한 사람이 그 불행을 극복하고자 하여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가정의 갈등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개인적 동기가 되고 있다. 종교는 그런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민족의 과제를 기독교는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기독교는 그 출발이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아우른다. 구약성서 종교의 출발은 사실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이다. 여기에 어떤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봉독한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하나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 저들의 고생과 억압당함과 울부짖음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라는 것이 개인을 떠나 있지 않다 개인들이 당하고 있는 공통된 상황이 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인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은 그 어떤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부의 문제 때문이다. 야훼라는 신은 여기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오늘 봉독한 구약성서는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예언서를 여러분이 주의 깊게 읽는다면 예언자의 관심 역시 ‘이스라엘 민족’에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예수에게 이 관심은 더 짙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분부를 하셨을 때 ‘나가서 제자로 삼고 세례도 주고 내가 명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대상은 ‘민족’이다(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는 개인에게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된 관심은 ‘민족’이었다는 말이다. ‘민족’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공동체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 ‘민족’은 고생하고 억압당하고 억울하게 죽고 울부짖음에 차 있는 민족이다. 예수의 ‘민족’도 이집트에서의 경우처럼 그랬다.
예수도 이러한 자신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입장에 철저했던 흔적이 있다. 어떤 여인이 자기 딸을 낫게 해 달라고 좇아 왔다. 그 여인을 마태는 가나안 여인(15:21 이하)이라고 했고, 마가는 헬라인(막 7:24 이하)이라 했다. 이스라엘인이 아니었다. 그 여인에 대하여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 15:24-27)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예수가 얼마큼 자신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나는 금번 증언을 통해 여러분과 생활하던 여러분의 목사가 ‘총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다. 여러분도 같은 이해를 가지고 기도하고 함께 일하자는 의도 때문이다. 사실 또 한 가지는 다음 주일부터 전국 교회가 지금 내가 내놓은 증언 제목을 가지고 세 주일에 걸쳐 설교하게 되어 있는데 내 사정상 미리 앞당겨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 총회에 가서 뭐 하자는 것이요?’ 이렇게 묻는다면 세 마디의 대답을 할 것이다. 하나는 전전 주일 증언 제목인 ‘민중과 함께 사는 교회’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 할 것이고, 두 번째 대답으로는 한국의 기독교가, 우리 교단이 민족을 단위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주의화되어 버렸고 개인적 이해와 관련이 없다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 한국 교회를 민족을 위해 일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은 화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대답은 다음 주일 증언 제목이다.
처음 한국 교회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전통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전통이 도중에 크게 퇴색하여 버렸고 지금에는 민족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어떤 정권이나 권력에 아부하고 그 편에 서는 것이 곧 민족을 위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정론이 된 형편에 떨어져 있다.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 하기보다 무엇이 권력자의 기대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수백 년간 강대국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살아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그 그늘 아래 들어간 이후 줄곧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장단이 나오니 바보 춤을 추어 온 격이다. 먼 옛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해방이 될 때만 해도 엄연히 대한민국 정부가 있었으나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진주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이 나라를 두 동강이로 만들어 40년의 비극을 가져오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얼마나 열렬하게 그들을 환영했던가? 북은 북대로 소련군을, 남은 남대로 미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어이 우리를 분단의 비극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6ㆍ25 동란 때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동란이다. 유엔군, 특히 미군이 희생해 가면서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은 우선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그저 미국에 대하여 고마움만 가질 뿐이다. 그러나 미군은 우리 국군을 돕고, 전쟁의 주체는 반드시 우리였어야만 한다. 그런데 미군이 개입해 주었다는 것만 감사히 여겼을 뿐 우리가 우리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노력은 없었다. 그때 미국을 주체가 되도록 놓아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의 국방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미군이 뭐라고 하나’ 하며 그들의 입을 보고 있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해방 때도, 6ㆍ25 때도 그저 좋아만 했다. 휴전 협정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수석 대표는 외국인이다. 우리 땅에 핵무기가 있다고 한다. 북을 지키는 데 핵무기까지 있을 필요가 없다. 북에도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을 지키는 데 그런 어마어마한 무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참새 잡는 데 미사일을 겨냥하는 격이다. 비행기로 겨우 1시간 반이면 북 끝에서 남 끝까지 갈 수 있는 손바닥만한 나라다. 이 땅에 핵이 있으니 안전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9월 1일 새벽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되었다. 269명의 민간인이 몰살을 당했다. 왜 하필 미국에서 떠나 일본으로 가려던 비행기가 공격의 목표가 되었으며, 왜 하필 그 비행기는 일본, 미국이 아닌 한국 비행기냐? 소련의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비난을 가볍게 해도 좋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소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성토하는 분위기가 차분하지 못하고 들떠 있다는 지적이다. 역시 해방, 6ㆍ25 전쟁, 휴전 때처럼 국제 사회, 국제 정치 속에서의 우리 민족을 생각하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세계 강대국이 정보를 주는 대로, 여론을 이끌어 가는 대로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고 있다. 소련에 대해서나 미국에 대해서나 일본에 대해서나 우리는 그 어느 나라에 대해서나 아부하거나 사려 없이 한 편에 서버림으로써 이 민족은 불쌍하고 불쌍한 동네 북이 되고 있다. 남이 주는 정보만 듣고 그저 흥분하고 그저 규탄하기만 한다면 이 나라의 운명이 결코 개선될 수 없다. 그런데 교회조차 분별력이 없다. 시키는 대로 권력자가 좋아함직한 일이라면 그 일만은 앞을 다투는 추한 꼴이 되어버렸다.
