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하나되는 하늘
1983년 11월 6일 / 마가복음 15장 37-39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나는 지난 주일 하나님은 특별한 무리를 부르시는데 우리가 대체로 그 부르심 앞에 서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우리의 신앙이 소위 보장종교에 서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성숙한 신앙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곧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일이라 했다. 제 십자가, 내 십자가는 무엇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십자가라 하면 두말할 필요없이 예수께서 달려 죽으신 그 십자가를 말한다. 이 예수의 십자가는 궁극적인 승리의 상징으로 또는 궁극적인 사랑의 상징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의 상징으로, 개인 신앙의 명상의 대상으로, 또 때로는 교회 제단의 장식으로. 혹은 목걸이로, 요사이는 목사들의 배지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제 십자가’가 무엇이냐 할 때는 다 각각 그 이해가 달라진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제 십자가’는 무엇인가? 아니, 사실은 우리에게서 십자가가 멀리 떠나버린지 오래다. ‘제 십자가’, ‘당신의 십자가’는 무엇이라고 믿고 있느냐고 지금 물으면 아마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종이를 나누어 주고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또는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대하여 쓰라고 한다면 거의 백지로 되돌아오고 말 것이다.
현대인에게 십자가란 가장 인기 없고 관심이 없는 것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난 주일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상징 앞에서 무엇인가를 보장받아 내려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지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신비한 힘을 가진 예수의 십자가만이 있고 또 그것만이 필요하지 내 십자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래도 ‘내 십자가는 이것이다’라고 내놓곤 하는 것이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예 하나는 이런 것이다. 속을 썩이고 못되게 구는 자식을 나무라고 분통을 쏟아 놓고는 “이 원수야, 네가 내 십자가다, 십자가”라고 뱉어 놓는다. 또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를 그 며느리는 “내 시어머니가 내 십자가”라고 한다. 이럴 때의 십자가는 미운 것이요 죽이고 싶도록 싫은 것이다. 그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한다면 금방 이의가 생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체념이 깃들어 있고 운명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 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운명으로 알고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할 때의 십자가는 체념도 아니고 운명론에 빠져 들라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십자가 이해는 퍽 다르다. 우리 교회가 애송하는 찬송가 369장을 보자.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용감한 자 옛날처럼 선뜻 대답하리라.”
이런 찬송을 부를 때 여러분은 그 십자가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아마 선뜻 감옥을 생각해낼지도 모르겠다. 길거리의 데모 같은 것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앞의 ‘제 십자가’ 이해와는 퍽 다른 것이다. 물론 우리의 상황이 이같은 이해를 강요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상의 권력과 대결하는 십자가다. 한국의 시인 김지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제 십자가’의 개념이 만약 이렇게 인정이 되어버린다면 369장을 여기 온 교인이 함께 부르지만 그러나 과연 진심으로 부를 수 있겠으며, 예수가 말씀하신 ‘제 십자가’는 그런 것만일까? 그것을 포괄하는 어떤 원리가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십자가의 큰 원리가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세상권력과 대결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궁극적 사랑을 실현케도 되는 그런 원리는 무엇일까?
다시 지난 주일 본문으로 우선 가 보자. ‘제 십자가’ 앞에 ‘자기를 버리고’가 있고 뒤 에 ‘따르라’가 있다. 제 십자가란 자기를 버리는 일이며, 또 예수를 따르는 일이라는 뜻으로 간파될 수 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처지와 조건을 버리는 것이다. 오늘 신약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기막힌 상징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십자가의 고난의 절정이 죽으신 순간이라면 그 순간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진 기이한 현상으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말하자면 십자가는 위와 아래가 하나가 되는 바로 그것으로 이해되었다. “드디어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이어 나오는 백부장의 증언은 예수께서 “이와 같이”, 어떻게?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지는 것과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가 자기를 버리고 아래와 만나는 것이요, 하늘이 자기를 버리고 땅과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고 죄된 사람과 만나는 결정적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위, 하늘,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진정으로 아래, 땅, 죄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행위요, 그것과 연대와 일체감을 구현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이해된 십자가는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낮은 곳, 낮은 자와 연대성을 이루고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해낸다면 우리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신적 사건이다. 위, 하늘, 하나님이 낮은 것과의 유대와 일체감을 갖는 것, 자기를 버릴 수 있는 것은 아픔과 고뇌와 사랑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신적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이것 없이는 자기를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본성 가운데 편하고자 하는 본성이 강하게 우리를 포로로 붙잡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 과학은 인간을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해줄까 하는 것이다. 