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수학
1982년 11월 21일 / 누가복음 2장 40-52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신앙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교회도 인간의 뼘 안에 있는 것일 수 없다. 하늘에 속한 존재다. 그러나 그것들을 인간의 셈과 인간의 뼘 속에 넣으려 하는 유혹은 우리에게 없는가? 그런 억지를 우리는 주장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셈에 복종시키는 경건을 찾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두 주간 동안 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더욱 성서에 가깝고 더욱 철저해져야 하겠는데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곧 냉랭하고 비헌신적인 신앙양태로 나타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다. 대개의 경우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인지 아니면 통속적인 신앙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든 경우에는 그 신앙에 열정이 있다. 새벽기도에 나가고 밥만 먹으면 교회일로 집을 나서는 사람에게 신앙의 정연한 논리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대개의 한국 교인들이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신학이 있고 신앙고백이 날카롭고 성서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도 없고 열정도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백이나 신학이 공허한 것이라는 지탄과 자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철저함이 없다. 목숨을 내놓는 철저함이 우리에게는 없다. 또한 교회적으로 말한다면 신학 운운하고 신앙고백 운운하는 교회 - 우리 교회와 같은 교회는 메마른, 뼈만이 있을 뿐이고 살이 없다. 교인이 그렇게 불어나지 않는다. 어떤 신학자의 주장처럼 신앙고백에 철저하면 교인수가 줄어들게 되어있다 하더라도 하여간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기장 교회가 대체로 우리 교회를 확대한 모습이다. 그러니 맨송맨송하고 교인수는 늘지 않고 하니 이것 큰일났다 싶어서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풍토가 생겼다. 사무실에 있노라면 별의별 사안을 가지고 오는 분이 많다. 어느 날은 은퇴 목사님 한 분이 찾아 오셔서 당신이 은퇴한 후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큰일났다는 것이다. 도무지 기장 교회인지 보수파 교회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으로 우리의 고백을 잃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당신은 기장성이 분명한 사람 아니냐? 빨리 바로 잡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충고였다. 수가 늘지 않고 헌금이 늘지 않고 교인들은 처질대로 처져 있고 맨송하기만 하니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흥분을 시켜 미치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첫 주일에 이미, 더욱 철저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우리가 그저 한 교회의 교인일 수만은 없고, 소수이지만 대리적 소수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마치 열두 제자가 열두 지파, 즉 이스라엘 전민족을 대리하여 선택되었던 것과 같다. 그들이 대리적 소수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의식이 철저했기에 오늘 예수의 운동은 전세계에 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대리적 소수라는 의식이 우리에게도 철저하게 있어야 하겠다.
어설프게 설익으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 우리 교회는 이제까지 나오던 그 걸음으로 우리 기장도 이제까지 주장해 오던 그 걸음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도 이제까지 자기가 말하고 주장하고 고백해 오던 그대로 더 밀도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는 때 비로소 예수님처럼 지혜와 키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금번 증언 주제 아래 드리고 있다. 키만 자라서도 부족하며 지혜만 자라서도 부족하다. 지혜와 키, 신앙고백과 실제적인 헌신, 고백의 날카로움과 수적 증가가 모두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 지난 주일과 오늘 같은 신약성서 본문을 봉독했는데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52절)라 했고, 이 때보다 더 어렸을 때를 말한 그 앞 40절에도 “아기가 자라고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하고”라 했다. 몸과 지혜는 함께 자라야 한다. 이것이 건전한 신앙의 성장이요 올바른 교회의 자람이다.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혜와 함께 키도 자라게 하는 것이다. 고백의 날카로움과 함께 수도 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말 내 신앙을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철저한 단계에까지 끌어올려야 하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 교회에 선교의 동지, 예수 운동의 동지가 차고 넘치게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신앙 활력을 불러일으키자. 맥빠진 모습을 걷어치우자. 눈에 총기를 회복하고 바짓가랑이에서 휙휙 바람소리가 나게 해보자. 운동이다. 예수 운동이다. 운동의 동지, 신앙의 동지를 더 얻도록 노력하자.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만 지낸다면 결국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후회하는 바가 크다. 왜 철저하게 되도록 할 수 없었나 하는 것이다. 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고백에, 자기가 믿는 바에 철저할 수 있도록 돕고 육성하지 못했는가 하는 후회가 가득하다. 어느 누구를 보아도 번득이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열성이 죽고 무덤덤하게 되어 버리는 결과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예수의 운동이 과연 이래서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랐다는 말을 독립적으로 쓰고 있지 않다. 52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라 했고, 40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라 했다. 지혜와 키의 자람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키와 지혜가 자라는데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자라더라는 것이다.
신앙고백이나 성서의 본연성, 본질에 논리적으로 철저하려 하는 일이나, 시간을 내고 열심을 품는 일, 혹은 교인수를 늘리고 …… 등등의 일이 모두가 ‘신앙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라는 명분 아래 있지만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자기 주장이기 일쑤다. 살 없는 뼈다귀 신앙이다. 혹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는 열정이요 열심이기 일쑤다. 뼈 없는 살덩어리, 해파리 신앙이다.
