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와 지혜가 자라고
1982년 11월 14일 / 누가복음 2장 41-52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모든 것에는 균형이 있어야 한다. 한 인격에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우리의 신앙에는 균형이 잡혀 있는가? 우리 교회는 균형있게 자라왔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시난 주일에 이런 증언을 드렸다. 교인이 되는 동기가 여러 유형이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뜻이 계셔서 불러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 나는 무엇을, 누구를 대리하고 있는가? 예수는 많은 사람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열 둘을 택하셨을 뿐이다. 그 열 둘은 이스라엘의 전 민족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며 따라서 열 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의식을 가졌던 것이고 그 의식이 철저했었다. 철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과를 놓고 하는 말이다. 열 둘로 시작된 예수 운동은 오늘날 전세계의 방향을 이끌어가고 있고 우리 자신도 그 영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소수라는 것이 항상 하나의 약점이요 부끄러움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소수임을 걱정하고 그렇기에 아무 힘도 없다고 개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실 ‘소수’라는 것이 문제라기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자의식이 없는 것이 문제다. 너는 왜 부름을 받았다고 믿느냐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소수’가 문제가 아니라 대리 의식이 있는 소수냐, 그저 소수일 뿐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이런 뜻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대리 의식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숫적으로 소수라 할지라도 엄청난 힘을 갖는다는 말씀을 드렸다. 열두 제자가 2,000년이 지난 오늘 이처럼 사람의 삶 구석구석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이 대리적 소수에게는 놀라운 힘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다수냐 소수냐가 아니라 대리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을 말했다.
지금은 거대주의 문화시대다. 큰 것이면 모두 좋은 것이고 성공은 언제나 크기와 길이로써 측정되고 있다. 어쨌든 커야 한다. 사람도 커야 한다. 내가 일찍 장가들기 망정이지 요사이 같았으면 장가도 못갈 뻔했다. 남편도 커야, 자리도 커야, 차도 커야 한다. 차의 크기가 그 차를 탄 사람의 신분과 성공을 나타내 주는 세상이다. 따라서 교회의 성공도 역시 커져야 한다는 결론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교회를 지었다 하면 1,000명 혹은 5,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교회를 짓는다. 금액으로도 몇십 억, 혹은 백몇십 억짜리 교회를 짓는다. 그런 교회 앞에서 작은 교회는 성공을 하지 못한 초라한 꼴로 있어야 한다. 큰 소리칠 수도 없다.
한편 이 같은 세상의 추세에 반하는 새로운 경향도 있다. 자본주의 경제 세계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한 책이 있는데 그 책 이름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슈마허(E. F. Schumacher)는 작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을 찾아 가는 노력이라고 한다. 커지면 ‘생명’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작은 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고 우리 나라에도 여의도에 ‘작은 교회’라는 교회가 하나 생겼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주종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수이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성서 연구실장인 한스 베버 목사는 참 제자됨을 말하는 교회일수록 교인수가 줄지도 모른다고 했다. 도대체 한 교회가 숫적으로 어떻게 성장했느냐 하는 것 자체가 비기독교적인 질문이고 관심이라 한다. 수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 교회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지 크게 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문제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교회는 그 교회의 생명력이 문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그 근본 취지에는 이의가 없으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자칫 소수가 된 결과에 대한 변명이요 합리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작은 것이 우리 자신의 불찰과 잘못의 결과는 아니냐는 말이다. 나는 작다는 것이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을 구태여 지향할 필요도 없다. 솔직히 우리가 작다면 철저한 의식, 신앙고백 때문에 작게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와 같은 철저한 의식이 있었다면 결코 작게만 남아 있을 수 없다. 내 신앙의 고백, 우리의 신앙고백이 철저하다면 우선 내 식구에게 이것을 펴지 않을 수 없을 것 아닌가? 내 남편, 혹은 내 아내, 자식에게 같은 신앙의 길에 서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나 이웃에게는 그만두고 내 식구에게조차도 이 길을 함께 가자고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의 고백에 생명이 없었다는 뜻이다. 온 식구가 한 신앙의 길을 가고 더구나 한 고백, 한 사명에 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한 일이 없다. 그만큼 신앙고백, 의식이 분명치 못했다는 뜻이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배우고 기도해야 한다. 배우려고도 않는다. 몸부림치며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거 교회가 작아서 큰일이라고 남의 일을 말하듯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거대화를 지향하는 신앙은 어떤 것일까? 우리 집안에 교회에 다니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의 하루 일과가 무엇이냐면 그저 교회일을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서울로 지방으로 …… 저렇게 해서 무얼 하자는 것인지 나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소위 거대화를 지향하는 신앙 유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다. 신앙의 내용이 중요하지 매일 회의에나 나가고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이냐고 우리는 이의를 단다. 심지어 심방 기간이니 심방을 좀 하자 해도 내 일이 바빠서 못 하겠다는 것이다.
