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간성의 극복
1981년 6월 7일 / 에베소서 4장 17-24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새 사람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전체 - 공동체 - 역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役事) 같은 종교적 현상이나 기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 거듭남, 구원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고 믿음의 흔적이 있게 되기를 원한다. 술을 끊고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다든지, 무언가 성령의 강제를 당한다는, 그래서 내가 달라지는 경험을 기대한다. 종교의 영역에서 있을 수 있는 기대일 것이다.
신앙에 정진하면 사람이 바뀐다. 그러나 대담해지거나 자유로워지는 변화가 아니다. 작은 규례를 정해 놓고 거기에 위반하지 않으려 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서 규모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것을 반기독교적이라거나 비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 신앙생활이요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신앙을 도덕적 수준에 머물게 함으로써 ‘전체’ - 공동체 - 역사를 볼 수 없게 해서는 아니 된다.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으나 사회적 관심을 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성령 받음의 증거는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에 있지 않다. 인간이 새로워짐이 성령의 역사다. 새로워짐, 새 인간이란 옛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정의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 인간을 말하면 교인이 모이지 않는다. 도덕을 말하고, 텔레비전의 교양 프로보다 조금 못한 강좌를 하면 사람들이 모인다. 내 욕심밖에 생각할 수 없던 내가 이웃을 보게 된 것, 정의 같은 것은 내 일이 아니라 하던 내가 정의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 이런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이는 교인들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도덕 이상이다. 기독교는 윤리 이상이다. 기독교는 인간본성의 개혁을 이루어낸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런 기독교를 신앙하도록 어떻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리로 가느냐 하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교인들에게 다시 설교하고 또 다시 설교하리라. 목사의 당연한 직무가 아니겠는가? 교인들이 싫다 해도 그리하리라. 그러나 나도 힘들었다. 그것은 곧 나에게 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성령강림절이다. 우리의 신앙이 사회성을 띠는 경우 우리는 개인적인 인간성이 개혁되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인 과제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개인적 성품이나 인간성이 예수를 닮아 거듭나야 한다. 우리의 인간성은 거듭나고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만일 산 전체의 형세가 어떻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겠는지를 염두에 두고 등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심히 걷고 산을 탄다고 해도 좋은 등반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산을 전체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산을 오르는 목적의식도 분명해야 좋은 등반가가 될 것이다. 결국 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않을 때는 부지런히 오르고 내리고 또 걷는 그 행위가 부지런한 몸놀림이지만 결국은 산속 깊은 미로에 빠져 들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도 다 각각 다르다. 어떤 이는 개인문제에, 또 어떤 이는 사회문제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종교가 매우 지엽적인 것에만 급급하게 되는 때 - 그래도 성자도 나올 수 있고, 대단한 경건주의자도 나타날 수 있지만 - 그것이 그 한 사회를 정의롭게 하고 의와 진리에 근거한 사회로 바꾸어가는 데는 전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때가 너무 많다. 신앙을 개인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는 경우나 사회적 관심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 모두가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인적 동기가 종교에 입문한 이유가 되고 또 종교에 입문해서도 그 추구하는 바는 역시 개인적 관심사가 된다. 어차피 종교란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개인적이고 열정적인 것으로 성격지어져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100년이 된다. 그 동안 교인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 현재 800만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2할이 넘는다. 그러나 이 교인들에 대한 인상은, 요즈음은 그것조차 희미해져 가지만, 성탄절에 구호품을 들고 가난한 집이나 혹은 양로원, 고아원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자비와 사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열심으로 하게 되는 것이 좋은 교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에 열정을 갖는 것이 종교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나 사회에 불안이 몰아쳐 오는 때 소위 부홍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의 문제가 꼬이고 꼬여서 탈진해 버리게 되는 때 누구나 열광적인 부홍회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부흥회를 찾아 종교적 열정을 갖게 되고 금욕주의적이고 자신에게 철저한 윤리생활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종교인이 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신앙의 형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커다란 교회를 이루어 보자는 경향 속에 휘몰려 가고 있다. 사회가 풍요사회를 지향하면서 현재의 교회들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기업체를 형성하는 것처럼 비대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교회의 목표를 예산 1억 돌파 니 5억 돌파니 하는 것에 두거나 교인 1천 명 목표니 5천 명 목표라는 표어를 너무 흔히 볼 수 있다. 목회 성공사례라는 것이 어느 잡지에 실린 것을 읽었다.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개척 2년 만에 1천 명 돌파에 2억의 예산을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왜 눈물로 기도했느냐, 또는 왜 교회를 개척하려 했느냐에 대한 신앙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위의 세 가지 지적에 한 공통점이 있다. 공통점이란 종교인이 된다든가 교인이 된다는 것에 역사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 교회에 열심인 사람, 혹은 맹목적으로 교회에 충성을 하는 사람이었지 자신의 신앙이 이 사회나 이 나라와 어떤 연결점이나 상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왜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좁아지고 개인화 되어버렸나? 종교란 원래 그런 것이고, 기독교 역시 그런 것인가?