우리는 실적을 좋아하고 통계를 좋아한다. 우리 교회는 그런 경향이 없지만 대체로 목사님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실적’이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목사 일 잘한다 하고 실력있다 하는데 교회일이란 또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인의 요구에 끌려 가다 보면 통계를 제시하게 된다. 결국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란 그런 것뿐이다. 사람이 몇이 늘었고 지난 달에 비하여 헌금이 얼마가 더 들어 왔다는 식의 통계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할 수가 없으면 하다못해 교회 마당에 보도블럭이라도 몇장 놓아야 하고 담장이라도 고쳐야만 할 지경이다. 그러나 한정된 교회 구내에 그런 일감이 많지가 못하고 또 예산도 없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떠냐? 보도블럭을 깔았는지 담장을 고쳤는지 고쳐 놓아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잘못했다고 야단하고 핀잔하는 것보다야 아무 말 안해 주는 편이 훨씬 고마운 일이긴 하다. 그래서 입들을 다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씀들이 없다. 하여간 이런 것에 매이는 것이 곧 ‘인간의 수학’이다. 하나님이 꼭 그 계산을 옳다 하실 것이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사람의 계산에서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박수를 보내도 하나님의 계산에는 맞지 않는다 하실 일이 많다.
우리가 관심하여야 할 점은 바로 이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성장을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지난 주일 말씀드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성서 연구실장인 베버(Hans Weber)는 “하나님의 수학”이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수학’에 대치되는 용어다. 성서에서 보는 교회들은 통계나 실적,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에 관련되어 성장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희생과 관련되어 있었고 순교와 관련되어 있었고 참 제자가 되려는 피나는 투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요컨대 하나님과의 관련에서, 하나님의 수학에 의하여 훌륭하다고 답이 나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을 내어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수학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 교회가 열심을 내어 헌금하고 전도하여 2부, 3부 예배를 드리게 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으면 그것은 인간의 수학에 머물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는 모처럼 수도 늘리고 몸도 크게 하자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을 떠난 키의 성장, 수의 성장, 열정, 열심이 아니다. 교회가 성장했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인간의 믿음이 성장했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나 양의 성장이 아니라, 무분별한 열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더욱 두터워지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 일체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를 운영하고 살림하고 교인을 돌보는 일체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커피를 마실 때도 기도하고 차에 탈 때도 내릴 때도 기도하자. 그러나 이런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라 할 수 없다. 그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바탕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나를 받쳐 놓고 있는 그 어떤 바탕 색깔 같은 것 -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적이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내 생활 전체가 총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된다.
우리 교회가 서 있는 존재의 근거가 더욱 예수 그리스도적이 되어야 한다. 사고하고 판단하고 사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예수의 생각과 판단과 삶에 근사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5절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한다. 무엇이?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 교회의 삶 전체가 말이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하나님의 수학은 의식하지도 않고 인간의 수학에 눈이 가리워 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묻자.
[회상 노트] 하나님의 수학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로 피선되었다. 9월의 일이었고 너무나도 예상치 않았던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 총회 총무를 오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정치력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자리인데 그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쫓겨나든지 스스로 박차고 나올 것이니 우선 후임목사 모시기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일종의 겸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정들고 손때 묻힌 교회이지만 떠나야 한다. 그래서 떠날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내가 떠나면 금방 교회성장주의로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와 더불어 지낸 거의 16년이란 긴 세월동안 눌려온(?) 데 대한 반작용이 걱정되었다.
우리 교회는 자라지 않는 것인가? 예산도 고작 연 10%만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주변에는 쑥쑥 자라는 교회도 많지 않은가? 내 귀에까지 들려 오지는 않아도 나는 들을 수 있고 듣게 되곤 했다. 누군가가 딱히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내 속에서 그같은 문제가 제기되곤 했다. 나도 전력투구하면, 목회에만 전념한다면 교회를 키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분명히 해야 했다. 교회를 키워야 한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확실한 말로 남기고자 했다. 이른바 대형 교회 중에도 더 예수적이고자 노력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대중에 영합하는 목회를 하는 경우도 많다.
원(原) 예수와 받아들여진 예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바른 것은 원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말하자면 원 예수에 승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사이비하거나 예수와는 관계도 없는 예수 신앙은 극복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원 예수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교회가 확산될 수 있었겠는가? 대중과의 영합은 환영할 수 없으나 그럼으로써 교회는 존속되고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원 예수와 왜곡된 예수는 상호보충적일까? 예수가 기대했던 공동체(교회)와 타협하고 왜곡된 현실 교회는 상호보충적 관계에 있는가?
우리는 어차피 예수를 왜곡시킨다. 우리는 어차피 교회를 타협적, 왜곡된 교회가 되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대중에게 더 매력있게 되고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게 된다. 어차피 이렇게 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모두, 모두 죄인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모두 죄의 유혹에서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원 예수를 만나고자 함이 정도다. 왜곡되지 않은 교회를 만들고자 함이 정도다. 그러면 신앙은 굳고 교회는 왜소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더 문제일 것이다. 실제 원 예수를 만나고 원 교회를 세워가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참으로 엄청난 힘이 있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성의 회복이다. 언제나 왜곡되고 있는 것을 부단히 다시 펴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이다. 이것은 너무나 부족하지 않은가! 소수가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조차 잃으면서 소수로 있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다” 그렇다. 정체성이다!!! 이것을 애절하게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