이 민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의 관심의 출발은 ‘민족’이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의 사건을 일으키신 야훼 하나님의 관심은 ‘민족’이었다. 우리 교회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고 기도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독립되어 있지 않다. 세계 열강과의 관계 속에 있다. 민족이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도 기도하며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여름 동안 해이해졌던 자신을 정비하는 뜻에서 성찬을 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이 성찬이 민족의 현실, 민족의 과제 가운데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찬의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가장 큰 일은 정신을 차리고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회상 노트]
미국으로 추방당한 김대중 선생은 매일 같이 강연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는 단식으로 연금에 항의했다. 부산 미 문화원에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국의 학원 사찰은 노골적이고 대담해졌다. 급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0년 광주의 학살이 부메랑이 되어 이제는 군부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시작했다.
서울의 송암교회에 경찰이 난입한 사건도 발생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서울연합회가 ‘6ㆍ3사태 19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은 “한일협정 19년과 오늘의 한ㆍ일 관계”였다. 민족의 내일을 가늠해 보자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가는 청년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던지고 교회에 난입했다.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당국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와중에서 나는 9월에 있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해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 역사’를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새 역사 30년’ 기념 총회였다. 또 내가 준비하는 첫 총회였다. 기장이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한국 교회가 이 시대에 어떤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인가? 총회 주제에 나의 고백을 담고자 했다.
“기장 - 민중과 함께, 민족을 위하여, 땅 끝까지”
온 총회가 이를 공유하게 되기를 갈망했다. 지(支)교회로 이어져 나가게 되기를 열망했다. 사실 총회가 어떤 고백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지교회가 이를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지교회가 고백의 일선이다. 그러나 총회가 지향하는 고백을 시도조차 미루는 것이 지교회의 실정이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그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수도교회는 나와 호흡을 함께 하는 교회로 서 주었으면 했다. 들리는 소문은 내 기대와 같지 않았다. 다른 교회들과 다르지 않은 교회로 변해 갔다. 어느새! 아니, 더 움츠려드는 것 같았다. 안타까웠다. 나는 수도교회의 목회자였지만 목사와 교인이라는 관계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자 했었다. 교인들과 동지적 관계를 갖고자 했고 어느 정도 그리된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수도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다. 총회 총무의 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신앙고백적 후원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수도교회 교인들에게 나의 신앙고백적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고백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 놓은 것은 아니다. 수도교회에서 평소 설교해 왔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설교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서 당황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속내를 털어 놓은 것이다.
아니!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라 믿었기에 그리 안할 수 없었다.
[회상 노트]
미국으로 추방당한 김대중 선생은 매일 같이 강연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는 단식으로 연금에 항의했다. 부산 미 문화원에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국의 학원 사찰은 노골적이고 대담해졌다. 급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0년 광주의 학살이 부메랑이 되어 이제는 군부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시작했다.
서울의 송암교회에 경찰이 난입한 사건도 발생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서울연합회가 ‘6ㆍ3사태 19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은 “한일협정 19년과 오늘의 한ㆍ일 관계”였다. 민족의 내일을 가늠해 보자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가는 청년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던지고 교회에 난입했다.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당국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와중에서 나는 9월에 있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해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 역사’를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새 역사 30년’ 기념 총회였다. 또 내가 준비하는 첫 총회였다. 기장이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한국 교회가 이 시대에 어떤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인가? 총회 주제에 나의 고백을 담고자 했다.
“기장 - 민중과 함께, 민족을 위하여, 땅 끝까지”
온 총회가 이를 공유하게 되기를 갈망했다. 지(支)교회로 이어져 나가게 되기를 열망했다. 사실 총회가 어떤 고백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지교회가 이를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지교회가 고백의 일선이다. 그러나 총회가 지향하는 고백을 시도조차 미루는 것이 지교회의 실정이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그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수도교회는 나와 호흡을 함께 하는 교회로 서 주었으면 했다. 들리는 소문은 내 기대와 같지 않았다. 다른 교회들과 다르지 않은 교회로 변해 갔다. 어느새! 아니, 더 움츠려드는 것 같았다. 안타까웠다. 나는 수도교회의 목회자였지만 목사와 교인이라는 관계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자 했었다. 교인들과 동지적 관계를 갖고자 했고 어느 정도 그리된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수도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다. 총회 총무의 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신앙고백적 후원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수도교회 교인들에게 나의 신앙고백적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고백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 놓은 것은 아니다. 수도교회에서 평소 설교해 왔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설교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서 당황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속내를 털어 놓은 것이다.
아니!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라 믿었기에 그리 안할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