속셈할 것 없이 계산기를 눌러만 주면 기계가 골치아픈 계산을 해주게 되었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번거로움도 컴퓨터가 다 처리해 준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기도 귀찮아 소위 리모트 콘트롤이라 하여 누워서 단추만 누르면 되게 되어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안 움직이고 생각 안하고 아픔 없고 고뇌 같은 것은 더더구나 멀리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성이다.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과 현대인의 경향은 날이 갈수록 서로 멀어만 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또 예수를 믿으니 우리의 갈등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냥 이렇게 편해지기만 하면 기실 생명력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어쨌든 우리가 고생하고 갈등할 때에야 뭔가 살아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생활이 안정되고 할 일이 없어지면 사람이 멍해지고 마는 것을 경험한다. 편안하기만 했지 뜨거운 가슴도 없고 매운 눈물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소위 좋은 남편을 둔 주부들은 이렇게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혼이 없어져 버린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해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을 골백번 읽어도 제 십자가가 없는데 어떻게 따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생각하라고 외친다. 생각한다는 말은 곧 고뇌도 하고 갈등도 하고 아픔도 사랑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총회에 독일 교회 목사들 12명이 와 있다. 한국 교회를 배우러 오겠다 하기에 오라 했다. 독일 교회는 고민이 없다. 아픔도 없다. 갈등도 고뇌도 없다. 모든 것이 편안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돈은 많으니 온갖 구제사업을 다할 수 있으나 그것도 정부가 다 해주고 있다. 독일 교회는 혼은 없고 사업만 있는 것 같았다. 혼이 없는 교회, 죽어가는 교회,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한국을 알고 싶어하지만 기실 자기들의 회개와 부활의 길을 여기서 찾고 있다. 충격을 받고자 하고 무언가 가슴이 깨지도록 부딪쳐 와야 자기들이 산다고 판단한 것이다. 심장이 멈추려는 사람에게 강한 전기 충격을 주어 회생케 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한국의 고뇌를 나누어 우리에게도 주어달라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자기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 그런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고 거기서 잠을 함께 자도록 해주었다. 중간중간 들려 오는 소리는 독일 사람은 숨을 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고난, 이 고통을 자기들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으며 그 고통의 현장과 아무런 유대나 일체감을 이룩하고 있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십자가의 행위로 해석한다. 아래와 하나되는 위, 땅과 하나되는 하늘이 곧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에 함께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는가? 내 편함 속에 안주해 버리려 하지 결코 고통과 고뇌가 있는 곳에 가려 하지않는다.
제 십자가란 무엇인가? 예수의 십자가는 ‘땅과 하나되는 하늘의 사건’이었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고뇌를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갈등을 나눌 상대를 찾는 일이요, 그래서 그와 일치하고 유대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다. 하늘이 그랬듯이,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자기를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 없으면 생령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공허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구체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 자기 십자가가 추상적일 수 없고 더구나 그것을 진다는 것이 또한 공허한 환상일 수 없다.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할 사람을 찾으라. 거기에 제 십자가, 당신의 십자가가 있다. 우리가 함께 고뇌해야 할 일을 찾아 거기로 가라. 땅과 만나지 않는 하늘은 죽은 하늘이다. 아래와 만나지 않는 위는 아래 없는 위요 따라서 위도 아니다. 인간에게 오시지 않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회상 노트] 땅과 하나되는 하늘
수도교회에는 ‘전도의 날’이나 ‘총동원 주일’이란 것이 없다. ‘친구 초대의 날’이란 것이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초대하여 교회를 맛보게 해주자는 프로그램이다. 예전도 친교도 어울림도 보여주고 우리의 신앙고백도 보여주자는 것이다. ‘예수 믿으십시오. 믿으면 형통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 - 이런 투로 설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잡은 테마는 십자가였다. “십자가 대오(隊伍)에의 초대”가 설교 제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것, 선택당하는 것임을 말해야 했다. 십자가의 길을 걸을 무리를 주님께서 찾고 있다고 설교하려 했다.
다음 주일에도 설교를 이었다. 우리가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을 찾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당신을 초대한다는 심정이었다. 내 가슴 가득히 구속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있었다.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오늘의 신앙인도 교인도 아니라 여겼다.
초대받고 그 예배에 참예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그러나 금방 교인이 되겠다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성공하지 못한 프로그램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그렇다, 그러나다) 나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날, 그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했다면 무의식 속에서라도 복음의 씨앗이 잠재할 것이기에 그렇다. 선교는 단기가 아니다. 장거리 레이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