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25-32] 새 인간성의 창조 – 1981년 6월 14일, 김상근 목사

새 인간성의 창조

1981년 6월 14일 / 에베소서 4장 25-3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새 사람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전체 - 공동체 - 역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役事) 같은 종교적 현상이나 기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 거듭남, 구원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고 믿음의 흔적이 있게 되기를 원한다. 술을 끊고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다든지, 무언가 성령의 강제를 당한다는, 그래서 내가 달라지는 경험을 기대한다. 종교의 영역에서 있을 수 있는 기대일 것이다.

신앙에 정진하면 사람이 바뀐다. 그러나 대담해지거나 자유로워지는 변화가 아니다. 작은 규례를 정해 놓고 거기에 위반하지 않으려 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서 규모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것을 반기독교적이라거나 비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 신앙생활이요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신앙을 도덕적 수준에 머물게 함으로써 ‘전체’ - 공동체 - 역사를 볼 수 없게 해서는 아니 된다.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으나 사회적 관심을 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성령 받음의 증거는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에 있지 않다. 인간이 새로워짐이 성령의 역사다. 새로워짐, 새 인간이란 옛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정의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 인간을 말하면 교인이 모이지 않는다. 도덕을 말하고, 텔레비전의 교양 프로보다 조금 못한 강좌를 하면 사람들이 모인다. 내 욕심밖에 생각할 수 없던 내가 이웃을 보게 된 것, 정의 같은 것은 내 일이 아니라 하던 내가 정의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 이런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이는 교인들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도덕 이상이다. 기독교는 윤리 이상이다. 기독교는 인간본성의 개혁을 이루어낸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런 기독교를 신앙하도록 어떻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리로 가느냐 하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교인들에게 다시 설교하고 또 다시 설교하리라. 목사의 당연한 직무가 아니겠는가? 교인들이 싫다 해도 그리하리라. 그러나 나도 힘들었다. 그것은 곧 나에게 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을 여러분은 만나고 있는가? 성령과 함께 살아 가는가? 성령은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 기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기적 가운데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기독교를 신앙한다는 것이 흔히 개인적인 인격을 도야한다든가 자기 신앙의 향상을 위하여 열정적이 되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난 주일 증언을 통하여 그 같은 경향은, 우리의 경우 유교와 불교의 깊은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신앙이 사회화한다고 하여서 개인적인 성숙이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다.

지금은 성령강림절 기간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하셨던 초대교회 시절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신 증거가 있는가? 우리가 사회 정의, 경제적 평등,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긍지를 가지며 살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 가운데 성령이 오신 증거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일꾼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성을 입지 않고 옛 인간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자신은 그대로 옛 인간성 속에 머물러 있는 모순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증언했다. 새 인간성을 입자는 바울의 교훈을 오늘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겠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다. 바울은 4장 17-24절에서 옛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성을 입으라고 권한다. 인간성의 혁명은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간 홀로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가능할 수 있다면 성령에 의한 기적이다. 홍제동 부근을 지나가는데 “성령이 기적을 창조하는 OO교회”라는 교회 안내간판이 눈에 띄었다. 성령의 기적이란 무엇일까? 성령을 받으면 소위 신비적이거나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고는 자기 시어머니에게서 오랫동안 받아내지 못했던 돈을 받아낼 수 있다고 예언하게 되었고,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돈을 기막히게도 받아냈다는 경험담을 들었다. 또 성령을 받으면 불치의 병도 한 번의 기도로 낫게 해준다는 기적적인 경험을 갖게 된다고 한다. 성령의 일은 이 같이 신통한 일들일까?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기적,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는 기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성에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 이상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없다. 도대체 죄에 얽매인 인간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악마에게서 벗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이고 인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이상의 기적이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도대체 옛 인간성이란 무엇이고 새 인간성, 곧 24절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거짓” 가운데 사는 것이 옛 인간성이라는 것이고 “이웃에게 참된 말을 하는 것”이 새 인간성이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 “참된 말”이란 “바른 재판”을 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진실을 보존하는 것,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새 인간성이다.

성을 내어 원수를 맺는 것은 옛 인간성이다. 성을 냈더라도 곧 그 노여움을 푸는 것은 새 인간성이다. 성을 내고 있는 상태는 악마가 나를 요리할 수 있는 악마의 기회라는 것이 성서의 견해다. 사람이 바닷물 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때 상어에게 공격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같이, 성을 내고 있는 때 악마가 마음대로 끌고 다닐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도둑질을 계속하는 것은 옛 인간성이며 제 손으로 일해서 정당하게 사는 것은 새 인간성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도둑질하는 사람, 범법자 계층의 사람까지 교회의 공동체에 환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유가 어떠하든 도둑질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쁜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아직도 옛 인간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요 “덕을 세울 수 있는 유익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게 하는 것”이 새 인간성이다. 우리가 말에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예수의 다음 말을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생각없이 말을 해도 그들이 심판 날에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는 네 입으로 한 말로 무죄하게도 되고 유죄하게도 될 것이다”(새번역, 마 12:36-37).