우리는 기독교인이지만 우리 민족문화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면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하여 조예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저 상식적인 생각을 해 본다면 우리 민족문화 속에 들어와 있는 정서 가운데 하나는 ‘감상적 자비심’이 아닌가 한다. 현대에 와서까지 방생(放生)이라 하여 강가에서 고기를 놓아주는 예식이 전해져 오고 있지만 삼국시대 이후 그 같은 일은 얼마든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아이들이 새를 잡아 노는 것을 보면 눈물을 머금고 그 새를 사서 놓아주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당시를 포함하여 이 민족은 동족상잔을 700년간이나 계속하였다. 그 상잔의 모습도 잔혹하였다. 죽이고 죽고 귀를 떼어가고 사람 가죽을 벗겨가는 잔혹함을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하면서도 새나 물고기는 방생하는 이 종교적 모순이 하나의 틀로서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잔혹한 살생을 자행하면서도 새나 물고기에 대하여는 자비심을 갖고 방생해 주었던 감상적 자비심 - 그것을 신앙이라 여겨왔다.
조선시대에 세조가 사육신 등 많은 충신과 의인을 살해하였으면서도 종교적 열정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절을 무수히 건립하였고 많은 불경을 출판하여 불교 중흥에는 상당한 업적을 남겼던 사람이다. 정치적 살인과 종교적 열정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의 종교적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고맙게 여긴 것이 한국 종교의 전통이다. 말하자면 정치는 정치고 종교는 종교라는 전통이 우리 종교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자고 하면 ‘제 가정 하나 못 다스리는 놈이……’라는 자각심이 불현듯이 일어난다. 웅지를 품을라치면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우리의 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평천하를 생각하고 웅지를 품으려는 사람에게 치국으로 생각을 좁히게 한다. 치국을 하려 하면 제가가 더 급하다는 것이다. 그래 제가를 하자니 수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신에 한 평생을 보내는 것이 종교인의 바른 자세라는 것이 우리의 뼈 속에 깊이깊이 새겨져 있다. 요컨대 우리의 전통적 종교들은 우리의 눈을 작게, 우리의 시야를 좁게, 개인화시키고 말았다. 종교가 사회 전체를, 나라 전체를, 하물며 인류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그것을 과제로 삼게 하지 않았다. 고아원을 찾는 자비심, 열정적 신앙, 자기의 수양과 도야에 심취케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 종교의 근본과는 상반된 사회가 그들 앞에서,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나갔던 것이다.
기독교에 입문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역시 이 같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 자비심을 개발하거나 자기 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개인 신앙, 절을 짓고 시주를 하는 것처럼 교회에만 열성하는 열정적 신앙이 바른 신앙자세로 여겨지고 있는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본질에 충실하자면 이 개인적 신앙을 사회 전체 속에서 그 사회를 개혁하고 그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는 신앙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평천하를 하자고 열심히 일한다면 수신이 되지 않을 리 없다. 동족상잔을 지양하는 자가 다른 생물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확신이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소명감이 있다면 그가 결코 방탕과 탐욕과 온갖 더러운 일을 하는 개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최근 나는 퍽 당황하게 되었다. 이 둘이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일하며 경제적 평등과 사랑의 일반화를 위하여 열정을 갖는다는 것이 그 개인의 성품과 인간성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신앙이 고리타분하지 않다는 것과 신앙의 깊이가 없다는 말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벌써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기독교란 개인의 인격 도야나 완숙한 성품을 목표로 하는 종교가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과 생이 그랬고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바울 사도의 편지와 가르침도 개인적 문제에 과녁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들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개의 편지는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신학적 주장을 펴고는 그 편지 끝부분에서는 으레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권하고 있는 특징을 본다. 로마서도 복음의 문제를 길게 다루고 마감 부분에 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형제와의 다툼, 덕있는 생활 등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도 하나인 공동체를 말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또 역시 새로운 생활, 빛의 자녀다운 행동 등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초대 교회 때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자고 교인들을 훈련시켜 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건성이나 인간성은 여전히 삐뚤어져 나가는 것을 그 때도 하나의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사회의 정의, 경제적 평등,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일관했었다. 이것은 분명히 개인적 신앙 일변도인 지금까지의 신앙에 대한 반작용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우리를 회귀시켰던 일이었다. 우리의 신앙의 동기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 신앙을 이 방향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신앙에 하나의 바퀴를 더 달아야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성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이라 하면서 헛된 생각, 무지와 완고 속에 있을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감각을 잃고 방탕하며 탐욕을 부리고 온갖 더러운 일을 자행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우리가 만약 정의를 주장하면서 옛 인간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그 정의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약 자유를 기도하면서 정욕에 썩어져 가는 옛 인간성 속에 그대로 있다면 그 기도는 허위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면 새 인간성을 입어야 한다. 인간이 새로워져야 한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옛 인간성을 벗어 던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새 인간성을 입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