거대화를 지향하면 본래의 목적을 잃기 쉽다. 또 마찬가지로 너무 신앙활동의 폭을 좁혀도 신앙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법이다. 심지어 나중에는 수요강좌는 그만두고 주일 예배조차 부담스럽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 보려 한다. 조그만 구실만 있으면 빠진다. 그러다보니 작으면 생명력이 있는 법이라 하지만 생명력이 없어지고 만다.
이런 것은 정상이 아니다. 신앙이 날카롭기만 하고 숫자는 늘어가지 않는다면 절름발이다. 우리 교회는 절름발이 교회다. 신앙고백의 명쾌함만큼 수가 늘어가지 않는다. 이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 아니라 극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누가 할 것이냐?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한다. 일차적으로 목회자인 나에게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가 신앙의 고백만큼 우리의 크기도 함께 자라가도록 해야 하겠다는 말이다. 우리 개인의 차원에서 신앙의 고백을 날카롭게 하는 만큼 시간을 내고 나를 던지는 폭도 넓어져야 한다. 이것이 병행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인적인 성장이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복음서는 별 말이 없다. 다만 누가복음 2장 41절 이하에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 맨 끝 52절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혜와 키가 자랐다” - 이것이 균형있게 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지혜만 자라면 그만이라고 하는 오류에 빠져 있었지 않은가? 신학, 신앙고백, 교회 갱신, 성숙한 신앙 …… 이런 것만 지향했고 또 그런 것만 자랐다. 지혜만 자란 것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키에 얽매여 있다. 500명, 1,000명, 10,000명에 급급하고 있다. 그래서 통계 숫자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한다. 천 명이었다가 2천 명이 되면 그 교회는 성공했다 한다. 그러나 키만 자랐을 경우 그것을 성공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혜가 자라지 않은 정박아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혜만 잔뜩 자라고 키는 자라지 않는다면 의학용어는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난쟁이’ 라 할까 하여간 정상은 아니다.
키냐, 지혜냐 하고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 갈 수 없다. 지혜와 키 모두가 자라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지혜만큼 키를 키워야 하겠다. 말 한번 듣고 지나가 버리지 말고 키 좀 키우자. 그러나 중요한 것은 키를 키운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키는 어디까지나 지혜를 위하여 지혜의 구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거대화주의에 빠져 들고 만다. 큰 것이 성공이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회상 노트] 하나님의 수학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로 피선되었다. 9월의 일이었고 너무나도 예상치 않았던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 총회 총무를 오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정치력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자리인데 그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쫓겨나든지 스스로 박차고 나올 것이니 우선 후임목사 모시기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일종의 겸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정들고 손때 묻힌 교회이지만 떠나야 한다. 그래서 떠날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내가 떠나면 금방 교회성장주의로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와 더불어 지낸 거의 16년이란 긴 세월동안 눌려온(?) 데 대한 반작용이 걱정되었다.
우리 교회는 자라지 않는 것인가? 예산도 고작 연 10%만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주변에는 쑥쑥 자라는 교회도 많지 않은가? 내 귀에까지 들려 오지는 않아도 나는 들을 수 있고 듣게 되곤 했다. 누군가가 딱히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내 속에서 그같은 문제가 제기되곤 했다. 나도 전력투구하면, 목회에만 전념한다면 교회를 키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분명히 해야 했다. 교회를 키워야 한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확실한 말로 남기고자 했다. 이른바 대형 교회 중에도 더 예수적이고자 노력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대중에 영합하는 목회를 하는 경우도 많다.
원(原) 예수와 받아들여진 예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바른 것은 원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말하자면 원 예수에 승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사이비하거나 예수와는 관계도 없는 예수 신앙은 극복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원 예수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교회가 확산될 수 있었겠는가? 대중과의 영합은 환영할 수 없으나 그럼으로써 교회는 존속되고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원 예수와 왜곡된 예수는 상호보충적일까? 예수가 기대했던 공동체(교회)와 타협하고 왜곡된 현실 교회는 상호보충적 관계에 있는가?
우리는 어차피 예수를 왜곡시킨다. 우리는 어차피 교회를 타협적, 왜곡된 교회가 되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대중에게 더 매력있게 되고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게 된다. 어차피 이렇게 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모두, 모두 죄인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모두 죄의 유혹에서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원 예수를 만나고자 함이 정도다. 왜곡되지 않은 교회를 만들고자 함이 정도다. 그러면 신앙은 굳고 교회는 왜소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더 문제일 것이다. 실제 원 예수를 만나고 원 교회를 세워가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참으로 엄청난 힘이 있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성의 회복이다. 언제나 왜곡되고 있는 것을 부단히 다시 펴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이다. 이것은 너무나 부족하지 않은가! 소수가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조차 잃으면서 소수로 있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다” 그렇다. 정체성이다!!! 이것을 애절하게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