우리에게 무한한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다시 한번 소위 옛 인간성과 새 인간성을 정리한다. 악독, 격정, 분노, 소란, 욕설, 온갖 악의 - 이런 옛 인간성을 벗어 버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친절하며 다정하게 되어 ……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라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어떤 특정한 교회에 보낸 편지라기보다 하나의 회람 편지였다. 회람 편지란 어느 특정 교회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 일반적인 문제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거짓 속에 살고 노하여 악마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고 하면서도 도둑질을 여전히 하는가 하면, 나쁜 말을 함부로 뱉어 놓는 것 - 이런 것이 문제였다. 악독을 가슴에 그대로 두고 격정과 분노를 언제까지라도 품고 소란을 일으키며 욕설을 하고 악의를 품고 사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문제였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 같은 인간성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만 고찰하면 기독교란 역시 도덕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는 종교요 도덕적으로 착해지게 하는 종교라고 생각될 수 있다. 내적인 성결을 기독교의 본질로 오해할 수 있다. 중세기에 살았던 많은 성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도덕적 성자였다. 토마스 아켐피스, 성 프란시스, 어거스틴 등은 도덕적 성자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참회록』에 심지어 애기 때 어머니 젖꼭지를 물었던 것을 회개하기까지 했다. 물론 철저한 자기 회개의 한 예이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일은 도덕 이상의 것이다. 개인적인 순결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앞의 교훈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교인과 목회자 사이에서, 정치 권력자와 국민 사이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서, 모든 계층과 계층 사이에서 옛 인간성을 추방해야 한다. 거짓을 버리고 정의를 세우는 새 인간성, 성내더라도 피차 파멸에까지 이르지 않으려는 새 인간성, 도둑질하고 착취하지 않는 새 인간성을 사회 안에 이루어가야 한다. 악의에 찬 선전으로 성한 사람을 공산당으로 몰아가는 해방 이후의 36년간의 옛 인간성을 벗어 버려야 한다.

성령은 그 일을 가능케 하신다. 어떻게? 성령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참된 말을 하게 되고 노여움을 쉽게 풀게 되는 것인가? 기계적으로 정당하게 벌어서 살게 되고 유익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게 되는 것인가? 친절해지고 다정해지고 용서하게 되는 것인가? 이 사회에 성령이 오셨다는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이 사회가 새로운 사회가 되는 것인가? 그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일 수는 없다. 성령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아멘’ 하는 우리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 뜻에 ‘아멘’ 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여기 두 절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시오”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다. “우리”는 누군가? 거룩한 교인들인가? 물론 교회를 포함한다. 그것을 포함하여 온 사회, 온 나라가 한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도덕의 사회화요 도덕의 기독교화다. 기독교적 도덕이란 ‘나’만의 과제가 아니다. 온 사회, 온 나라의 과제다.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이 때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한 몸의 지체임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나아가 지금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한 몸의 지체라는 이 엄숙한 사실을 수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한 몸의 지체들 사이라면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참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노여움을 영원히 품을 수 없다.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도둑질할 수 없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여 가난한 지체를 돕게 될 것이다.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나쁜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덕을 세울 수 있는 유익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서로 친절하고 다정하고 용서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 되고 만다. 우리의 형제에 대한 죄는 형제에 대한 죄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거하시고 우리 사이에서 일하시는 성령에 대한 범죄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고 성령의 뜻을 따라 새 인간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성을 입는다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창조적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짓으로 이지러진 너와 나의 관계를 바로잡고, 이 역사에 “참된 말”로 현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갈갈이 찢겨진 우리 사이를 한 몸이 되게 하는 기적을 낳을 것이며,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는 1980년대, 한국의 땅을 한 몸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령의 능력으로 새 인간성을 입는다면 모든 도둑질을 중지하고 오히려 애정과 사랑으로 이웃을 돕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용납하게 될 것이다. 새 인간성을 입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성령이시여,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라고, “우리에게 새 인간성을 입히시옵소서”라고 기도하자. 너와 내가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비상한 시점에 서 있다. 인류의 운명을 걸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자. 성령강림절이다.